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142화 (899/2,000)

1142화. 허천우

*

“허 수사, 오랜만이로구만.”

한립이 미소를 머금었다. 허 가에서 만난 이후로 볼 일이 없었는데 마겁 기간에 그것도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선배님을 뵙지 못했다면 큰일을 당했을 것입니다.”

허천우는 다른 두 여인과 함께 공손히 예를 올렸다.

“별 것 아닐세. 그런데 저들은 어째서 이곳을 포위하고 있었던 것인가? 원한이라도 있는 사이인가.”

“원한이라니요! 그저 저희들이 지나는 것을 보고 악심을 품고 달려든 자들입니다. 선배님께서도 저놈들을 그냥 보내지 마시고 도륙을 내셨어야 했습니다.”

허천우를 따라 방에서 나온 동그란 얼굴의 여인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소청,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한 선배님을 만난 것도 천운이 따른 것인데 어찌 그런 불경스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선배님, 소청은 제 조카로 이제껏 가문 내에서 수련만 하느라 바깥 경험이 없습니다. 무례했더라도 너무 나무라지 말아 주십시오.”

허천우가 깜짝 놀라 한립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 선배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소청이란 여인도 퍼뜩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이곳은 그녀가 자유롭게 행동하던 허 씨 가문도 아니고, 눈앞의 청년 역시 그녀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수사도 아니었다.

“아니네, 이해하네. 나도 저들이 그런 부류라는 것을 알았다면 정리했을 것이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면 안으로 드셔서 말씀을 나누시겠습니까?”

허천우가 한시름을 놓고 웃는 낯으로 뒤쪽의 문을 가리켰다.

“그러세!”

이곳은 다행히 마족대군이 주둔하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가구며 장식이 고풍스럽고 독특한 멋이 있었다.

그러나 한립의 관심을 끈 것은 집 주변에서 미약하게 느껴지던 금제의 파동이 안으로 들어선 순간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한립이 방 안의 상석에 앉자 세 여인이 그 옆으로 공손이 섰다.

“범인이 기거하던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혹시 허 가와 관련된 곳인가?”

“맞습니다. 저희 가문에서 관리하다 오래전 버려둔 곳인데 사수(邪修)들의 추격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펼쳐진 금제의 힘으로 상대하기 위해서요.”

“그렇군. 허 가는 이미 성황성(聖皇城)으로 이주를 했다 들었네. 어째서 자네들만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가?”

한립의 물음에 세 여인이 눈을 마주치고는 대답하기를 주저하다 결국 허천우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저희 가문이 마겁이 도래하기 전 성황 선배님이 계시는 성황성으로 이주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혈령 대인께서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 몇몇 가문 수사들을 데리고 성을 떠나셨지요.

그런데 일을 마치기도 전에 마족대군을 마주쳐 전투가 벌어졌고 저희가 패하면서 각각 흩어져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저도 두 조카를 데리고 마족의 추격을 피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고요. 고생 끝에 추격을 따돌렸는데 아까 그 사수들을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혈령 수사가 성황성을 떠났다고?”

“예, 본족의 장로들도 만류했지만 혈령 대인께서 아주 급한 일이 있으시다 하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혈령 수사는 무탈한 것인가?”

“그건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떠나기 전 혈령 대인께서 포위를 뚫고 벗어나시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까요. 고계 마족 몇 명이 따라붙기는 했지만 대인의 신통에 분명 무사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아, 성황성의 상황은 어떠한가? 최근 인족 세력들은 마족대군에 의해 철저히 고립되어 부적을 통해 소식을 전하기도 어렵다고 들었네.”

“상황이 좋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성황성은 그나마 마족대군이 어쩌지 못했지만 다른 인족 거점들은 대부분 함락을 당해 몇몇 종문과 세가들은 전멸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전과 달리 마족들이 함락한 성들을 약탈할 뿐 아니라 인족 범인들을 데려다 노역을 시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인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보아하니 소문이 사실이었구만. 다른 마겁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저들이 영계에서 오래 머물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예? 선배님 말씀은 마족이 인족 영토를 아예 점령하려 한단 것입니까?”

허천우가 답하기도 전에 창백한 얼굴의 여인이 놀라 끼어들었다.

“인족뿐만 아니라, 요족 심지어 인근의 목족과 야차족도 아마 마족들의 침략 목표일 것이다. 구체적인 정보는 아니지만 고위층에서 이런 소문이 돈 것은 사실이지. 허나 너무 걱정할 것은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질 않더냐. 성도가 분명 미리 대책을 마련해 두었을 것이야.”

한립이 가볍게 웃으며 답해주었다.

“하긴 그렇습니다. 성도와 막간리 대인이 계시는 한 마족들의 흉계가 성공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허천우의 말에 그녀의 두 조카들도 안색이 밝아졌다. 그 후로도 서오항성과 인근의 마족 대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난 따로 할 일이 있어 이만 가봐야겠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볼 날이 있겠지!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되니 어서 성황성으로 돌아가게.”

한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여인들에게 충고했다. 그 말에 허천우와 두 여인은 감히 막지 못하고 그를 문밖으로 배웅했다.

한립의 푸른 둔광이 하늘을 가르며 사라졌다. 그를 바라보는 허천우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고모님, 한 선배님께서 예전에 혈령 대인을 허 가로 모시고 와주신 그 선배님이 맞습니까? 정말 합체기 선배님이시고요?”

한립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소청이 참고 있던 질문을 쏟아냈다.

“맞다. 저분이 바로 그 한 선배님이시고 당시 우리 가문을 찾아 주셨을 때만해도 합체 초기셨지. 듣자니 마겁이 도래하기 얼마 전에 합체 중기에 이르셨다더구나.”

허천우는 조카들을 향해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와서 그때 이야기를 해서 무엇 하겠느냐. 내 수행이 조금 늘어나기는 했지만 한 선배님과 비교하면 언급할 가치도 없구나. 천년 만에 화신기에서 합체 중기로 이른 경우는 고금을 통틀어 몇 되지 않을 것이야. 도대체 어떻게 수련을 하시는 것인지…….”

허천우가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덧붙였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면 남아서 도와달라고 청해 보시지 그러셨어요.”

창백한 얼굴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흩어지기 전 혈령 대인께서 당부하셨다. 이 일은 빙백 선조와 관련된 중대한 사안으로 허 씨 가문에서도 아는 자가 극소수라고 하셨지. 한 선배님께서 허 가에 큰 은인이라지만 어찌 그런 일을 발설하겠느냐! 게다가 선배님께서 사수 무리를 쫓아 주셨으니 한동안은 안전할 게다. 어서 일을 마치고 혈령 대인께 돌아가자꾸나.”

허천우가 감정을 추스르고 차분히 말했다.

* * *

같은 시각, 어느 지하 동굴.

핏빛 갑옷을 입은 여인이 고계 마족의 몸에서 핏빛 칼날을 뽑아내고 있었다.

쿵!

칼날이 뽑히자 고계 마족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져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동굴에는 마족뿐만 아니라 다른 두 구의 시체가 더 너부러져 있었는데 모두 남색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인은 무표정하게 마족의 시체들을 훑고는 협소한 통로를 통해 지하 동굴 깊숙이 날아갔다. 굽이굽이 통로를 돌자 석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여인은 눈을 반짝이며 한 손을 들어 작은 푸른 솥을 불러냈다. 솥은 빙글빙글 돌아 그녀의 허리까지 커졌고 솥 표면에는 꽃과 새, 곤충과 어류 등의 허상이 떠다니고 있었다.

핏빛 갑옷을 입은 여인은 빙백 선자의 혈혼이 변화한 혈령화신이었고, 솥은 한립이 오랫동안 사용했던 허천정이었다.

그녀는 허 씨 가문 수사들과 흩어져 이곳으로 온 후 고계 마족 세 명을 특수한 방법으로 제거했다.

추격을 피해 도망친 것도 있지만 일부러 이곳으로 온 것이다. 혈령이 허천정을 꺼내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며 손끝으로 솥 표면을 튕겼다.

휘휘휙!

푸른 법결들이 날아가 솥으로 흡수되자 허천정이 부르르 떨었다. 솥뚜껑이 날아가고 그 안에서 푸른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석벽으로 날아들었다.

쿠릉!

주술 문자들을 머금은 석벽은 갑작스럽게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석벽이 있던 자리에 은빛 금제 부적들이 붙은 어두운 갈색의 반달형 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아무도 이곳을 찾아내지 못했구나! 본체를 이곳에 남겨둔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어.”

혈령이 대문을 훑으며 허천청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웅!

솥이 맑게 울며 갈색 대문을 향해 푸른 기운을 뿜었다. 푸른 기운이 달려들자 문에 붙어 있던 은색 부적들이 힘없이 떨어지고 대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혈령은 주저 없이 핏빛 둔광을 일으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뒤쪽으로 어두운 대청이 이어졌다. 너른 대청 안은 네모난 돌 탁자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어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네모난 탁자 위에 또 다른 작은 솥이 놓여 있었다. 푸른빛을 반짝이는 솥은 언뜻 보면 허천정과 비슷했다. 혈령은 핏빛을 거두고 탁자 위의 푸른 솥을 불러들였다. 그녀의 냉랭한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허천정, 허령정, 허황정(虛皇鼎)! 그 녀석들은 본 선자가 또 하나의 보물을 제련해 두었을 줄은 결코 생각도 못했겠지. 허황정의 효과가 앞선 두 개의 보물보다 뛰어나니 그곳에 들어갈 열쇠 중 하나는 찾은 셈이로구나. 마겁이 끝나는 대로 뇌명대륙으로 가야겠어.”

혈령은 푸른 솥을 거둬들이고 곧바로 두 손을 교차해 사방으로 뻗었다.

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수많은 핏빛 뇌화(雷火)들이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와 대청 벽을 갈랐다. 그러자 대청 벽이 무너져 내렸고 여인은 빛줄기로 변해 빠져나갔다.

잠시 후 핏빛 빛줄기가 땅 속에서 튀어나와 황량한 대지를 지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녀가 향한 곳은 허천우 등 세 여인이 있는 곳이었다.

* * *

한 달 후, 한립은 고공에서 냉랭한 눈빛으로 마족과 인족 수사들이 벌이는 전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 명이 넘는 마족들은 전부 원영기 수행을 지니고 있었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두 명은 화신 중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분명 마족 정예병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인족 수사들은 복장이 비슷비슷하고 젊은 수사들뿐만 아니라 어린아이와 노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행이 낮은 이들은 축기기 수준이었고, 그나마 수행이 높은 이가 화신 후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어 겨우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복장으로 보아 같은 종문 혹은 세가의 수사들로 보였다.

여러 현묘한 진법의 힘을 빌려 하얀 수염 노인이 최선을 다해 싸워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커다란 인장을 발동해 싸우면서도 주변을 살피고 절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수많은 마족 정예병들을 만났으니 그는 물론 문하의 제자들 모두 이곳에서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포기하지 않고 새하얀 인장을 향해 피를 뱉었다. 인장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그 안에서 하얀 교룡 허상이 떠올라 입에서 뇌화를 분출했다.

그러나 마족 고계 수사들도 상대가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교활한 미소를 짓더니 검은 검을 치우고 수결을 맺어 등 뒤에서 거대한 마수 허상을 불러냈다.

사슴의 머리에 박쥐의 몸을 한 흉악한 마수 허상들이 기괴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두 마수 허상이 입에서 마기를 분출하며 하얀 교룡과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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