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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44화 (901/2,000)

1144화. 덫

*

“석령과 같은 천지영물의 타고난 환술이라면 우습게 볼 것은 아니겠군요. 그런데 성도에서 어째서 황량석령을 잡아오라 한 것인지 그 연유를 아십니까?”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물었다.

“노부가 출발 전 듣기로는 석령 체내의 요정(妖晶)이 마족을 상대하는데 아주 중요한 물건이 될 거라 했습니다. 게다가 막간리 대인께서 성도를 통해 친히 내리신 명이고요. 자세한 사정은 노부도 알지 못합니다.”

흑우상인이 꺼리는 기색 없이 바로 답했다.

“막 선배님께서 내리신 명이라고요?”

한립이 놀라 헛바람을 들이마셨다.

“하하, 그렇지 않았으면 인족에서 한 자리씩 하는 저희가 서둘러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인족 전체를 위한 일이라니 마땅히 도와드려야지요. 어떻게 도움을 드리면 될지 말씀해 주십시오.”

“허허허, 한 시주께서 도와주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 복잡한 일은 아니고, 저희가 석령을 잡는 동안 영물이 다시 황천지화 속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막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천선은 한립의 답에 크게 기뻐했고 흑우상인도 고마움을 표했다.

“그렇지. 천연성의 상황이 좋지 못한 때에 이곳까지 오신 것은 따로 이유가 있으실 테지요? 해야 할 일이 있으십니까?”

천선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물었다.

“예, 황천지화를 이용해 제련할 법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을 만나 사정을 들었으니 제 개인적은 용무는 잠시 미뤄야겠지요.”

“아,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석령이 황천지화 밖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감지하면 성가셔 질 수 있어서요.”

천선이 미안한 얼굴로 다시 고마움을 표했다. 이렇게 한립은 그들을 따라 구덩이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구덩이 안을 살핀 한립의 미간이 좁혀졌다.

널따란 구덩이는 중간 부분을 경계로 아래와 위가 확연히 달랐다. 위는 평범한 암석과 마찬가지로 회백색을 띠고 있었지만 아래쪽은 암녹색의 매끄러운 암석에서 음산한 기운을 풍겼다.

구덩이 깊은 곳은 누런 안개가 가득했고 그 안에서 수시로 쿠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거나 미약한 빛이 번들거렸다. 한립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하얀 진법 원반을 불러냈다.

쉭!

진법 원반이 하얀빛으로 변해 구덩이 아래쪽으로 날아들었다. 위쪽을 지날 때는 아무 이상이 없다가 아래쪽에 진입하자마자 하얀 빛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반 표면에 얼음층이 생겨 누런 안개로 진입할 때는 얼음덩이로 변해 있었다.

쨍강!

잠시 후 안개 속에서 얼음으로 봉해진 진법 원반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듣던 대로 황천지화의 음기가 대단합니다!”

“허허, 누군가는 황천지화가 황천(黃泉)에서 솟아 오른 것이라 믿지 않습니까. 화염의 형태를 띠고는 있지만 극도로 차가운 속성을 띠고 있으니 말입니다. 기이한 한기를 수사가 직접 흡수해 제련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요. 인족에게는 그저 특수한 법기를 제련할 곳이라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는 곳입니다.”

한립의 혼잣말에 천선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혼돈과 조화, 음양오행이야 말로 천지법칙의 근간이 아닙니까. 엄청난 힘을 함유한 황천지화를 아무나 마구잡이로 흡수해 제련할 수 있었으면 관련 신통을 익힌 이들은 수련 속도가 매우 빠르겠지요. 세상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흑우상인이 담담히 끼어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황천지화가 명계로 통하는 입구 중 하나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사실이라면 신기한 일입니다.”

한립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이야기가 아주 오래전부터 있기는 했지요. 하지만 황천지화는 음기가 너무 강해 우리도 고작 천 장 아래까지 밖에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대승기 수사도 기껏해야 만 장 내에서만 활동이 가능하고요. 더 내려갔다가는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해 소문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지요.”

천선이 눈을 빛내고 생각에 잠겼다.

“허허, 두 분은 참 쓸데없는 생각도 많으십니다! 황천지화가 정말 명계로 연결된다 한들 강력한 혼백들이 설치는 곳에 가서 무얼 하겠습니까? 우리 같이 수행을 쌓는 이들의 목표는 진선계로 비승하여 영생불사(永生不死)를 이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정으로 천지와 수명을 같이하는 것이지요.”

“빈승의 의견은 다릅니다. 불문은 본래 선악불이(善惡不二)라 하여…….”

흑우상인의 말에 천선이 고개를 저으며 서로의 견해를 한 마디씩 주고받기 시작했다.

한립은 빙긋 웃으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천선대사는 불문 신통을 수련했고 흑우상인은 도가 공법을 수련했으니 세상을 이해하는 눈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한립의 경우, 노인의 관점과 비슷해서 수련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면 내세를 고려하기 보다는 하루 빨리 대도(大道)를 이루는 것에 온 마음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승려와 노인의 토론은 이렇다 할 결론을 내지 못하고 끝났고 그 후로는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시간이 흘러 3일이 지나갔지만 거대한 구덩이 속 누런 안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한립이 눈을 뜨고 의식으로 구덩이를 살폈다.

“황량석령이 겁을 치른다는 소식에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안심하세요, 한 수사. 점괘를 친 수사는 이 방면에서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저와 천선대사도 이곳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점괘에 따르면 이달 중에 석령이 겁을 치른다고 했으니 머지않아 움직임이 있을 것입니다.”

흑우상인이 차분히 답했다.

“제가 조급했나 봅니다. 엇, 저것은…….”

한립이 무어라 답하려다 어딘가를 바라보았고, 나머지 두 수사도 그의 시선에 따라 구덩이를 쳐다보았다.

구덩이 속 누런 안개가 부글부글 끓어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한기(寒氣)를 발산하고 있었다. 석벽에 서리가 내려앉을 정도였다.

콰릉!

그때 고공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자 산 정상과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광풍이 몰아치고 검은 구름들이 몰려드는 것을 발견했다. 천둥소리가 연달아 울리는 것이 대량의 뇌전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하하하, 석령의 천겁이 도래했습니다! 곧 황천지화에서 떠올라 모습을 드러내겠지요. 천선대사 우리는 어서 덫을 칩시다!”

흑우상인이 검은 빛으로 변해 뛰어올랐고 천선도 밝은 얼굴로 소매를 펄럭여 날아올랐다. 그들은 소매 속에서 빼곡하게 진법 깃발과 진법 원반을 방출해 주술을 외며 열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견고하기 짝이 없는 대형 진법이 펼쳐져 산 정상을 꼼꼼하게 둘러쌌다. 이때 흑우상인이 허공에서 빙글 돌았다.

쉬쉬쉬쉬쉭!

검은 점들이 노인의 몸에서 분사되어 폭발하더니 무수히 많은 검은 실로 변해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천선은 기합을 넣으며 새빨간 발우(鉢盂)를 꺼내들었다.

발우 안에서 봉황 울음소리가 들리고 세 덩이의 적홍색 불구슬이 빠져나왔다. 불구슬은 승려의 손짓에 따라 커다랗게 변해 세 마리의 불새로 변했다.

“화봉(火鳳)!”

거대한 새의 모습에 한립이 놀라 소리를 높였다.

“허허허! 아닙니다, 한 시주. 이것들은 화봉의 피를 일부 이어받은 폭염조(暴炎鳥)들입니다. 진정한 화봉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석령이 황천지화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느라 극히 음한 기운을 품고 있을 테니 폭염조들의 기운으로 견제하려는 것입니다.”

천선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그랬군요. 기운이 약한 것을 제외하면 폭염조들이 전설 속의 화봉의 모습과 꼭 닮았습니다.”

승려의 설명에 한립이 신기해했다. 옆에 있던 흑우상인은 검은 점들을 방출하고는 입을 벌려 보랏빛 작은 호리병박을 꺼냈다.

호리병박은 신비한 은빛으로 반짝였고 그 안에서 짙은 남색의 수정 전갈이 빠져나왔다. 전갈 등뒤로 솟은 반투명한 날개가 무척 고왔다.

천선과 흑우상인은 네 마리의 영수들을 잘 배치해 두고 그들의 기운을 숨겼다. 이제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어 주변이 깜깜해져 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형, 잠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저와 천선대사가 보물을 이용해 남은 흔적을 지우겠습니다.”

흑우상인이 고개를 숙여 아직 구덩이 근처에 앉아 있는 한립을 향해 말했다.

“알겠습니다. 천지영물들의 감응 능력은 뛰어난 편이라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속이기 어려울 겁니다.”

한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푸른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가 산 정상 밖 허공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것을 본 승려와 노인이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천선은 손바닥에서 하얀 구슬을 불러냈고 흑우상인은 소매 속에서 푸른 깃털 부채를 꺼냈다.

표면에 오색 주술문자가 흐르는 하얀 구슬에서는 기이한 한기가 용솟음쳤고, 흑우상인은 부채에 법결을 던져 넣었다. 그러자 푸른 깃털 부채가 가볍게 펄럭였다.

휘잉!

깃털 부채에서 밀려나온 푸른 광풍이 구슬의 하얀 한기와 얽혀 소용돌이쳤다. 산 정상에 눈보라가 몰아쳐 그들이 있던 공간을 눈과 얼음으로 채웠다.

천선과 흑우상인은 시선을 마주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보라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머물며 남겨둔 미약한 기운마저 눈보라에 깨끗이 씻겨나갔다.

“이제 그것을 써야하지 않겠습니까. 천기현상을 보아하니 황량석령이 곧 나타날 듯싶습니다.”

천선이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하하, 물론이지요. 바로 이때를 위해 이 보물을 성도에서 내준 것 아니겠습니까.”

흑우상인이 두 손을 교차해 은빛의 폭발을 일으켰다.

“가라!”

겹겹이 쌓인 은색 실그물이 소리 없이 떠올라 흩어졌다. 실그물이 대량의 은색 안개로 변해 산봉우리를 뒤덮었고, 노인의 조종에 따라 아주 흐릿하게 변해 종적을 감추었다.

“허허, 은소뇌망(銀霄雷網) 덕에 석령이 빠져나갈 걱정은 덜었습니다. 게다가 그물이 뇌겁의 영향을 받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황량석령이 아무리 감응 능력이 뛰어나도 그물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겁니다.”

승려가 손뼉을 치며 미소를 지었다.

“혼돈만령방에 이름이 오른 영보인데 물론 그래야겠지요! 그러니까 성도에서 노부에게 은소뇌망까지 들려 보낸 것이겠지요. 일단 허공은 완전히 봉쇄했지만 황천지화 속으로 달아나게 두어서는 안 되니 가장 약해졌을 때 금제를 발동해 퇴로를 차단하겠습니다. 한 형께서도 영물의 환술에 당하지 않게 유의해 주십시오.”

흑우상인이 신중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영물이 달아나지 않게 막는 것뿐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한립의 의식은 대승기 수사와 맞먹기 때문에 자신 있게 답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영물을 포획하는 것은 저희에게 맡겨두세요.”

그들은 몇 마디 더 상의하다 은신술을 펼쳐 몸을 숨겼다. 이제 산 정상에는 쉼 없이 몰아치는 눈보라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얼마 후 눈보라가 그치고 산 정상은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반짝였다.

이때 허공의 먹구름이 서서히 회전하며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용돌이 중심에는 수많은 은색 뇌전들이 응집해 거대한 은색 뇌전을 만들어내느라 천둥소리가 멈췄다.

고공의 하늘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해졌다.

구덩이 속의 누런 안개도 서서히 회전해 소형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소용돌이 속은 어두침침했으나 가끔씩 하얀 기운이 꿀렁꿀렁 새어나와 언제라도 괴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 * *

일다경이 지나자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에서 더욱 무서운 압력이 내리눌렀다. 산 정상을 뒤덮고 있던 빙설이 파사삭 깨져나갈 정도였다.

콰르릉!

고공의 검은 소용돌이에서 굵은 뇌전이 떨어져 내려 구덩이 속의 작은 소용돌이로 내리쳤다. 은색 뇌전이 떨어진 작은 소용돌이가 마구 요동치며 깊은 곳에서 고통스런 포효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산봉우리 전체가 진동하며 산꼭대기를 덮고 있던 기이한 얼음층이 완전히 갈라졌다. 그때 고공의 검은 소용돌이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그러자 누런 안개에서 성난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화염이 안개를 뚫고 나와 은색 뇌전과 충돌했고 뇌전과 화염의 교전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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