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128화 (885/2,000)

1128화. 의천성 전투 (1)

*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한립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푸른 기운을 날려 금빛으로 가려두었던 창문을 열자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즉시 푸른 빛줄기로 변해 방을 빠져나가 허공에 떠서 위를 바라보았다.

하늘에 높게 떠있던 일곱 개의 태양 중 하나에 괴이한 회색 반점이 나타나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래에는 천기현상을 보러 나온 수사들과 범인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의천성 고위층이 오양화월의 날에 성을 방어하는 진법이 효력을 잃는다는 사실을 최대한 숨겼지만 어쩔 수 없이 소문이 퍼져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사대종문의 합체기 수사 두 명이 직접 나서서 안전을 보장했기에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직접 천기현상을 보고 있자니 심란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의천성 곳곳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사대종문의 복색을 한 고계 수사들이 날아올랐다. 동시에 무장한 수사와 인족 역사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허공과 지면을 돌며 순찰하기 시작하자 범인들도 얌전히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러나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한식경이 지나 태양 하나가 완전히 잿빛으로 가려졌을 때에야 그는 고개를 돌려 성 안의 대전으로 몸을 날렸다. 한 시진 후 푸른 빛줄기가 모처의 대전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 형, 웬일로 이제야 오셨습니다.”

대전 안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고 은색 가면을 쓴 여인이 걸어 나왔다.

“은광 수사셨군요. 잠시 성 안의 상황을 살피다 오는 길입니다. 임 선자와 청룡 수사께서 대비를 잘해 놓아 크게 소란이 일지는 않았더군요.”

“물론이죠! 임 수사와 청룡상인은 합체기에 이른지 오래된 분들이고 사대종문의 태상장로직을 맡아 이런 일에 아주 능하니까요. 그보다 오양화월이 시작되어 마족대군이 몰려오고 있을 겁니다. 이번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전력은 한 형이 아니십니까. 대대적으로 전투가 시작되면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은광 선자가 신중하게 당부했다.

“당부 감사드립니다만 제가 가장 중요한 전력이라는 말씀은 감당할 수 없군요. 임란 선자와 청룡 수사의 법력 또한 저 못지않습니다.”

한립은 상대의 말에서 진심어린 걱정을 느끼고 미소를 지었다.

“임 수사와 청룡상인이 한 형의 진정한 실력을 몰라서 그렇지 알았다면…….”

“두 분께서는 어서 안으로 들어와 논의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급보에 따르면 마족대군이 의천성으로 오는 길이라 합니다.”

은광 선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전 안에서 청룡상인의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광 수사,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시지요. 청룡상인과 임 선자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지요, 한 형.”

한립의 말에 은광 선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뜻밖에도 백 명이 넘는 연허기 고계 수사들이 잔뜩 몰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청 사방을 병사 수백 명이 지키고 있었다.

대전 앞쪽에 네 개의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중간의 두 개가 약간 높았고 나머지 두 개는 그 옆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대전 중앙에 환영이 응결한 거대한 빛의 장막이 둥실 떠서 의천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주위로 검은 기운들이 꿈틀꿈틀 몰려오는 중이었다.

의천성 주위로 꿈틀꿈틀 접근하는 검은 기운은 마족대군이었다. 축소된 모형에서는 아주 느린 속도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엄청나게 빠르게 진격하는 중일 것이다.

“한 수사, 은광 선자 어서 앉으시지요. 이번 일전에 의천성의 생사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두 분께서 힘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청룡상인이 그들을 보고 밝은 얼굴로 일어났다.

“인족은 본래 하나가 아닙니까. 이번 전투에 저희도 최선을 다할 것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은광 선자가 이에 화답했다.

“마족대군의 동향을 감시하는 병사가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이번 전투에 마족 대군이 전부 출동했다고 합니다. 미리 짐작하고 이 날을 위해 준비해두었으니 다행이지요. 우리가 최선을 다해 마족 존자들을 막는다면 마족 대군을 격퇴시킬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의천성을 위해 멀리 와주신 두 분께 헛되이 위험을 감수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약소하지만 저희가 준비한 것이니 받아주십시오.”

한립과 은광 선자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임란 선자가 입을 열었다.

짝짝!

그녀가 가볍게 박수를 치자 두 명의 청갑 병사가 각자 금색 비단으로 덮인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한립은 금색 비단 속의 남색 고리를 불러들였다. 꽤 상급의 저물탁이었다.

그는 의식으로 저물탁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저물탁 안에 다량의 진귀한 재료들과 웬만한 작은 종문의 전 재산과 맞먹을 법한 극품영석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사대종문은 인족의 초대형 세력답게 씀씀이가 대범했다. 물론 의천성의 생사존망이 걸린 대규모 전투가 코앞이었기에 청룡상인과 은광 선자도 최선을 다해 준비한 것이다.

“두 분의 성의이니 거절하지 않고 받겠습니다.”

한립은 저물탁을 거두었고 은광 선자도 희색을 보이며 고민 없이 선물을 받았다. 임란 선자와 청룡상인이 그것을 보고 오히려 안심하는 눈치였다.

“의천성만 지킬 수 있다면 전투를 마치고 더 큰 답례를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마족들을 격퇴시키고 오양화월의 날이 지나 구양강일절진이 위력을 회복하면 의천성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두 분의 은혜는 저희 종문들이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청룡상인과 임란 선자가 번갈아 가며 약조했다.

“전력을 다해 도울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만상마기는 청동괴뢰 대군으로 막는다지만 가륜전마가 걱정입니다. 각각이 살육에 미친 마물들이라 평범한 수사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텐데요.”

“그건 안심하시지요, 한 형! 동급 수사로는 가륜전마를 막을 수 없다 판단해 저희 종문의 정예 병력을 차출해 놓았고 따로 준비한 방책도 있습니다.”

한립의 걱정에 청룡상인이 세부 사항을 생략하고 답했다.

“상인께서 미리 준비를 해두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제 이번 전투를 어떻게 치를 것인지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구양강일대진을 제외한 성 안의 다른 진법은 영석을 아낌없이 소모해 최대의 위력을 끌어내도록 명을 내려 두었고, 연허급 수행을 지닌 금속괴뢰 32마리를 이용해…….”

청룡상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계획한 바를 이야기 했고 임란 선자가 옆에서 수시로 보충했다.

반 시진 후, 대전 안의 고계 수사들이 명을 받아 빠르게 움직였다. 긴장된 기색의 수사들이 의천성 곳곳으로 날아올랐다.

대앵!

얼마 지나지 않아 웅장한 종소리가 의천성을 가득 메우고 인족 병사들의 부대가 쏟아져 나왔다.

성 곳곳의 밀실에서 크고 작은 진법들이 밝은 빛을 발했고, 몇몇 건물은 굉음을 터트리며 커다란 거인으로 변해 위용을 드러냈다.

의천성 중심의 의사대전은 주변 땅을 마구 흔들며 고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대전의 평범한 문양들이 꾸물꾸물 움직여 신비한 오색 주술 문자를 형성했다.

펑!

오색 보호막이 나타나 의사대전을 감쌌다. 의사대전은 오색 빛덩이로 변해 어딘가로 튀어나갔고 몇 시진 후 성벽 위에서 나타났다.

대전 아래에는 인족 역사와 저계 수사들로 이뤄진 인족 대군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수백만 대군은 되는 것 같았다.

인족 대군 위로 7, 8천 명의 고계 수사들이 다양한 보물을 방출하고 대기했다. 그리고 한쪽의 지하 동굴에서 흉악한 모습을 한 영수들도 기어 나왔다. 포악한 눈빛을 번뜩이는 영수들은 금제가 걸려 있는지 한곳에 모여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영수들이 빠져나온 다음에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연결된 지하통로를 통해 갑옷을 입고 병장기를 든 청동대군이 몰려나왔다. 그 중 32마리는 크기가 월등히 큰 금속괴뢰들로 따로 모였다.

동시에 병사들로 겹겹이 보호받고 있는 대형 광장에서 열댓 명의 백포 수사들이 자홍색 초대형 진법을 사이에 두고 바삐 오갔다.

보라색 옥석을 세공해 만든 진법에는 다채로운 빛깔의 주술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굉장히 복잡했다. 놀랍게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문 자모연환대진(子母連環大陣)이었다.

9개의 고리가 복잡하게 얽혀 중심에는 남색 주술문자로 이뤄진 소형 진법이 들어있었다. 소형진법은 놀라운 한기와 은근한 피 냄새를 풍겼다.

이 초대형 진법은 빛이 어둑해져 9개의 자(子) 진법운용을 멈춘 듯했고, 중심의 남색 모(母) 진법만이 아직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열댓 명의 백포 수사들은 알 수 없는 금색 수정돌을 곳곳에 박아 넣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서너 시진이 훌쩍 지나갔다.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오자 의천성 안 병사들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검은 선 같은 것이 저 멀리 나타나 점점 굵어졌다. 새까만 마기로 이루어진 검은 바다가 산만한 전함들을 숨기고 접근하는 중이었다.

의천성 상공의 대전 지붕에는 열댓 명의 수사들이 소리 없이 나타나 각기 다른 표정으로 마기의 바다를 응시했다.

그들은 청룡상인 등 네 명의 합체기 수사들과 연허 후기 수사들이었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검은 마기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립의 눈에서 문득 푸른빛이 반짝였을 때 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마기가 갈라졌다. 그 안에서 망치를 든 흑갑 거한, 백포 소년이 나타났다. 의천성에 도착했을 때 기습했던 마족 합체급 수사들이었다.

그 뒤로 화염에 둘러싸인 홍갑 거인과 자그만 체구에 맨발로 거대 구렁이를 밟고선 여인이 뒤따랐다.

한립은 미리 마족 존자들의 정보를 연구했기에 알고 있는 바와 같은지 대조해 보았다. 낯선 두 수사는 합체 초기라 엄청난 보물이나 역천의 공법을 보유하고 있지 않는 한 그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상의 결과 여인과 거인은 은광과 임란 수사가, 흑갑 거한과 백색 장포 소년은 한립과 청룡상인이 견제하기로 했다.

청룡상인의 말에 따르면 무리해서 상대를 격퇴하거나 죽일 것 없이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마족 존자들이 전투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고 오양화월의 날만 지나면 승리를 거두는 셈이었다.

마족 존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서도 바로 달려들지 않고 기다렸다.

“마두들의 인내심이 상당합니다. 다섯 태양이 완전히 가려져 음기가 가장 강성할 때 전투를 시작하겠다는 심산이겠지요.”

청룡상인이 씁쓸하게 말했다. 이에 한립은 말없이 고개를 들고 7개의 태양 중 4개가 빛을 잃은 것을 확인했다. 5번째 태양도 회색 점에 점점 잠식되어 빠르게 빛을 잃어갔다.

“오양화월의 천기현상이 완성되기 전까지 구양강일대진이 효력을 발휘할까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임란이 웃음을 머금고 말을 받았다.

“마두들은 우리가 미리 진법을 억제하고 있다는 것은 모를 겁니다. 어찌 되었든 잘 되었습니다. 어차피 시간을 끄는 것이 이번 전투의 목적이니까요.”

“그렇게 오래 기다려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청룡상인의 말에 은광 선자가 멀리 하늘을 걱정스레 올려다보았다.

“허허, 아주 약간의 시간이라도 버티면 그만큼 승산이 늘어나는 겁니다. 마족대군이 당장 진격하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지요.”

청룡상인이 일부러 사기를 북돋았다. 5번째 태양이 어둑해 질수록 의천성과 마기의 바다에서 살기가 진해졌다. 청룡상인이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멀리 흑갑 거한이 먼저 큰 소리로 외쳤다.

“청룡 수사, 성을 지키는 진법마저 힘을 잃은 마당에 죽기 살기로 버텨 무엇 하겠습니까! 투항하겠다면 성조대인께서 마기를 주입해 성족의 일원으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아두세요. 성족 대군이 의천성을 함락하면 끝입니다.”

흑갑 거한은 인족 병사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또렷하게 말하고 있었다. 기습할 때와 달리 아주 예를 차린 어투였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