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7화. 대책
*
“그중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다고요? 보물들은 혈광성조가 제련해 두었을 텐데요.”
“흠, 자언정이 원래 노부의 물건이었다면 어떤가?”
차기공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거들먹거렸다.
“정말이십니까?”
“혈광의 암습을 받아 원신을 진마쇄 안에 숨기고서야 그놈의 이목을 속일 수 있었지. 자언정과 육신은 그놈의 손에 들어갔고 말이야. 백 년 동안 보물을 새로 제련했다고 해도 노부가 당시 남겨둔 의식이 분명 남아 있을 것이야. 자언정 속에 음과 양으로 두 종류의 의식을 심어 놓았으니까. 혈광이 제2의식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수사가 보물을 빼앗아올 기회가 있을 걸세.”
“그렇다면 성공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보물에 남겨둔 의식이 얼마나 강한지가 문제입니다.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한립은 구미가 확 당기면서도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런 일을 대비해 특별한 방법으로 제련한 의식이라 혈광에게 발각되지만 않았다면 5할 이상의 확률로 보물을 통제할 수 있네. 또한 노부의 방법을 사용하면 보물을 빼앗지 못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걸세.”
“성공 가능성이 5할 이상이라면 시도해 볼만 합니다. 그럼 채광탑은 어찌해야 할지 아십니까? 자언정도 문제지만 탑이 생령(生靈)을 빨아들여 더욱 골치가 아픕니다.”
“혈광 놈이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채광탑은 성계에서도 이름난 현천잔보일세. 내가 친히 나서도 그것을 파훼하기는 어려울 게야.”
자신만만하던 차기공이 침음했다.
“방법이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파훼할 수는 없어도 시간을 끌어줄 수는 있네. 기회를 보아 자네가 자언정만 빼앗아 오면 둘 다 현천잔보이니 그걸로 대항하면 되겠지.”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선배님,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하하, 뭐 거창하게 가르침이랄 건 없네. 다만 노부가 아무 대가도 없이 자언정과 채광탑을 억제할 방법을 가르쳐 줄 거라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선배님이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간단하네. 노부가 제안했던 거래에 응한다면 필요한 비술과 억제 방법을 알려주겠네!”
“자세한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번에는 급히 자리를 뜨느라 세부 사항을 듣지 못했으니까요.”
“노부가 과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을 것이니 안심하게. 내 조건대로 하면 수사도 큰 이득을 보게 될 것이야.”
차기공이 그제야 희색을 드러내며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찬찬히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 수사는 곤경에서 벗어난 후 바로 인근의 황천지화로 가야하네. 그곳의 천지음화(天地陰火)를 빌려 진마쇄 속의 혼돈이기를 얼마간 추출할 수 있을 것이야. 때가 되면 내가 추출 방법을 알려주겠네. 그 대신 추출한 혼돈이기 중 3분의 1은 노부에게 넘겨야 하네.”
“이곳에 갇혀 계신 분이 혼돈이기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알아서 할 테니 수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닐세. 자네는 그냥 거래를 수락하기만 하면 되네.”
“혼돈이기의 3분의 1라면 과한 요구는 아닙니다. 첫 번째 조건은 수락하지요.”
“두 번째 조건은 더욱 간단하고 당장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는 일일세. 노부가 보기에 자네의 실력과 운이 제법 괜찮은 듯하니, 아마 대승기에 이를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 그런 날이 온다면 노부를 도와 혈광 저 비열한 놈을 참살할 것이라 약조해주기를 바라네.”
“농담이시지요? 제가 어찌 대승기 수사를 죽인단 말입니까. 게다가 그런 능력이 생기더라도 혈광성조는 마계에 있을 텐데 저더러 거기까지 쫓아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리 급히 거절하지 말게! 두 번째 조건은 수사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러 성계로 오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니까. 물론 수사가 이 일을 행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지키지 않아도 되는 조건일세.”
차기공이 어두운 눈빛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저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심마(心魔)를 걸고 맹세하건데 혈광성조를 손쉽게 격살할 실력이 되면 선배님을 도와…….”
한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심마를 걸고 맹세했다. 심마에 건 맹세는 수행이 높아질수록 강한 구속을 받았다. 중요한 수련의 고비를 넘길 때 맹세를 지키지 않아 발생한 심마로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인이 흡족한 얼굴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수사의 도움이 있어야 황천지화로 가서 혼돈의 기운을 취할 수 있을 테니 비술과 대응 방법을 알려 주겠네. 하지만 혼돈이기를 연화하는 방법은 혼돈의 기운을 얻은 다음에 알려줄 것이야. 이의는 없겠지?”
“혼돈이기를 연화하는데 특별한 방법이 존재한다는 뜻인지요?”
“진마쇄 속 혼돈이기가 어떤 존재인데 평범한 방법으로 연화가 되겠는가. 노부가 스스로의 학식을 뽐내려는 것은 아니네만, 성계의 성조들 중에서도 이 방법을 아는 자는 셋밖에 되지 않을 것이네.”
차기공이 오연하게 말했다.
“혈광성조 화신이 곧 저를 따라잡을 것 같으니 선배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자를 따돌리는 대로 선배님을 황천지화로 모시지요.”
“허허, 현명한 선택일세! 옥간 안에 비술과 방법을 적어 두었네. 이 자리에서 외우고 떠나게.”
차기공은 소매 속에서 새까만 옥간을 꺼내 던져 주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립은 거침없이 옥간을 끌어와 이마에 대고는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길게 숨을 내쉬며 옥간을 떼어내고 힘을 주어 옥간을 부셨다.
“비술과 사용방법을 숙지했습니다. 채광탑은 똑같이 공간 속성을 지닌 보물로만 대적이 가능했군요! 제가 몇 가지 보물을 지니고 있기는 한데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공간 속성을 지닌 부적도 가능하겠습니까?”
한립이 곰곰이 옥간의 내용을 곱씹으며 질문했다.
“현천잔보인 채광탑의 공간 신통을 제약하려면 위력이 강할수록 좋겠지. 허나 그저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면 보물의 위력에 상관없이 자폭하게 만들면 미세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걸세.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부적도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게야.”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시간이 꽤 흘렀으니 저는 돌아가 혈광성조 화신을 상대해야겠습니다. 아, 잊고 말씀드리지 않은 일이 있습니다. 혈광성조 화신은 다른 수사의 몸에 깃들어 있는데 법력이 크게 증가해 두 보물의 위력을 자유자재로 발휘합니다. 평범한 방법으로 의식을 강림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아서요. 게다가 화신을 셋으로 나누기까지 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어떤 신통을 쓰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자리를 뜨려던 한립이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뭐라? 그럴 리가! 영계로 의식을 강림해서는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을 텐데.”
“저도 그게 이상합니다. 혈광성조는 이미 다른 화신을 보내 인근 마족 대군을 통솔하고 있는데 이번에 의식을 또 내려보낸 데다 아주 강력한 신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계의 성조들이 전부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인근 종족들은 진작 마족들에게 패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른 성조들은 절대 그런 능력이 없으니 걱정 말게. 아무래도 어디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너무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라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구만.”
차기공의 말에 한립의 얼굴이 밝아졌다. 혹시 몰라 물은 것인데 상대가 정말 무언가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스스로 마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성조 중 한 명이라더니 거짓은 아닌 듯했다.
“생각났네! 성계에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금지된 술법이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야. 다만 아주 오래전에 실전되었고, 너무 위험하고 후환이 무궁무진한 술법이라 상고시대 때에도 극소수의 성조 수사들만 익혔다고 들었네. 아마 지금 성계에서 이 비술이 존재했다는 것을 아는 자는 몇 되지 않을 것이야. 혈광 그놈이 어찌 그것을 익힌 것이지?”
차기공이 얼굴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금술(禁術)이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분원참시대법(分元斬尸大法)은 일종의 원신을 분열하는 비술일세. 분열 후의 의식은 각각이 독립된 의식을 지녀 법력과 의식 일부를 조종하지. 성격이 극단적으로 변하는 것은 물론 부작용이 극심하고 원신을 분열하다 까딱 잘못하면 영구적인 손상을 초래할 수 있다네!
분열된 의식들은 화신이라기보다는 각각이 본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주 의식과 차이가 없지.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분원참시대법으로 만들어낸 분신들의 위력은 얼마나 많은 의식을 분열해 냈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들었네. 아주 강한 분신을 영계로 강림시킬 수는 없겠으나 다른 성조들의 의식 화신보다는 훨씬 강하겠지.”
“금술에 취약점은 없는지요?”
“물론 엄청나게 많은 단점이 있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당장 전투에 써먹을 약점은 없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상대의 화신을 따돌리고 달아날 예정이었으니 상황에 맞게 대처하겠습니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검은빛을 반짝인 한립의 허상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차기공은 그가 사라진 곳을 보다 웃음을 거두고 초원 상공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숨어서 볼만큼 봤으면 나오시지요!”
“허, 역시 차 형의 눈은 못 속이겠습니다.”
차기공이 쳐다본 곳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냉소하며 답했다.
“내가 금제를 깨고 이곳까지 왔으면 수사도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지난번 인족 수사가 나타났을 때도 내 뒤를 쫓았겠지요?”
차기공이 얼굴을 굳히고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아시면서 굳이 물어보십니다. 제게 따지기라도 할 요량이십니까?”
“그럴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참고 있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우리 중에 가장 독하고 모진 분이 차 형 아니십니까? 혈광이 먼저 수를 쓰지 않았다면 머지않아 차 형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을 겁니다.”
낯선 사내의 목소리도 서늘해졌다.
“혼자 사람 좋은 척하지 마십시오. 당시 각자 꿍꿍이가 있었던 것을 모를 줄 아십니까? 옛이야기는 됐고! 저 인족 녀석은 노부가 이곳을 탈출할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러니 이번 일을 그르친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좋습니다. 대신 인족 녀석에게서 얻게 될 혼돈의 기운을 반절만 남기시지요. 그럼 차 형의 일을 망치지도 않고 탈출한 후에 수사를 도와 혈광을 상대해드리겠습니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을 망치겠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반절은 절대 안 되고 반의반만 주겠습니다. 더 이상은 안 되니 좋든 싫든 마음대로 하시지요.”
“반의반이라……. 하하, 그거면 목숨도 부지하고 탈출도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곳에서 나가는 대로 진마쇄를 연화해 본래의 수행을 되찾고 혈광을 찾아 원수를 갚도록 합시다. 혈광 녀석이 우리를 따라하느라 지금이 가장 약해져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입니다. 직접 비술의 위험을 알면서도 어째서 다시 제련한 것일까요?”
낯선 사내가 표정이 풀어진 차기공을 향해 의혹을 제기했다.
“그놈이 무슨 꿍꿍이 생각을 갖고있는지 알게 뭡니까! 위험을 제거할 방법을 찾았거나 피치 못할 이유가 있겠지요. 어떤 것이든 현재 수행이 크게 줄어들었을 테니 복수하기 딱 좋은 기회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직접 만나면 알게 되겠지요!”
차기공과 마찬가지로 낯선 사내도 혈광에게 원한이 상당한 듯했다.
“우릴 다시 만나게 되면 혈광 놈의 표정이 볼만할 겁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려면 한 가 녀석이 이번 위기에서 살아남아야 하겠지요. 만일 녀석이 혈광에게 잡혀 진마쇄를 빼앗기면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은 버려야할 겁니다.”
“이미 두 보물을 상대할 방법을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보물만 잘 제어하면 인족 녀석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겁니다.”
“그저 녀석의 의식 화신을 만난 것이라 정확한 수행을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혈광의 수하들에게서 진마쇄를 빼앗을 정도면 그리 약하지는 않겠지요. 믿어보는 수밖에요.”
“하하, 정말 그러기만을 손꼽아 기원해야겠습니다.”
낯선 사내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