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138화 (895/2,000)

1138화. 유인

*

진마쇄 밖, 거대 붕새 체내의 의식 공간에서 한립의 금색 원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파앗!

돌연 목함에서 금색 그림자가 빠져나와 그와 똑같은 얼굴을 지닌 검은 원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원영은 피식 웃고는 금색 원영의 몸속으로 뛰어들었다.

두 원영이 합일(合一)한 것이다. 잠시 괴로움에 부르르 몸을 떨던 금색 원영은 금세 평소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헛걸음을 한 것은 아니었어. 정말 통할지는 시도를 해봐야겠지만! 정 안 되면 진마쇄를 버리고 탈출해야겠지.”

금색 원영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펑! 하고 터져 금빛으로 흩어졌다.

두 시진 후, 한립이 변한 거대 붕새가 저 멀리 나타난 고원지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땅이었다.

은색 거붕(巨鵬)은 네 날개를 접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소매 속에서 72자루의 푸른 비검을 방출했다. 비검들이 수백 개의 푸른 검빛으로 불어나 그의 주위를 날아다녔다.

우웅!

그가 푸른 기운을 방출하자 검빛들이 허공으로 종적을 감추었고, 곧 수백 개의 빛기둥들이 나타나 음산한 빛의 검진을 형성했다. 청원검결의 마지막 검진인 ‘청반검진’이었다.

청원자가 만든 청반검진에 나중에 염건술을 연구하며 얻은 깨달음을 더한 것으로 이전에 백색 장포 마존을 상대할 때도 꽤 쓸 만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혈광성조 화신과 대결하기로 마음먹었는데 한 가지 신통만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검진을 펼친 팔을 뻗어 좌우로 금색과 푸른색 그림자를 불러냈다.

삼두육비의 흉악한 금상과 그와 꼭 닮은 녹색 피부 한립이었다. 한립은 금색 칼날 조각을 꺼내 법상금신에게 던져주었다.

그러자 금신의 중간 머리가 눈을 번쩍 뜨고 쉭! 하고 칼날 조각을 불러들였다. 바로 보랏빛 칼날 조각 현천잔보였다.

금신이 쥔 칼날 조각이 보랏빛을 머금고 사라졌다. 현천잔보가 천지법칙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법상금신이 휘두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영체 화신인 녹색 피부 한립에게는 저물탁 속에서 네다섯 개의 보물을 꺼내 던져주었다. 옥패, 깃발 혹은 반지 등 특이한 형태의 법기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는지 잠시 머뭇거리다 두루마리까지 꺼내 영체에게 던졌다.

영체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벌려 모든 물건들을 삼키고는 수결을 맺어 몸을 숨겼다.

우웅! 우우웅! 웅!

한립은 빙글 돌며 수백 개의 진법 깃발과 원반을 주위로 퍼트렸다. 순식간에 인근에 대여섯 개의 각기 다른 임시 진법이 펼쳐졌다.

휘휘휘휙!

웽웽!

그의 소매 한쪽에서 수백 장의 부적들이 빠져나와 고공으로 사라졌고 다른 소매에서는 13개의 딱정벌레들이 나타나 한립의 머리 위를 선회했다.

마지막으로 하얀 수정 구슬을 꺼낸 한립은 정혈 한 모금을 뱉어 수정에 흡수시켰다. 그러자 구슬의 색깔이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그는 신중한 얼굴로 주술을 외고는 열손가락을 튕겨 다채로운 법결을 날렸다. 구슬은 법결들을 빠르게 흡수하고는 요사스러운 광채를 번득였다.

핏빛 구슬이 결국 정체 모를 핏빛 주술 문자를 응결한 후에야 구슬을 회수했다.

한립은 다시 한 번 빠진 것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신비로운 문양이 생겨난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금빛에 휩싸인 백여 장 크기의 금털 거대 원숭이로 변신했다. 거원은 길게 포효하며 검진 중간에 팔짱을 끼고 서서 냉랭히 하늘 저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달아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구나!”

잠시 후 거원이 바라보는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핏빛이 반짝였다. 핏빛 작은 배가 핏빛 실처럼 변해 쾌속으로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한립 인근에 멈춰선 핏빛 배 위에는 세 명의 소년이 다양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우두머리 소년은 비웃고 있었고, 뒤의 두 소년은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흠, 인족 녀석이 제법 잘 달아나더구나. 죽기 전에 발악이라도 해볼 심산으로 멈춰선 것이냐! 겨우 진법 몇 개로 목숨을 부지할 생각은 말거라.”

우두머리 소년이 하품을 하며 나른하게 말했다.

“될지 안 될지는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법입니다. 제가 아무 반항도 하지 않고 잡혀줄 거라 생각한 것은 아니시겠지요?”

거원이 크게 웃고 두 손을 뻗었다.

팟! 파앗!

핏빛 배 위로 공간 파동이 일고 검은색과 하얀색의 수정 거대 손이 나타났다. 검은 거대 손은 회색빛이 가득했고, 하얀 거대 손은 오색 한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어딜!”

우두머리 소년이 수결을 맺자 등 뒤로 검은 기운이 꿈틀대며 일어나 두 개의 회색 촉수와 두 마리의 가시털이 솟은 거대 짐승으로 변했다.

퍼펑!

두 촉수는 화살처럼 튀어나가 두 거대 손을 폭파시켰다. 그러나 두 거대 손이 함유한 원자신광과 오색 한염은 거꾸로 촉수를 타고 흘러들어 얼음 기둥과 회색빛으로 감싸 깨트렸다.

“원자신광? 녀석이 아주 드문 신통을 지니고 있었어.”

그의 공격에 나른한 기색이 가신 우두머리 소년은 원자신광을 정확하게 언급했다. 이에 한립은 속으로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서늘하게 대꾸했다.

“겨우 화신의 몸으로 절 끝장낼 수 있을 거라 보십니까?”

“그렇게 자신만만한 이유는 숨어 있는 두 녀석 때문이더냐!”

소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등 뒤의 두 소년이 움직였다. 한 명은 검은빛에 둘러싸인 작은 솥에서 검은빛기둥을 방출했고, 또 다른 자는 손을 뻗어 희미한 일곱 빛깔의 보탑 허상을 날려 보냈다.

그들이 공격한 곳은 핏빛 작은 배 양쪽의 허공이었다.

쿵! 쿵!

양쪽 허공에 공간 파동이 일고 은신해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 찬란한 삼두육비 금상과 녹색 피부의 청년으로 몰래 핏빛 배로 접근하던 법상금신과 영체였다.

그것을 본 한립의 얼굴은 어두웠는데 삼두육비 금신을 본 우두머리 소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진마법상! 하하, 인족이 진마공을 이 정도까지 수련해 진마법상으로 금신을 영결한 것을 알면 그 늙은이들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한데?”

소년의 혼잣말을 듣고도 한립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법상금신의 형상이 독특한 편이라 마공에 대해 잘 아는 이라면 한 눈에 그 연원(淵源)을 파악할 만했다.

그렇기에 인족 중에 마공을 익힌 이가 드문 데도 평소에는 쉽게 법상금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거원은 놀라는 기색 없이 평온한 얼굴로 자언정을 분출한 소년 화신을 힐끗 보고 속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털이 북슬북슬한 손에 소리 없이 핏빛 주술 문자가 응결된 수정 구슬이 들렸다. 그가 비술을 발동하자 수정 구슬의 주술문자가 깜빡이며 반응했다.

우두머리 소년은 한립의 표정을 보다 금신과 영체를 살피고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감히 내 앞에서 얕은수를 쓰려들다니, 죽어라!”

소년의 등 뒤에서 열댓 개의 촉수가 꿈틀거리자 검은 마귀 허상이 치솟았다. 마귀 허상은 아주 흐릿했지만 촉수들이 움직일 때마다 연달아 폭음이 들려왔다.

열댓 줄기의 바람이 일고 촉수들이 먼 거리를 뛰어넘어 한립 가까이에서 나타났다.

“이미 늦었습니다.”

거원은 코웃음을 치며 손에 힘을 주어 구슬을 터트렸다. 핏빛 부적이 거원의 손안으로 종적을 감추더니 푸른 연꽃들이 피어나 날카로운 예기를 뿜었다.

바로 그때 촉수들이 질풍처럼 찔러왔다. 푸른 연꽃들이 빙글빙글 회전하며 날린 무수히 많은 검기들이 촉수들을 조각조각 잘라냈다.

이에 우두머리 소년이 수결을 바꿔 다른 신통을 쓰려는데 뒤에서 돌연 귀를 찌르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우웅!

소년이 서둘러 뒤를 돌아보자 자언정이 극심하게 떨리더니 또 다른 화신의 손을 탈출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솥을 조종하던 소년이 경악해 다급하게 손을 뻗었고, 날카로운 맹수의 발톱이 나타나 자언정을 붙들려 했다.

그제야 우두머리 소년은 안심하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고민하는데 검진 속의 거원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포효했다.

“이런, 안 돼!”

우두머리 소년은 순간 휘청하며 안색이 창백해져 소리를 높였다. 이에 자언정을 회수하려던 화신도 팔을 떨었고, 그 영향으로 맹수의 발톱도 흩어졌다.

자연정은 기다란 꼬리를 남기고 엄청난 속도로 달아났다.

“막아!”

우두머리 소년은 한립이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쓸 틈도 없이 대노해 소리를 질렀다. 이에 일곱 빛깔의 보탑을 들고 있던 소년이 미간을 좁히고 보탑을 던졌다.

보탑이 날아가며 일곱 빛깔 기운이 흩날렸다. 그리고 사람 만하게 커져 신비한 힘으로 작은 솥을 빨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소년이 나선 순간 멍하니 서있던 한립의 영체 화신이 입에서 하얀 반지 모양의 물건을 내뿜었다.

펑!

영체의 손짓에 반지가 폭발해 미약하지만 또 다른 공간의 힘이 퍼져나갔다. 그 순간 보탑의 신통이 영향을 받아 공간의 힘이 자언정을 비켜 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솥은 더욱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자언정을 부리던 혈광성조의 화신이 급한 마음에 직접 자리를 박차고 튀어 나갔다.

“감히 내 보물에 손을 써! 너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혼백을 뽑아 고문하지 않고는 내가 성계 성조가 아니다.”

우두머리 소년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두 손으로 빠르게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등 뒤의 마영(魔影)이 크게 울부짖으며 핏물을 내뿜었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핏물이 끝도 없이 뿜어져 나와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핏물에 거원도 주변에 펼쳐 놓은 진법들을 발동시켰다.

웅! 웅! 우웅!

진법에서 떠오른 빛의 장막이 검진을 완벽하게 감싸 거원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때 핏빛 배가 피바다에 떠올랐다.

우두머리 소년은 한립이 준비한 방어 진법을 비웃으며 두 소매를 털었다. 피바다가 요동치자 거대한 핏빛 파도가 일어나 흉흉하게 진법들을 덮쳤다.

쿠르릉!

진법이 만들어낸 빛의 장막들은 천적을 만난 것처럼 부서졌고 심지어 진법 자체도 푸른 연기로 변해 피어올랐다.

핏빛 파도가 가장 안쪽의 검진으로 들이닥치자 푸른 검기들이 미친 듯이 튀어나와 뜻밖에도 두꺼운 벽을 이루어 파도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두머리 소년은 조금 놀랐다.

피바다는 마계에서 독액으로 제련한 것이라 법보든 영수든 일단 빠져들면 죽음뿐이었다. 비록 법력이 부족해 위력이 크게 줄었다고는 해도 합체기 수사가 이것을 막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검진 속의 푸른 검기들은 별것 아닌 듯 보이는데도 핏빛 파도의 공격에도 전혀 훼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지만 대승기 수사의 화신이 여기서 물러날 리 없었다.

윙윙윙!

소년의 손짓에 피바다가 주먹 크기의 핏덩이 수백 개로 뭉쳐져 날개 달린 핏빛 애벌레로 변했다.

한립이 동공을 수축하고 검진을 더욱 촉발했다. 청반검진 속에서 용울음 소리가 들리고 발톱이 다섯 개 달린 청룡이 날아올라 입에서 빼곡히 검빛을 쏘아 보냈다.

핏빛 애벌레들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싹둑싹둑 잘려나갔다.

윙윙!

그러나 핏빛 파도로 떨어진 애벌레들은 원래대로 회복되어 벌떼처럼 다시 날아들었다. 애벌레들은 푸른 검빛의 장막에 접근해 입에서 가느다란 핏빛 수정 실을 분사했다.

머리카락보다 가는 실들이 검막(劍幕)에 부딪쳐 채채채챙 거리는 금속성의 충돌소리를 냈다. 게다가 핏빛 실들은 검기에 잘려나가지 않고 찐득하게 녹아 검막에 달라붙었다.

애벌레들이 날개를 펄럭여 뒤로 물러나자 수백 개의 핏빛 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쩔 수 없이 푸른 보호막에 약간의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