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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34화 (891/2,000)
  • 1134화. 청반검진

    *

    소년은 열댓 개의 수정 비도를 휘두를 뿐 특별한 공법을 펼치지도 않는데도 기이한 한기를 머금고 있어 은광 선자와 임란이 상당한 법력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두 여인은 어쩔 수 없이 법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진귀한 영약을 삼키며 버티고 있었다. 그들의 방어력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 광범위하게 하얀 한기가 어려 있는 모습에 한립도 입꼬리를 꿈틀했다.

    ‘내가 거탑에 빨려 들어가고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구나.’

    그는 거탑에서 반나절 넘게 있었는데 눈앞의 장면들은 결코 오랜 시간이 지난 후가 아니었다. 거탑 안의 시간의 흐름과 바깥의 속도가 다르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보물의 내력에 더욱 의문이 생겼다. 전설 속의 현천의 보물을 제외하고는 어떤 보물도 시간을 조작할 수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립은 내심 놀랐지만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주위를 살펴보니 마존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미부인과 협공해 그를 대적했던 은사 장포 사내였다.

    흠칫 놀란 그는 탑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떠올리고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이곳에서 시간을 끌면 안 되겠어. 당장 여길 떠나야 해!’

    그러나 한립은 인족이 밀리고 있어 선뜻 떠나지 못하고 주저했다.

    “하아, 일단 저들을 도와 마존 두 명만 처리해주고 떠나도 늦지 않겠지. 전력을 다해 시간을 단축한다.”

    이 상황에서 홀로 도망치면 앞으로 인족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울 거란 사실이 그의 발목을 잡을 뿐이었다. 게다가 혈광성조 본체가 강림하지 않는 한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가 알기로 역대 마겁 중 성조급 존재가 초기에 영계에 강림한 일은 없었다. 한립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서둘러 의천성의 위기를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또한 거탑은 아무리 욕심이 생겨도 보라색 솥과 마찬가지로 혈광성조가 수하에게 빌려준 보물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 대승기 수사의 의식을 강제로 제거하고 점유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래서 혈광성조도 마음 놓고 수하들에게 보물을 빌려준 것일 테고!

    한립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백색 장포 소년과 여린 여인을 향해 날아갔다. 멀리 은광 선자와 임란이 한립이 거탑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여인들 곁에 나타나 두 소매를 털었다. 푸른 검기의 연꽃과 은색 자 그림자가 변한 은색 천이 여린 여인 쪽으로 쇄도했다.

    “한 수사,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은광 수사와 함께 저 마두들을 막아주시면 그동안 저는 합식수를 조종해 또 다른 마두와 변이 마족들을 상대하고 있겠습니다.”

    임란이 말을 마치고 삼색 화염을 거두고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미간에 핏빛 부적을 불러냈다. 그녀는 이제 오직 부적을 조종하는 데만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콰릉!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커다란 검은 산봉우리를 불러내 백색 장포 소년이 날린 도광(刀光)을 막았다.

    하얀 빛이 번득이고 원자극산에 놀랍게도 하얀 얼음층이 생겨났다. 이전에 보았을 때 보다 몇 배는 강한 한기로 원자극산 마저 얼려 버린 것이다. 백색 장포 소년은 한립이 끼어들자 도리어 눈을 반짝였다.

    열댓 개의 수정 비도가 눈부신 빛을 뿜고 몰려오는 모습에 한립은 검결을 외웠다. 푸른 연꽃들이 빙글빙글 돌다 허공에서 사라지고 도처에서 수백 개의 푸른 빛기둥들이 분출되었다.

    그는 속전속결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처음부터 청반검진(靑蟠劍陣)을 펼쳤다. 도광이 변한 기이한 한기가 검진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흥미롭기는 하지만 겨우 검진으로 내 공격을 막을 수 있을까?”

    백색 장포 소년은 냉랭히 조소했다.

    소년은 한 손으로 수결을 맺어 도광들을 거대한 장도로 뭉쳐 검진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장도가 하얀 광채를 내뿜어 주변 공기마저 꽁꽁 얼어붙는 듯했다.

    청반검진 속에 매복해 있던 검빛들도 한기의 공격에 움직임이 매우 느려졌다.

    그 모습에 한립이 눈살을 찌푸리며 하얀 손을 펼쳐 다섯 개의 해골 머리 허상을 날려 보냈다. 바람을 타고 거대해진 해골 머리들이 괴이하게 키득거리며 입에서 오색 한염을 분출했다.

    오래 전에 그의 손바닥과 일체화된 오자동심마(五子同心魔)였다. 그는 수행이 늘어난 후로는 오자동심마를 불러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만황세계에서 우연히 일종의 기이한 한기를 손에 넣어 오색 한염의 위력을 키울 수 있었는데 새로운 한염의 위력이 꽤 불가사의했다.

    백색 장포 소년이 펼치는 한기의 힘이 강해 오랜만에 오자동심마까지 소환 한 것이다.

    오색 한염이 닿는 곳마다 백색 장포 소년의 한기를 밀어내 검진은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다. 한립의 한염이 소년의 것보다는 못해도 일부를 상쇄하는 것은 가능했다.

    우웅.

    한립이 두 손을 빠르게 움직여 수결을 맺자 검진 속에서 무수히 많은 푸른 검기들이 튀어나와 거대한 빛구슬로 응결했다.

    용울음 소리가 울리고 터진 빛구슬 안에서 아직 승천하지 못한 ‘반룡(蟠龍)’이 솟아올랐다. 푸른 비늘 하나하나가 거울처럼 맑게 빛나는 반룡은 하늘과 땅을 멸해 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품고 거대한 하얀 장도와 충돌했다.

    경천동지할 굉음이 고공에 울려 퍼졌다. 엄청난 한기를 품은 하얀 장도가 반룡의 목에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반룡의 목에는 흔적이 남지 않았지만 대신 기이한 한기 때문에 두꺼운 얼음층이 생기고 있었다.

    이에 반룡이 분노해 눈을 부릅뜨고는 몸을 비틀어 얼음을 털어내고 홱! 하고 목을 틀어 장도를 입에 물고 두 발을 날렸다.

    쩌저정!

    위력과 달리 그리 단단하지는 않았는지 장도가 반룡의 이빨과 발톱에 애달픈 소리를 남기고 쪼개졌다. 장도 조각들이 빛의 점으로 흩날렸다. 이에 백색 장포 소년의 놀란 표정을 드러내며 손끝으로 허공에 손짓했다.

    휘잉!

    하얀 바람이 일고 수십 개의 비도들이 멀쩡한 모습으로 떠올랐다.

    “저건…….”

    한립의 표정도 달라졌다. 이제야 비도들이 실체가 있는 보물이 아니라 상대의 극한(極寒)의 힘이 응결해 만들어진 무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한립은 내심 놀랐지만 무수히 많은 검빛을 응결해 푸른 반룡으로 하여금 백색 장포 소년을 덮치게 했다. 동시에 수정 날개 한 쌍을 불러내고는 천둥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상대가 강력할수록 더욱 최선을 다해 제거해야 했다.

    백색 장포 소년이 그것을 발견하고 코웃음을 쳤다. 소년의 주위를 돌던 수십 개의 비도들이 웅! 하고 치솟아 아까와 똑같은 새하얀 장도를 만들어냈다.

    소년이 한발로 허공을 박차고 하얀 빛줄기로 변해 새하얀 장도와 하나가 되어 푸른 반룡을 베어 들어갔다. 장도의 힘이 이전보다 배로 치솟아 음산한 한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나 푸른 반룡은 그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비늘을 치켜세운 채 충돌했다. 하얀 한기와 푸른 검빛이 맞붙어 한동안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이때 은빛 뇌전이 번득이고 한립이 그 위에 나타나 두 손을 뻗었다.

    팟! 팟!

    그러자 오색 한염을 둘러싼 새하얀 거대 손과 은색 화염이 일어난 검은 거대 손이 등장했다. 두 거대 손의 기이한 한기와 작열하는 열기가 괴이하게 하나로 뭉쳐져 위력이 떨어지기는커녕 더욱 상승했다.

    아래쪽에서 한기를 번득이며 나타난 백색 장포 소년이 빙한(氷寒) 기운의 거대 손으로 변해 솟구쳤다.

    세 개의 거대 손이 격돌했다.

    이에 새하얀 거대 손의 오색 한염이 얼어 쪼개지기 시작했고, 얼음으로 된 거대 손이 발산하던 기이한 한기도 깜빡깜빡 거리며 수축했다.

    이때 검은 거대 손이 은색 화염의 불씨들이 얼음으로 된 거대 손으로 옮겨붙어 화르륵! 타올랐다.

    펑!

    빙한의 기운이 다한 순간 은색 화염 속에서 수정빛이 튀어나와 번개처럼 달아났고 그 뒤를 금빛 가느다란 실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푹!

    수정빛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고 백색 장포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으로 움켜진 가슴에 손가락 굵기의 어두운 보랏빛 상처가 뚫려 있어 더는 냉랭한 표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서령천화가 삼킨 영선사광의 보호막을 무력화하는 신비한 신통을 이용해 한방 먹인 것이다.

    한립은 피식 웃으며 상대의 얼굴에 검은 기운이 빠르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영선사광의 독이 발작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숨통이 끊어지지는 않았어도 원기는 적잖이 상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백색 장포 소년을 죽일 기회였다.

    한립은 슬쩍 여린 여인 쪽을 살폈다. 마족 여인은 은색 자가 변한 천과 은광선자의 공격에 다른 곳으로 눈 돌릴 틈이 없어보였다.

    그는 주저 하지 않고 뇌둔술을 써서 백색 장포 소년에게 달려들었는데 전장 상공에 공간 파동이 일고 새까만 소용돌이가 생겨나 섬뜩한 기운을 뿜기 시작했다.

    “이런, 설마!”

    한립이 막 뛰쳐나가려다 우뚝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후우웅.

    섬뜩한 기운이 탑 안의 목소리가 발산하던 것과 동일했다. 물론 기운의 강도는 지금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그러나 더욱 가슴이 철렁한 일은 거대한 검은 소용돌이 아래에 은사 장포 중년인이 꼿꼿하게 떠있다는 사실이었다.

    인족과 마족 모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한립이 어두운 얼굴로 백색 장포 소년을 처리해야할지 아니면 소용돌이를 부숴야할지 고민하는데 이변이 발생했다.

    은사 장포 중년인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고 입에서 핏빛 수정돌을 뱉어냈다.

    쉬익!

    검은 소용돌이가 발산하던 무시무시한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 가운데에서 검붉은 기운이 뻗어 나와 중년인의 수정돌 속으로 흡수되었다.

    수정돌을 삼킨 은사 중년인이 머리를 붙들고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는데 얼굴에 핏빛 기운이 감돌고 온몸에 폭죽 터지는 소리가 나며 달라지고 있었다.

    점잖던 중년의 얼굴이 청수한 소년의 이목구비로 변하고 열예닐곱 살 체구에서 기이할 정도로 진한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혈향(血香) 소년은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두 손을 천천히 내리고 의천성의 인족과 마족 병사들을 훑은 후 광소했다.

    “본 좌가 드디어 인계에 왔구나! 흐하하, 성조들 중에서는 처음이겠지! 느낌이 묘한데…….”

    소년의 말에 인족의 고계 수사들은 기겁했고 마족 고계 수사들은 희색을 드러냈다. 고계 마족 중 하나가 기민하게 혈향 소년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외쳤다.

    “성조대인을 뵙습니다. 성조대인의 영계 강림을 감축 드립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마족들도 대례를 올리기 시작했고 인족 수사들은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흑갑 거한과 백포 소년 등 마족 존자들만이 기쁨과 미심쩍음을 동시에 품고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저 마두는 다른 존재의 육신을 빌려 강림한 것이라 법력이 본체에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임 선자, 어서 합식수를 이용해 저 마두를 공격합시다.”

    청룡상인이 위엄 있게 소리쳤다. 임란의 표정이 어두웠지만 자신만을 지켜보는 의천성의 수많은 인족 병사들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손으로 미간의 핏빛 부적을 집고 비술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조종에 흑갑 거한과 핏빛 기운 마족 병사들을 상대하던 합식수가 길게 포효하고 입에서 괴풍을 뿜었다.

    주변의 마족들이 추풍낙엽처럼 흩어지고 그 사이를 합식수가 뚫고 지나갔다.

    청룡상인이 다시 기합을 넣고 7개의 칼을 불러내 청룡으로 변하고는 핏빛 마족 병사들을 공격했다. 합식수를 뒤쫓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흑갑 거한은 거대 쌍망치를 이용해 빼곡하게 망치 그림자를 날려 의식의 절반을 혈향 소년과 합식수 쪽으로 돌려놓고 있었다. 이때 한립은 다급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마족성조가 정말 강림을 하다니!’

    비록 본체가 강림한 것은 아니지만 의식을 깃들게 하는 술법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혈향 소년은 평범한 합체 후기 수사의 기운을 훨씬 넘어섰다. 상대의 신통이 어떠할지는 싸워보지 않고는 단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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