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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41화 (898/2,000)
  • 1141화. 버려진 성

    *

    두 방대한 괴물들이 허공에서 만나 싸움을 벌이자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들이 육박전을 벌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13개의 보랏빛과 회색 그림자도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한립의 자문 서금충들과 혈광성조 화신의 회색 구렁이였다.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고 영충들의 웽웽되는 소리와 구렁이의 쉭쉭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쿠쿠쿠쿠쿵!

    다채로운 빛깔의 기운들이 그들 틈에서 퍼져 나오고 놀라운 영기의 파동이 흩어졌다. 한순간에 빛이 사라지고 하늘은 곧 무너져 내릴 것처럼 어둑하게 일그러졌다.

    황폐한 허공에 두 인영이 비틀거리며 양쪽으로 튀어나갔다. 한립이 변한 거원과 우두머리 소년이 변한 거대 마두였다.

    둘 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거원의 금색 털은 군데군데 타들어갔고, 들고 있던 여섯 병기 중 세 자루만 남아 있었는데 그마저도 온전하지 못했다.

    거대 마두 역시 전신이 피로 물들고 어깨 양쪽의 악귀 머리들이 두 개나 터져나가 있었다. 들고 있던 핏빛 몽둥이도 둘로 쪼개졌다.

    금털 거원과 거대 마두가 멀리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어둑한 허공에 폭음이 울리고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그 안에서 십여 마리의 자문 서금충들이 웽! 하는 소리를 내며 빠져나왔다.

    회색 구렁이가 뒤이어 빠져나오려다 몸 절반이 뒤쪽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흡입력에 붙들려 다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콰릉!

    폭발이 일고 거대 구렁이는 완전히 그 안에 매몰되었다. 그 순간 거대 마두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며 피를 토해냈다.

    회색 구렁이의 예기치 못한 죽음에 특수한 술법으로 만들어낸 의식 연계가 본체에도 타격을 입힌 것이다.

    ‘지금이다.’

    거원은 부서진 세 개의 병기 대신 새로운 금빛 병기들을 불러내 예리한 빛을 번득였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다시 격전을 벌일 수 있도록 부상당한 곳에 금빛을 일으켰다.

    콰르릉!

    바로 그때 채광탑과 또 다른 화신이 갇혀 있는 구궁천건부의 금제 속에서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곱 빛깔 거탑의 그림자가 금제의 안개 위로 떠올라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안개가 모조리 거탑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숨겨져 있던 궁전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구궁천건부가 파훼된 것이다.

    휙!

    그 안에서 둔광이 날아올랐고 거대 마두가 희색을 드러냈다. 둔광 속 인물은 만검도에 갇혀 있던 또 다른 화신이었다.

    한립은 상대를 자세히 살피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만검도와 구궁천건부를 탈출한 소년은 얼굴에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기운도 매우 약했다. 게다가 들고 있는 보탑도 어둑해진 것이 영성을 상한 것이 분명했다.

    거대 마두가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채광탑이 보호해 주었을 텐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저 녀석이 아주 성가신 보물을 사용해서 이렇게 되었다. 아무래도 영계의 물건이 아닌 것 같아.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아마 널 다시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보탑 소년은 서늘하게 전음으로 답했다.

    “영계의 물건이 아니라고? 그래서 지금 싸울 수 있는 상태인가?”

    “너만 멀쩡하면 나는 괜찮다. 채광탑이 약간 손상돼서 당분간 공간 신통을 쓸 수 없지만.”

    “뭐라고? 이런. 그럼 우리 둘이 협공한다 해도 승산이 그리 크지 않겠어.”

    거대 마두가 미간을 좁히며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년은 삼두육비의 금털 거원과 영체와 싸우고 있는 나머지 화신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비록 영체가 밀리고는 있지만 지선의 몸이 불사체이고 기괴한 신통이 많아 시간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주변 상황을 보고 거대 마두는 고민이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분신을 셋이나 동시에 강림한 것은 진마쇄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직접 추격해서 격전까지 벌어놓고 이대로 달아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두 개의 현천잔보 중 하나는 잃어버리고 하나는 손상되었으니 선뜻 결정을 내리기 쉽기 않았다.

    한립은 상대가 머뭇거리자 돌연 주문을 외워 금색 칼날 조각을 불러냈다. 거원이 칼날 조각을 들어 올리자 주변의 천지원기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빛의 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금색 칼날 조각 속으로 미친 듯이 흘러들어갔다.

    “현천잔보!”

    거대 마두가 경악해 소리쳤고 또 다른 소년도 눈썹을 끌어올렸다.

    “가자!”

    결국 거대 마두는 내키지 않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리고 서둘러 네 날개를 펄럭여 피바다를 거두고 핏빛에 휩싸여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 뒤로 보탑을 든 소년도 일곱 빛깔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영체와 싸우던 화신도 전음을 들었는지 핏빛을 일으켜 영체를 밀어붙이고 그들을 따라갔다. 별안간 세 화신이 둔광을 연결해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절대 이게 끝이 아니다. 오늘은 보물들이 없어 너를 어쩌지 못했지만 다음에 만나게 되면 네 놈을 끔찍하게 죽이고 말 것이야!”

    우두머리 소년의 음산한 경고가 하늘을 울렸다. 마두는 결단을 내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퇴했다. 한립이 절대 추격하지 않을 거라 확신해서였다.

    금털 거원은 허공에 떠서 강적이 사라진 방향을 지켜보았다. 추격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멀리 있던 영체까지 옆으로 불러들였다.

    ‘흥, 다음이라…….’

    거원은 코웃음을 치며 금빛 속에서 삼두육비의 법상을 풀고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강적을 격퇴하고도 즐거운 기색이 없었다.

    “겨우 화신 몇이 이렇게 강해서야, 본체가 얼마나 강할지 가늠할 수조차 없구나! 대승기 수사의 실력은 역시 명불허전이었어. 아니, 듣던 것보다 더 무서운 능력을 가졌다.”

    한립은 영체와 자문 서금충들을 불러들이고 눈을 감은후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파앗.

    핏빛 문자가 그의 미간에 떠올라 온화한 빛을 머금었다. 잠시 후 그는 밝은 얼굴로 눈을 떴다.

    “자언정이 그리 멀리 가지 못했어! 이 방법이 통했구나.”

    그는 수결을 바꿔 열손가락으로 복잡한 문양을 만들었다. 미간의 핏빛 문자가 깜빡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일다경이 되지 않아 하늘 저 편에서 파공음이 들리고 검은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보라색의 둥그런 물체는 스스로 달아난 자언정이 확실했다.

    그러나 솥은 한립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멈춰서더니 원형으로 돌아갔다. 보랏빛이 커졌다 줄었다 하며 낮게 윙윙거리는 것이 한립의 존재에 대해 의문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한립이 만들어 낸 희미한 연계 때문에 쉽게 그를 떠나지도 못했다. 한립은 작은 솥을 보고 웃음이 짙어졌다.

    잠시 후 핏빛 문자가 이마에서 뻗어 나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다채로운 색깔의 법결들이 작은 솥에 흡수됐다.

    우웅!

    솥은 맑은 울음소리를 내며 핏빛 문자를 향해 날아들었고, 핏빛 문자 역시 작은 솥을 향해 날아가 그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러자 솥의 색깔이 더욱 진한 핏빛으로 물들고 울음소리 또한 더욱 크고 우렁찼다. 기분이 아주 좋아진 듯했다. 한립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손을 뻗어 솥을 가볍게 건드렸다.

    잠시 주춤하던 보라색 솥은 고분고분하게 손가락 크기로 줄어들어 그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한립은 솥을 들어 남색빛이 어른거리는 눈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은은한 보라색의 솥에는 알 수 없는 주술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고 희미한 검은 기운이 돌았다. 그는 손바닥에서 금은색 주술문자를 일으켜 솥 표면에 붙게 했다.

    이에 자언정은 빛을 잃고 평범한 솥이 되었다. 한립은 손끝에서 금색 뇌전들을 뿜어내 작은 솥을 금색 그물로 완전히 감쌌다.

    치지직!

    금빛 그물이 수축해 솥을 꽁꽁 둘러싸고 금색 구슬로 만들었다. 그는 옥함을 꺼내 자언정을 넣고는 열댓 장의 부적들을 이용해 옥함을 봉인했다.

    여러 번 단단히 봉인하고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차기공 말대로 비술로 혈광성조에게 자언정을 빼앗아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보물에 그 늙은 마두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함부로 꺼내거나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강력한 현천잔보가 하나가 더 생겼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망가진 만검도는 아주 속이 쓰렸지만 말이다.

    만검도로 마족 대군에게 쓴맛을 보여 주려고 했는데 보물을 이용한 첫 번째 전투에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문득 마두가 떠나기 전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상대의 말처럼 이번에 세 명의 대승기 화신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급히 전투에 임하느라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해서였다.

    ‘거기다 두 현천보물이 무력화되어 당황하기도 했겠지.’

    마족 대군을 통솔하는 또 다른 화신에게 보물을 빌려 찾아온다면 그때 역시 상대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런데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던 한립이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한 걱정을 하고 있었지 않은가!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대충 계산해 보아도 그들이 마족 본영으로 돌아가려면 서너 달은 걸릴 텐데, 나는 그동안 몰래 천연성으로 돌아가면 그만이 아닌가. 그 후로 천연성 밖으로 절대 나서지 않으면 될 것이고.”

    한립은 한결 마음이 편해진 얼굴로 걱정스런 기색을 지웠다. 하지만 그 전에 중요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황천지화에 다녀와야 했다.

    차기공에게 심마를 걸고 맹세했으니 지키지 않으면 심마의 반서를 당할 것이고 그도 혼돈이기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혈광성조 화신들도 심한 타격을 입었으니 단시간 내로는 돌아오지 못할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물론 마족 성조인 차기공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으니 따로 방비를 해놓아야 할 것이다.

    의천성은 합체기 수사들이 전부 퇴각했으면 이미 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굳이 다시 돌아가 그것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한립은 생각을 정리하고 푸른 둔광을 일으켜 날아올랐다.

    * * *

    그 시각, 거대 마두는 핏빛 배를 방출해 두 화신을 태우고 의천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내내 세 명의 혈광성조 화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며칠 후 멀리 의천성의 허물어져 가는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의천성 상공은 새까만 마기로 뒤덮여 있었다. 핏빛 배가 다가오자 성벽 위 마기가 꿈틀거리고 마수를 탄 기병이 공손이 다가왔다.

    “당장 성족 대군이 있는 곳과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전송진을 열거라. 바로 이곳을 떠나야겠다.”

    우두머리 소년은 만상마기가 접근하자마자 냉랭히 명을 내렸다.

    “존명!”

    눈앞에서 혈광성조 화신이 강림하는 것을 직접 보았기에, 만상마기 기병도 아무런 의문을 표하지 않고 명을 받들었다.

    * * *

    보름 후, 한립이 변한 푸른빛이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그의 둔광은 아주 희미해서 막대한 법력을 쏟아 주변을 감시하고 있거나 강대한 의식을 지닌 자가 아니면 발견하기 극히 어려웠다.

    한립은 인족의 어느 성을 가로 지르고 있었는데 잡초가 무성한 폐허에 인적이 끊긴 것을 보면 적어도 백여 년 전에 버려진 성 같았다.

    그가 의식으로 주변을 살피다 눈을 반짝하고 고공에서 멈춰 섰다. 아래쪽을 훑는 그의 눈에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고 번개처럼 빠르게 아래로 쏘아져 내려갔다. 누각 위에 이르자 그 주위를 다섯 명의 수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갑작스런 한립의 등장에 수사들은 깜짝 놀라 각종 보물을 꺼내거나 수결을 맺어 보호막을 만들었다.

    “모두 썩 꺼지거라!”

    한립은 그들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냉랭히 명했다.

    “뭐라는 것이냐. 무례하게……. 엇!”

    “서, 선배님이셨군요! 저희는 당장 물러가 보겠습니다.”

    화신기 수사들은 버럭 화를 내려다 합체기 수사의 기운이 느껴지자 얼른 태도를 바꿔 혼비백산해 정신없이 달아났다.

    한립은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냉담히 지켜보았다. 바로 그때 금제로 둘러싸인 집에서 기쁨에 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선배님! 선배님께서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바람이 불어 하얀 안개가 걷히고 굳게 닫혀 있던 누각 안에서 세 명의 여인이 걸어 나왔다. 가장 앞서 다가오는 여인은 허 씨 세가의 허천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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