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5화. 혈향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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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양 머리 짐승이 나선 것을 보고 움직임을 멈추고 그곳을 주시했다.
이에 한시름을 놓은 백색 장포 소년은 품에서 해독용 단약을 꺼내 삼키고 법력을 이용해 체내의 독을 밀어내었다.
합체 중기의 수행을 지녔기에 중독이 되고도 견딘 것이지 합체 초기 수사였다면 벌써 죽었을지도 몰랐다.
멀리 혈향 소년이 거대 짐승이 새까만 태양처럼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의외라는 듯 혼잣말을 했다.
“이곳에서 합식수가 나타날 줄이야. 아직까지 승기를 잡지 못한 이유가 있었구나. 안 그래도 강림해서 타고 다닐 것이 없었는데 너로 해야겠다.”
소년은 보라색 작은 솥을 꺼내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망!’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작은 솥이 빙글 돌며 검은빛과 함께 고대 문자 ‘망(網)’을 불러냈다.
그것을 본 짐승이 입에서 괴풍을 뿜고 박쥐 날개로 몸을 감싸 노란 구름 속으로 신형을 감추었다. 방어에 자신이 있던 짐승은 검은 주술문자를 무시하고 그대로 돌격했다.
검은 주술문자가 돌풍 속을 뚫고 노란 구름 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다음 순간 그 안에서 짐승의 괴성이 들려왔다. 방대한 짐승의 몸이 무수히 많은 검은 실로 묶여있었다.
아주 가느다란 검은 실은 거대 짐승이 아무리 씩씩거리며 몸부림쳐도 절대 풀리지 않았다. 혈향 소년은 교활한 미소를 띠며 슬쩍 고개를 돌려 한립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는 듯했다.
“……!”
한립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고 소름이 돋았다. 혈향 소년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소년을 향해 손짓했다.
쿠르릉!
수천 장 높이의 거탑이 어른어른 거리더니 사라지고 혈향 소년의 손에 손바닥만 한 소형 보탑이 생겨났다. 소년은 거대 짐승을 향해 보탑을 던지고 수결을 맺었다.
보탑은 빙글빙글 회전하며 일곱 빛깔의 기운을 흩날리고 7층의 거탑으로 변했다. 일곱 빛깔 기운에 휩싸인 양 머리 짐승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큰일입니다. 합식수를 감응할 수 없게 되었어요!”
짐승이 사라지자 임란 성자가 대경실색해 소리쳤다. 그 말에 한립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원주인인 혈광성조가 부리는 보라색 솥과 칠색 보탑의 위력은 그가 겪은 것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 분명했다.
“갑시다.”
놀란 청룡상인이 먼저 푸른 둔광을 일으켜 흑갑 거한의 망치 허상들을 뚫고 의천성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은광 선자와 임란도 겁에 질린 얼굴로 시선을 마주치고 각자 빛줄기로 변해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갔다. 한립은 청반검진을 회수하고 풍뢰시를 펄럭여 한발 앞서 사라진 후였다.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혈향 소년이 광소하며 두 팔을 풍차처럼 돌려 핏빛 기운을 일으켰다. 모호해진 소년의 신형 속에서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더 나왔다.
세 명의 혈향 소년 중 둘은 각각 칠색 보탑과 보라색 솥을 들고 그 자리에서 없어졌고 나머지 한 명은 발을 굴러 핏빛 배를 불러냈다. 선홍색으로 빛나는 표면에 신비로운 주술문자들이 새겨져 반짝반짝 아름답게 빛났다.
소년을 태운 핏빛 배는 허공을 뚫고 사라졌다.
공간 파동이 일고 다시 핏빛 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아주 먼 곳이었다. 이렇게 두 번만 이동하면 한립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식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한립이 화들짝 놀라 이를 악물고 빙글 돌았다.
콰릉!
그는 재빨리 은색 거대 붕새로 변해 전력을 다해 쏘아져 나갔다. 금은색 가느다란 실로 변한 거대 붕새는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 금방 시야에서 벗어났다.
“엇, 곤붕변신술! 으하하하, 그런다고 본 좌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성 싶더냐? 노부는 저 녀석을 쫓아야 하니 너희는 다른 인족 합체기 수사들을 처리하거라.”
핏빛 배 위에서 혈향 소년이 냉소하고 흑갑 거한 등에게 전음으로 분부를 내렸다. 이어서 그의 옆으로 두 명의 소년이 떠올랐다. 마치 한시도 곁을 떠난 적이 없는 듯했다.
소년들이 동시에 수결을 맺고 핏빛 배 양쪽에서 두 쌍의 날개가 자라나 펄럭였다.
별안간 핏빛 배와 세 명의 혈향 소년도 의천성 천리 밖으로 벗어나 버렸다.
“두 분은 달아난 인족 합체기 수사 둘을 쫓고 저는 대군을 통솔해 의천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 김에 성 안으로 달아난 자는 제가 맡지요! 혈광대인께서 직접 추격하는 자는 어차피 죽은 목숨이니 신경 쓸 것 없고요.”
흑갑 거한이 생각을 정리하고 백색 장포 소년과 여린 여인을 향해 말했다.
“장 형만 두고 가라고요? 만일 인족에서 함정을 파놓기라도 했으면 어쩌시려고요.”
여린 여인이 머뭇거렸다.
“화혈명위가 있으니 이곳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 형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지요!”
흑갑 거한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홍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은광선자가 달아난 방향이었다. 백포 소년은 단시간에 독을 억누르고 임란선자가 달아난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흑갑 거한은 합체기 수사가 사라진 전장을 둘러보고는 고공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인족 합체기 장로들은 벌써 달아났다. 성을 함락하는데 언제까지 시간을 끌 것이냐!”
영력이 실린 목소리가 인족과 마족 병사들의 귀에 또렷하게 울렸다. 이에 마족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공격이 더욱 매서워졌고, 인족 병사들은 사기가 저하되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흥, 헛소리! 우리가 그냥 당하고 있을 줄만 알았느냐! 의천성을 함락하고 싶다면 우선 108마리의 거검정금괴뢰(巨劍精金傀儡)부터 뚫고 오거라!”
그때 의천성 안에서 청룡상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쿠르르릉!
백여 개의 금색 빛기둥이 성안 곳곳에서 솟아올라 금갑 병사로 변했다. 커다란 금색 거검을 품은 병사들은 서늘하게 빛나는 은색 눈을 제외하면 온몸을 갑옷으로 가리고 있었다.
허공에 떠오른 백팔 금갑병사들은 연허기 수사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갈팡질팡하던 인족 병사들이 청룡상인의 목소리를 듣고 금갑병사까지 나타나자 다시 한 번 용기를 내 마족 병사들을 공격했다.
고요하던 의천성 밖이 법기와 보물들이 부딪치고 터지는 소리로 가득 찼다. 고공의 흑갑 거한은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화혈명위를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너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즉시 공격에 합류해 신속히 주요 방어수단을 파괴한다.”
그의 명령에 핏빛 마족 병사들이 명을 받들고 아래쪽으로 몰려 내려갔다. 화혈명위들이 끼어들자 마족 대군의 전진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성벽 위까지 마족 병사들이 올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도 의천성 위 백여 금갑 병사들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떠있었다.
그것을 본 흑갑 거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곰곰이 생각하다 갑자기 냉소하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는 검은 마족 전함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어느 밀실로 들어가 금제를 발동했다.
파앗.
밀실 벽에 오색 빛이 층층이 나타나고 바닥에서 하얀 소형 진법이 떠올랐다.
우웅!
빛을 발한 진법 안에서 청동 거울이 놓인 백옥 제단이 솟아올랐다.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군데군데 녹이 슬어 낡은 거울이었다. 거울을 앞에 두고 흑갑 거한은 주술을 외우며 입에서 정혈을 토했다.
피를 머금은 거울에 푸른 장포를 걸친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회백발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노인은 고서를 들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 누가 공간을 뛰어넘어 노부에게 소식을 전하려하나 했더니 자네였군. 성제에 참전한 것으로 아는데 분계경(分界鏡)을 사용할 만큼 큰일이 벌어진 것인가?”
“사 어르신을 뵙습니다. 혈광대인께서 또 영계로 강림하셨습니다.”
흑갑 거한이 예를 올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또 강림을 했다. 혈광이 화신을 하나 더 영계로 내려 보냈다면 이상한 일이기는 하구만.”
“이번에는 분신이 강림한 것이 아니라 비술을 이용해 음양이살 중 양살(陽殺)의 몸에 의식을 깃들어 내려왔습니다. 혈광대인의 화신으로 변한 양살의 법력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증폭된 것으로 보아, 본체의 힘을 3분의 1까지 끌어다 쓸 수 있는 듯 보였습니다. 자언정과 채광탑(彩光塔)의 위력도 7할 정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예상되고 인족이 불러낸 합식수를 보물을 이용해 가두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재미있군. 의식 일부를 다른 계면으로 내려 보내도 이계의 저항에 힘이 크게 줄기 마련인데 말이야. 혈광이 화신을 내려 보내고 수하의 몸에 깃들어 또 다른 화신을 만들어냈는데 이계의 힘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니……. 강력한 비술을 장악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태연자약하던 노인이 흥미를 보이며 중얼거렸다.
“혈광대인이 이번에 강림한 것은 인족의 합체기 수사 한 명을 쫓기 위해서였습니다.”
돌연 무언가를 떠올린 흑갑 거한이 덧붙였다.
“그 인족 수사에 대해 상세히 말해보게!”
“예! 그 자는 합체 중기의 수행을 지녔는데 실력이 대단해 음양이살과 싸우면서도…….”
흑갑 거한이 자신이 아는 바를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끝나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아주 잘 해주었네. 이 소식은 노부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어. 이제 돌아가 할 일을 하게.”
“존명!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대인.”
흑갑 거한이 엄숙하게 인사를 올리고 청동거울로 법결을 날렸다. 거울에 비친 노인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흑갑 거한은 얼굴을 풀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갔다.
* * *
또 다른 계면의 나무로 만들어진 방 안.
흑갑 거한에게 ‘사 어르신’이라 불렸던 노인은 고서를 무릎에 놓고 생각에 잠겼다. 옆에 놓인 탁자에 흑갑 거한이 불러낸 거울과 똑같이 생긴 오래된 청동 거울이 놓여 있었다.
“혈광, 담도 크구나. 어떤 방법을 써서 그렇게 많은 법력을 보유하고 영계로 넘어갔는지는 몰라도 본체에 무슨 일이 생길까 겁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냐. 너와 척을 진 자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영계가 소란스러워지겠구나!”
노인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 * *
여린 여인이 쾌속으로 날아가며 한 손에 든 핏빛 구슬을 통해 마계에 있는 노부인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보고가 끝난 여인은 다시 구슬을 삼키고 더욱 속도를 높여 은광 선자를 뒤쫓았다.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던 백색 장포 소년도 수정 부적을 이용해 비슷한 일을 했는데, 조심스럽게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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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한립이 변한 은백색 거대 붕새는 거의 보이지 않는 빛의 실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순간순간 엄청난 거리를 이동했지만 겨우 백여 리 밖에서 핏빛 작은 배가 그를 끈질기게 쫓고 있었다.
한립은 진작 혈광성조가 따라오는 것을 발견하고 법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미친 듯이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혈광성조가 부리는 작은 배는 그가 평생 본 비행보물 중 손에 꼽힐 정도로 빨랐다.
수정 날개 두 쌍이 펄럭일 때마다 거리가 조금씩 단축되어 가슴이 서늘해졌다.
‘정말 혈광성조와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상대의 다른 신통은 아직 모르겠으나 들고 있는 두 가지 보물 만해도 역천의 위력을 발휘했다. 정면 대결을 하면 막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표적이 되었으니 이 자리에서 증발해 수만 리 밖에서 나타나지 않는 한 달아날 길은 없었다. 한립은 달아나며 끊임없이 대책을 궁리했다.
그러다 거대 붕새가 돌연 산맥 아래쪽을 향해 천여 개의 은색 깃털을 날려 보냈다. 깃털들은 깃발로 변해 다채로운 빛을 내며 산속으로 사라졌다. 거대 붕새는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작은 산맥을 지나 멀리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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