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6화. 대책을 묻다
*
잠시 후 반대쪽 하늘에서 핏빛 실이 나타나 하늘을 가르고 핏빛 배의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 배에는 똑같은 얼굴의 소년들이 타고 있었는데 하나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나머지는 눈을 감은 채 수결을 맺고 있었다.
파앗!
이때 아래쪽 산맥에서 천여 개의 빛기둥이 솟아올라 아름다운 빛의 거대 진법을 형성했다. 산맥을 지나려던 핏빛 배가 진득진득한 무언가에 묻은 것처럼 진법의 힘에 말려들었다.
“흥, 겨우 임시로 펼쳐 놓은 진법으로 본 좌를 막겠다!”
앞에 선 혈향 소년이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나머지 소년 중 한 명이 눈을 뜨고 입에서 검은빛을 뿜었다. 검은빛 속에서 나타난 것은 자언정이었다.
“파(破)!”
보라색 솥을 뿜은 소년이 낮게 외쳤다. 작은 솥은 몸을 부풀려 안에서 검은 주술문자 하나를 내뿜었다. 검은 돌풍으로 변한 주술문자가 거센 파도처럼 사방으로 밀려들어 거대 진법을 찢어발겼다.
펑!
빛의 진법이 무수히 많은 점들로 흩어지고 보라색 솥도 작아져 소년의 몸속으로 되돌아갔다. 소년이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감고 수결을 맺었다.
혈향 소년의 웃음소리가 퍼지고 핏빛 배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동시에 앞에서 날아가던 한립은 희미하게 연계가 깨진 것을 감지했다.
‘이럴 수가! 천묘해운대진의 진법 법기를 이용해 8할의 위력을 냈건만.’
한립은 크게 놀라며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가 변한 거대 붕새가 돌연 날개를 털어 백여 개의 깃털을 또 날려 보냈다. 깃털들이 여러 색깔의 부적으로 변해 허공으로 스며들고 은색 부적 두 장만 남아 있었다.
한 장은 금빛 갑옷을 입은 병사로 변해 금색 장검을 들고 허공을 지켰고 나머지 부적은 금빛 그림자로 변해 금갑 병사 뒤쪽으로 괴이하게 사라졌다.
거대 붕새는 이번에도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 파동이 일고 핏빛 배가 나타났다. 혈향 소년은 금갑 병사를 보고 냉소했다.
“이족 녀석이 잔재주가 많구나. 고계 그림자 꼭두각시까지 제련해 들고 다니고 말이야. 하지만 본 좌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물건이 아닌가!”
핏빛 배 뒤에 서 있던 소년이 눈을 번쩍 뜨고 칠색 보탑을 발동했다. 거대한 칠색 거탑 그림자가 머리 위에 나타나자 금갑 병사가 무표정하게 검은 장검을 휘둘렀다.
콰릉!
거대한 금빛 검기가 탑 그림자의 밑 부분을 가르자 눈 녹듯이 없어졌다. 그러나 거탑 그림자가 그대로 떨어져 금갑 병사를 향해 일곱 빛깔 광채를 내뿜었다.
광채가 사라지고 거탑 그림자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는데 금갑 병사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우두머리 혈향 소년이 큰 소리로 웃고 다시 핏빛 배를 움직였다.
그런데 배가 금갑 병사를 거둔 곳을 지나려는 순간 또 다른 금갑 병사가 소리 없이 나타나 수결을 맺고 등 뒤에 삼두육비의 희미한 법상을 불러냈다.
삼두육비 법상이 여섯 개의 팔을 휘둘러 작은 배를 공격했다.
“진마법상! 말도 안 돼!”
이전까지 그를 비웃던 소년은 이번 습격에는 조금 놀란 듯했다. 그 뒤에서 소년이 보라색 작은 솥을 때려 보라색 보호막으로 배 전체를 보호했다.
퍼퍼퍼펑!
금빛 여섯 덩이가 보라색 보호막에 떨어질 때마다 폭음이 터졌다. 모든 공격은 보호막이 흡수했지만 그만큼 핏빛 배의 움직임이 지체되었다.
우두머리 혈향 소년이 얼굴을 굳히고 손을 뻗어 허공에 괴이한 도안을 그렸다.
푸쉭.
갑자기 배 앞에 하얀 구멍이 뚫리고 핏빛 구렁이 허상이 나타나 금갑 병사를 돌돌 말았다. 감당할 수 없는 힘에 금갑 병사는 물론이고 등 뒤의 삼두육비 법상까지 펑! 하고 터져나갔다.
금갑 병사와 삼두육비법상이 금빛으로 흩어지자 소년은 다시 배를 움직이려다 홱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배 위로 어느새 정체모를 기운들이 몰려들어 궁전 허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립이 미리 펼쳐 둔 구궁천건부였다. 궁전이 눈부신 빛을 뿜어 혈향 소년들이 탄 핏빛 배를 금제 속에 가두려 했다.
이때 칠색 보탑을 다시 발동한 소년이 정혈을 한 모금 뱉고 ‘수(收)’ 라고 외쳤다. 그러자 일곱 빛깔이 보탑 위에서 밀려나와 허공의 궁전 허상을 빨아들이고 다시 조용히 소년의 손으로 돌아갔다.
* * *
의천성 밖.
거대한 성을 지키던 금제들이 속속들이 뚫려 성벽 절반이 마족 기병과 마수들에게 뚫렸다. 이때까지도 백팔 괴뢰들은 허공에 떠서 꼼짝도 하지 않았고 무언가 현묘한 진법들을 응결해 내고 있었다.
인족 병사들도 그것을 알고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때 의천성에서 멀리 떨어진 산 위에는 천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마기로 뒤덮인 의천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몇은 탄식했고 몇몇은 두 손을 꼭 모으고 무언가를 기원했는데 많은 인원이 모여 있는데도 정적을 유지하는 것이 훈련을 잘 받은 이들 같았다.
그들 맨 앞에는 창백한 얼굴의 청색 장포의 중년인이 복잡한 얼굴로 의천성을 바라보았다. 바로 태상장로이자 성 안으로 되돌아갔던 청룡상인이었다.
“가자! 의천성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너희는 우리 사대 종문의 희망이니 천연성에서 마겁을 이겨내고 반드시 다시 사대 종문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청룡상인은 어렵게 고개를 돌리고는 명을 내렸다.
청룡상인이 종문의 제자들을 데리고 몰래 의천성을 떠나고 있을 때 한립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있었다.
적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펼쳐둔 진법과 갑원부 그리고 구궁천건부가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더욱 강력한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혈광성조 화신의 움직임을 잠시도 붙들어 두지 못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갑원부와 구궁천건부는 발동하자마자 제압당해 경악하고 말았다. 그에게도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것은 혈광성조 화신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그가 지닌 몇 개의 필살기를 사용해도 승산이 5할은 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만일 그가 이긴다 해도 상대의 화신 하나를 죽이는 것뿐이다.
한립이 슬쩍 시험해 본 결과 혈광성조 화신의 실력이 예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싸울 생각을 버리고 달아날 궁리에 전념한 것이다.
의식으로 어디까지 자신을 추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승기 수사의 기준으로 보면 달아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곤붕으로 변한 한립은 머리를 쥐어짰다.
사실 그를 뒤쫓고 있는 혈향 소년도 크게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핏빛 작은 배는 마계에서 유명한 비행 이보로 전력으로 운용하면 평범한 대승시 수사와 맞먹었다.
화신의 몸이라 전속력을 내지는 못해도 합체기 수사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거기다 핏빛 배를 전력으로 운용한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거리를 얼마 좁히지 못했다는 것은 황당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소년 쪽은 세 명이라 돌아가며 핏빛 배에 법력을 불어넣고 있었지만 혼자 헤쳐가야 하는 한립은 시간을 끌수록 불리했다.
영체 화신과 법상금신 등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거대 붕새로 변신해야만 지금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법력을 회복시켜주던 만년영유 등의 영약은 지금의 수행에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했다. 그가 꾸준히 단약을 집어삼키고 동시에 극품영석으로 법력을 회복해도 5, 6일밖에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잠깐! 혈광성조가 이렇게까지 내게 집착하는 건 진마쇄 때문이겠지. 보물을 포기하면 상대의 주의를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립이 고심하다 눈을 반짝였다.
“허나 현천의 보물을 포기해야 하다니! 게다가 차기공의 말이 사실이면 음양혼돈이기는 내게도 아주 중요한데 그걸 얻을 기회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
생각할수록 아까운 일이었다. 비록 목숨보다 중요한 게 없다지만 아직 막다른 길에 몰린 것도 아닌데 귀한 보물을 그냥 던져주고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돌연 한립의 눈빛이 서늘해지며 무언가를 떠올리자, 거대 붕새의 의식 공간 속에 금색과 검은색 원영이 나타났다. 금색 원영은 몸에 희미하게 푸른 광채가 흘렀고 검은색 원영은 짙은 마기가 풍겼다.
금색 원영이 입을 벌려 십여 개의 오색구슬을 분출하자 구슬들은 광채에 둘러싸여 금색 원영 주위를 회전했다. 그러는 동안 검은색 원영은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웠다.
오색 구슬이 오색 눈알로 변해 검은 원영을 향해 굵은 빛기둥을 내뿜었다.
파앗.
그것을 본 금색 원영이 작은 손을 뻗어 금색 벽돌을 불러냈다. 벽돌을 가리키자 벽돌 표면에서 무수히 많은 금색 뇌전 실이 벗겨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금은색 부적들이 붙은 하얀 목함으로 변했다.
한립이 가지고 다니던 ‘진마쇄’였다. 검은 원영이 몸을 바르르 떨고 희미한 허상으로 변해 목함 속으로 뛰어들었다.
푸른 초원 위에 한립 허상이 나타났다.
“또 이곳이군.”
한립은 남색빛이 어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고는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노부가 한 말이 거짓인줄 알았단 말로 들리는군. 나머지 층의 금제들을 깰 방법이 있으면 진마쇄 안으로 들어가 보든가.”
초원 위에 흑녹색 장포를 걸친 노인이 나타나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의식 화신이 영원히 소실되지 않는다면 진정한 진마쇄 내부가 어떤지 살펴보고 싶기는 합니다.”
“노부도 이렇게 오랜 세월 갇혀 있었는데 겨우 의식 화신으로 진마쇄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걸세. 그래서 지난번에 제안한 일은 생각해 보았는가?”
차기공은 이전보다 훨씬 친근한 어투로 물어왔다.
“확실히 혼돈의 기운에 관심이 갑니다. 하지만 이번에 수사를 찾아뵌 것은 다른 일로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마쇄와 관련된 일 말고는 노부는 하고 싶은 말이 없네만!”
“그렇습니까? 설마 혈광성조에 관한 일도 말입니까?”
“……혈광! 그게 무슨 말인가. 설마 그놈을 만나기라도 한 것인가!”
“본체는 아니고 혈광성조의 화신이 저를 악착스럽게 뒤쫓는 중이라서 말입니다. 화신의 신통이 적지 않아 선배님께 방법을 구하고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흥, 겨우 화신을 가지고. 게다가 노부가 왜 너를 도와줘야 하지?”
“물론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진마쇄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해봐야겠지요. 혈광성조가 친히 화신을 보내 저를 쫓는 것은 십중팔구 이것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보물만 지니고 있지 않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덜 위험해질 테지요.”
“나를 위협하는 겐가! 진마쇄는 수사가 혈광의 수하들을 죽이고 뺏은 물건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 그놈이 보물을 바친다고 이족인을 살려둘 성 싶은가? 절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걸세.”
“이 방법이 통할지 안 통할지는 직접 해봐야 알 수 있겠지요. 물론 선배님께서 약간의 조언을 해주시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요. 혈광성조와 원한이 깊으신 선배님께서도 다시 그자의 수중에 떨어지고 싶지는 않으실 것 아닙니까.”
한립은 미소 지었다. 그의 태연자약한 태도에 차기공은 난색을 표했지만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한참 후 의미심장하게 한립을 훑어본 차기공이 불퉁거리며 입을 열었다.
“노부가 혈광의 화신을 상대할 방법을 알거라고 어찌 자신하는 겐가. 오랜 세월 갇혀 있어 상대의 신통을 전부 파악하고 있지도 못할 텐데.”
“혈광성조의 신통이 얼마나 늘어났든 제가 상대하는 것은 화신에 불과합니다. 저도 화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니고 있는 보물들을 꺼리는 것이고요. 그 두 가지 보물을 해결할 방법을 알려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두 가지 보물? 혹시 현천잔보(玄天殘寶)인 자언정과 채광탑을 이르는 것인가?”
“자언정, 채광탑이요? 맞습니다. 보라색 솥과 일곱 빛깔의 보탑이었습니다. 그것들이 현천잔보였단 말입니까!”
“정말 그게 맞나 보군. 잘 되었네! 노부는 그것들을 상대할 방법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운이 좋다면 자네가 그중 한 가지를 얻게 해줄 수도 있네.”
차기공이 묘한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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