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143화 (900/2,000)
  • 1143화. 흑우상인

    *

    마수들과 교룡의 싸움은 단시간에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인족 수사들이 펼친 진법은 마족들의 맹렬한 공세 속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인족 수사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하얀 수염 노인이 분노해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원영을 방출해 정말 목숨을 걸고 비술을 펼칠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머리 위에서 서늘한 코웃음 소리가 울렸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머리에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인족과 마족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몸을 가누지 못했다.

    파앗!

    코웃음 소리가 들려온 곳에서 푸른 빛구슬이 나타났다. 그 안에 희미하게 누군가가 떠있는 것이 보였다. 인영은 소매를 펄럭여 백여 개의 푸른빛을 날려 보냈는데 빛이 수백 개로 불어나 하늘을 뒤덮었다.

    다음 순간, 백여 명의 마족 병사 지척에 공간 파동이 일고 푸른 비검들이 나타나 그들을 베어냈다.

    참혹한 비명들이 터져 나왔다.

    푸확!

    푸른 검빛에 휩싸인 마족 병사들의 몸이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갈라져 원영도 화를 피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엄청난 피가 안개처럼 흩어져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핏빛 안개가 흩어질 무렵에는 마족 병사들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인족 수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눈길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어느 선배님께서 도와주셨는지 모르겠으나, 천마문(天馬門) 간비천이 진심을 다해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하얀 수염 노인이 서둘러 허공의 푸른 그림자를 향해 대례를 올렸다. 그 말에 다른 수사들도 살아있다는 것을 깨닫고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바닥에 엎드렸다.

    “같은 인족 수사들이 마족들의 공격을 당하는데 어찌 두고 보겠는가. 자네들은 바로 서쪽으로 가게. 그곳엔 마족들이 없으니 한동안은 안전할 것이야.”

    푸른 그림자는 담담하게 몇 마디 일러주고 하늘을 뒤덮고 있던 푸른 검빛과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될 지요. 저희 천마 일족을 구해주셨으니 사당을 지어 영원히 선배님을 기릴 것입니다!”

    “그럴 것 없네. 한 모는 이만 가볼 것이니 앞으로 잘 해쳐나가게.”

    푸른빛 속 그림자는 둔광을 일으켜 날아가 버렸다. 파공음이 몇 번 들리고 푸른 빛줄기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얀 수염 노인은 그 엄청난 속도에 화들짝 놀라 한참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스승님께서는 어느 선배님께서 본 문을 구해주신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중년의 원영기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흠, 이렇게 많은 고계 마족 수사를 죽이려면 연허기 수사는 불가능한 일일 테고. 평범한 합체기 수사도 쉽게 해낼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게다가 어차피 인근에 한 씨 성을 쓰는 합체기 이상의 선배님이라면 단 둘 뿐이다.

    얼마 전 성황에게 의탁한 구루진인(九泪眞人) 한청 선배님과 천연성 인근에 거주하시는 한립 선배님! 모두 막대한 법력과 강력한 신통을 지니셨다고 하니 아마 둘 중 한 분 일게다. 이중 어느 선배님일지는 위기에서 벗어나는 대로 수소문을 해보면 알 수 있을 테니. 이 은혜는 결코 쉽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 스승님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마족 병사들이 나타났다면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될 텐데요. 원래 가던 대로 흑수산맥(黑水山脈)으로 가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선배님께서 일러 주신대로 서쪽으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제자의 생각에는 서쪽은 황량한 평원지대라 딱히 저희가 은신할 곳이 없을 것 같아서요.”

    중년의 원영기 사내가 다시 물었다.

    “흑수산맥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아 안전하다고 볼 수 없다. 기왕 한 선배님께서 서쪽에 마족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셨으니 거짓은 아닐 게야. 평지든 산맥이든 우리가 몸을 숨기는데 큰 차이가 있을 성 싶으냐? 우리가 산맥에 숨어도 고계 수사의 의식을 피할 길은 없다.

    차라리 아무도 찾지 않을 외진 곳으로 가서 금제를 펼치고 몸을 숨기는 것이 마겁을 넘길 수 있는 길일게다. 마족들도 모든 영토를 샅샅이 뒤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얀 수염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냉소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명을 내려 서쪽으로 향하겠습니다.”

    “먼저 마족들이 지니고 있던 저물 법기들부터 살피도록 해라. 마족 정예 병사들이었으니 지니고 다니는 것도 범상치 않겠지. 한 선배님께서는 저런 물건에 흥미가 없으셔도 우리 천마문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게다.”

    노인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서둘러 분부를 내렸다. 중년 사내가 명을 받들어 다른 수사들과 함께 백여 마족 수사가 죽어나간 곳을 수색한후, 수십 명의 천마문 수사들은 서쪽으로 날아올랐다.

    한립은 마족들에게 공격당하는 인족 수사들을 보면 마존급 수사들이 없는 한 서슴없이 나서 마족들을 소탕해 주었다. 마족 대군을 마주치거나 마존 여럿이 협공하지 않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 * *

    보름 후, 눈앞에 어두침침한 원시삼림이 나타났다. 빼곡하게 들어선 나무들 사이로 짐승들의 포효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한립은 둔광을 거두고 그 언저리에서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일곱 개의 산봉우리들이 연결된 작은 산맥이 솟아 있었다.

    “황천지화! 듣던 대로 음기가 왕성한 곳이야. 관련 공법을 수련하는 이들 외에는 거의 찾는 이가 없겠어.”

    한립은 다시 푸른 빛줄기로 변해 산맥으로 날아갔다. 거리가 아주 멀어 보였지만 빛줄기의 속도가 워낙 빨라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한립은 바로 7개의 봉우리 중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 꼭대기에서 신형을 드러냈다.

    ‘저들은…….’

    한립은 그곳을 훑다 움찔했다.

    산 정상에 두 명의 수사가 가부좌를 틀고 화산 입구로 보이는 오목한 곳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하얀 피부에 보라색 가사를 걸친 승려와 새까만 피부에 마른 몸을 가진 추레한 노인이었다.

    그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합체 중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어떤 방식으로 기운을 감춘 것인지 직접 보기 전에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승려와 노인이 한립의 등장에 훽 하고 고개를 돌렸다.

    “오오, 한 수사셨습니다!”

    하얗고 투실한 승려가 깜짝 놀라 한립을 불렀다. 한립도 만난 적이 있는 성황의 수하, 천선대사였다.

    “천선대사께서 계셨군요. 인사드립니다.”

    한립도 깜짝 놀랐지만 태연하게 멀리서 포권을 했다.

    “천선대사, 아는 분입니까?”

    추레한 노인이 한립의 수행을 알아보고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허, 우 형은 한 시주를 모르실 만하지요. 한 수사께서는 합체기 경지에 이른지 겨우 수백 년 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우 형께서는 줄곧 폐관수련을 하느라 만나 뵐 기회가 없으셨을 겁니다.”

    “수백 년이요? 이미 합체 중기에 이른 것 같아 보이는데요?”

    추레한 노인이 흠칫 놀라 다시 한립을 훑었다.

    “중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사께서는……?”

    “노부는 우소천이라 합니다! 흑우상인(黑雨上人)이라 불리기도 하고요. 하아, 한 수사처럼 자질이 뛰어난 경우는 성도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추레한 노인은 눈을 반짝이며 놀란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성도라면, 우 형께서는 성도 사자십니까?”

    “사자라고 불리기는 어렵고 그저 성도에 기거하는 중입니다!”

    흑우상인이 겸손하게 답했다.

    “성도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들어왔는데 실제로 가볼 기회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시간이 난다면 우 형께 이야기라도 들어보고 싶군요.”

    “하하, 사실 성도에서는 천 년마다 새로 합체기에 이른 수사들을 한 번씩 청하고는 합니다. 심지어 성도에서의 수련을 제안하기도 하고요. 이번에 마겁이 당겨지지 않았으면 한 형께서도 뜻을 이루셨을 텐데요.”

    “민망하게도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성도를 찾아 준 수사들에게 비밀을 지켜 주십사 부탁드리기에 합체기 이하의 수사들은 전혀 모릅니다.”

    “한 시주께서는 천연성 인근에 은거하다 마겁이 도래하기 전 천연성으로 이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그곳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이때 천선이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어찌 보면 객경 신분으로 머무는 것이지요. 천연성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천연성을 제외한 다른 대형 거점들은 거의 다 몰락했으니까요.”

    승려의 물음에 한립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천연성의 형세가 그리 안 좋단 말입니까? 다른 지역에 비해 거점들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몇몇 대형 거점들도 세력이 크고 합체기 수사들도 머물고 있을 텐데요.”

    천선의 표정이 대번에 달라졌다.

    “말하자면 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하시지요. 그보다 대사와 우 형은 어찌 이런 곳에 머물고 계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건…….”

    천선이 바로 답하지 않고 머뭇거리며 흑우상인을 보았다.

    “한 형께서 인족에게 해를 끼칠 만한 선택을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또 한 형의 도움을 받는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겁니다.”

    침음하던 흑우상인이 과감히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은 의아한 얼굴로 그들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빈승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제가 한 시주께 말씀드리지요. 그 후에 도움을 청해보지요.”

    흑우상인의 말에 천선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인족의 대국에 도움이 될 이야기라면 고려해 보겠습니다.”

    “저희가 이곳에 있는 것은 성도의 명을 받아서입니다. 바로 이곳에 황천지화가 있지 않습니까.”

    ‘황천지화!’

    예상은 했지만 천선의 입에서 직접 그 말을 듣자 한립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천지화 속의 상서로운 영물을 찾아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황천지화 속에 천지영물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있지요. 그것도 오만 년이 걸려 탄생한 영물입니다. 한 시주께서는 황량몽석(黃梁夢石)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황량몽석은 대형 환진을 펼치는데 필요한 극품 재료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이번에 구하고자 하는 것은 평범한 황량몽석이 아니라 지능을 갖춘 ‘황량석령(黃梁石靈)’이지요. 오직 황량몽석 중에서만 탄생하는 천지영물인데 극히 드물어 아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이곳의 석령도 오래전에 본 족의 선배님이 아주 우연히 발견한 것이고요. 아쉽게도 석령이 놀라 달아난 뒤로 황천지화 속에서 절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황천지화가 어떤 곳입니까? 대승기 수사라 해도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 아닙니까.

    그러다 얼마 전 성도에서 치른 점괘에서 황량석령이 근시일 내로 겁을 치를 거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겁을 치를 때는 황천지화 속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니 이번에야말로 석령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천선은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석령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로군요. 그런데 황량석령이 황천지화 속에 수 만년 동안 살았다 해도 고작 석령인데 포획하기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건 한 형이 몰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황량석령은 일반적인 석령과 달리 강력한 환술을 펼칠 수 있습니다. 일단 환술에 걸려들면 자신이 환술 속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라고 하더군요.

    이곳의 석령을 발견한 인족 선배님도 환술에 반년간 갇혀 있다 겨우 탈출하셨다고 합니다. 돌아온 후로는 원기를 크게 상해 고생하셨고요. 게다가 이번에는 석령을 반드시 생포해야 해서 저와 천선대사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흑우상인이 옆에서 몇 마디를 거들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