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127화 (884/2,000)
  • 1127화. 혼돈의 기운

    *

    “미완성의 현천의 보물!”

    고요하던 한립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현천의 보물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다른 현천의 보물의 등장에 심장이 뛰었다.

    “흐흐, 진마쇄는 성계에서 탄생했기에 성계의 천지법칙의 힘과 소통할 수 있는 성조는 되어야 간신히 부릴 수 있다. 네가 요상한 방법으로 의식을 불어넣었을 때 노부도 우연히 원신으로 금제를 깨고 있었기에 붙들어 세울 수 있었지! 그렇지 않고 네 의식이 목함 깊은 곳에 도달했으면 혼돈이기에 의해 벌써 소멸되었을 것이야.”

    “그렇군요. 고마계의 천지법칙의 힘을 다룰 줄 알아야 이 보물을 부릴 수 있군요.”

    “헛된 꿈은 버리거라! 네가 우리 성족의 공법을 수련해 약간의 진마기를 부릴 줄 알아도 마공으로 성조의 경지에 이르지 않는 한 천계의 천지법칙과 소통할 수는 없을 테니까. 네가 정말 마공을 그 정도 경지까지 수련하면 영계가 너를 용납하지 못하고 성계에 떨어져 우리 성계의 일원이 될 것이다.”

    차기공이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한립이 한참을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선배님의 말씀 대로면 진마쇄는 정말 제게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내 말이 그 말이다. 게다가 아직 완성된 보물이 아니라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성조가 지닌다 해도 계륵과 다름없지.”

    “어떤 결함인지요?”

    “허허허, 그건 말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뜻대로 하시지요.”

    한립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지만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이에 노인이 웃음을 흘리며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네가 성심껏 답해주었으면 하는 질문이 있다. 인근에 ‘음양명지(陰陽冥池)’ 혹은 ‘황천지화(黃泉地火)’라 불리는 영지가 있더냐?”

    노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음양명지와 황천지화에 대해서는 어째서 물어보십니까?”

    한립은 바로 답하지 않고 신중히 반문했다.

    “정말 알고 싶은 것도 많구나! 일단 본 좌의 질문에 답이나 하거라!”

    녹포 노인의 얼굴이 굳어지며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이걸 제 다음 질문으로 치겠습니다.”

    그 말에 분노한 노인의 눈동자에서 강한 은빛이 터져 나왔다.

    “깜빡하신 것 같은데, 지금 저는 실체가 아니라 별 볼일 없는 화신입니다.”

    “네 본체가 내 앞에 있었어도 이런 거래를 할 자격은 못되었을 것이다.”

    노인이 어쩔 수 없이 노기를 가라앉히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 두 곳이 유일하게 진마쇄를 다시 제련할 수 있는 곳이다. 보물을 그 안에 넣고 성족 비술로 제련하면 혼돈이기를 얻을 수 있지. 성조들에게 혼돈이기는 제련하기 위해서도 스스로 흡수해 쓰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거든. 성계는 곳곳이 진마기로 넘쳐나서 영계에서나 그런 영지를 찾을 수 있다. 아마 그 때문에 혈광 녀석이 진마쇄를 품에서 떨어트려 놓았다 네게 빼앗긴 것이겠지.”

    “진마쇄를 그곳에 넣으면 혼돈이기를 추출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한립은 깜짝 놀랐다. 상고경전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혼돈음양이기는 범인에게도 불가사의한 효과가 있었다.

    “노부가 너를 속일 이유가 있더냐? 의식 화신을 응결할 정도면 너도 합체기 존재일 텐데 혼돈의 기운을 약간이라도 얻어 흡수하면 나중에 대승기에 이를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아니면 수행이라도 높아지겠지. 또한 혼돈이기로 제련하면 평범한 보물도 막대한 신통을 지닐 수 있다.”

    “수사의 이야기를 듣자니 혈광이라는 자도 성조 같은데 혼돈이기가 그렇게 중요하면 어째서 보물을 수하에게 내준 것입니까? 화신의 몸으로 직접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모습으로 강림할 때를 기다려 혼돈이기를 취해도 될 것을요.”

    “오랜 세월 이곳에 갇혀 있어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다른 성조들이 이미 그 놈이 진마쇄를 지니고 있다 의심하고 감시하고 있을 수도 있고 성계쪽 진신(眞身)에 무슨 문제가 생겨 영계에 강림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 성조급은 화신을 강림할 수 있지만 배척하는 힘을 두려워해 많은 이들이 실행에 옮기지는 않으니까. 성조들도 신통에 차이가 있고 혈광도 겨우 중간에나 될법한 급이니까. 그렇지, 진마쇄를 빼앗으며 죽였다는 존자들의 신통을 설명해 보거라!”

    몇 마디 대답을 해주던 노인이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질문을 했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죽였던 마존들의 신통이 이상하기는 했습니다. 한 명은 힘이 무척 세고 몸이 성조와 맞먹게 단단했고 다른 한 명은 보물을 통해 명계의 천귀를 불러냈습니다. 마지막 존자는 자모진마를 제련하는 법을 수련해서…….”

    기억을 더듬어 가며 한립은 각 존자들의 특이한 신통을 고했다.

    “그 중 한 명은 들어본 것 같다. 내가 이곳에 갇히기 전부터 명성이 있었고 당시에도 혈광 밑에 있었지. 혈광 녀석이 진마쇄를 맡긴 것이 분명하겠어.”

    “그렇다면 인근 지역에 강림해 마족을 통솔하는 자는 혈광성조겠습니다.”

    “노부의 판단이 틀리지 않다면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래서 인근에 황천지화나 음양명지가 있는 것이냐?”

    “이곳에서 두 달 거리에 있는 협곡에 황천지화가 있습니다. 음화(陰火)의 속성을 지닌 보물을 제련하는 데만 쓸모가 있어서 희귀하기는 해도 인족 수사들은 그리 중시하지 않는 곳이지요.”

    “으하하, 확실해! 혈광 그 녀석은 수하를 거기로 보내 진마쇄로 혼돈의 기운을 추출하려 한 것이다. 설마 네게 빼앗길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차기공은 혈광의 불행에 굉장히 즐거워했고 한립은 이런저런 생각에 침음했다.

    “너도 혼돈음양이기가 탐이 나는구나.”

    노인이 돌연 광소를 멈추고 냉랭히 물었다.

    “이런 좋은 기회가 생겼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요. 하지만 수사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흐흐, 내 너를 속여 무엇이 남는다고? 노부는 오랜 세월 이곳에 갇혀 13층 금제를 파훼해 왔기에 이제 세 겹만 남겨두고 있다. 진마쇄로 혼돈이기를 추출할 수 있으면 이곳을 벗어나 다시 진짜 하늘을 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 물론 노부도 너 같은 인족 수사가 공으로 이득을 보게 할 생각은 없다. 진마쇄를 제련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나를 위해 몇 가지 해줘야할 일이 있다.”

    “거래를 하자는 말씀이십니까?”

    한립이 뚫어져라 노인의 표정을 살폈다.

    “그래, 너도 혼돈음양이기를 얻고 싶지 않더냐?”

    “물론입니다. 하지만 선배님과의 거래는 심사숙고해 봐야할 문제 같군요!”

    한립의 몸이 갑자기 펑! 하고 터져 금빛으로 흩어졌다. 그것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던 차기공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의식을 그냥 불러들이다니 녀석이 혼돈이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단 말인가? 정말 그렇다면, 다음번에 나를 도와 이곳을 벗어나게 해줄 자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녹색 장포 노인의 눈빛이 음울하게 흔들렸다.

    * * *

    의천성 안. 한립의 육신 위에 금색 원영이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며 우윳빛 목함 속에서 빠져나온 금빛을 흡수했다.

    퍼퍼펑!

    주변의 오색 눈알들이 터져 분말로 변했다. 원영이 금빛으로 변해 육신으로 스며들고 한립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말없이 목함을 바라보았다.

    “진마쇄와 혼돈이기! 우연히 얻은 물건이 이런 비밀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허나 세상에 대가가 없는 일은 없겠지.”

    쉭! 하고 목함을 끌어온 한립이 궁리에 들어갔다.

    “이렇게 중요한 물건에 혈광선조가 분명 무슨 조취를 취해놓았을 것이다. 게다가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고!”

    그가 안색이 달라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밀실 안을 거닐었다. 걱정스런 표정이긴 했지만 겁먹은 얼굴은 아니었다. 혈광성조 본인이 아니라 겨우 화신이라면 이 넓은 영계에서 멀리 달아나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가 비록 신통에 자신이 있어도 마족 성조 등 대승기 수사들과 대적할 생각은 없었다.

    ‘수행이 늘어 합체 후기에 이른다면 현천의 보물과 다양한 신통에 힘입어 목숨은 보전할 수 있겠지만.’

    한립은 일다경 가량 고민하다 주문을 외며 목함으로 열손가락을 튕겼다.

    파앗.

    법결들이 금빛과 은빛으로 목함을 감싸고 크고 작은 금은색 주술문자로 변해 스며들었다.

    콰릉!

    한립은 주문을 멈추고 수결 모양을 바꾸어 손끝에서 금빛 뇌전들을 방출했다. 빼곡하게 튀어나온 뇌전이 그물을 이루어 목함을 겹겹이 감쌌다.

    천둥소리가 가시고 목함은 네모난 ‘금색 벽돌’처럼 변해 있었다. 그제야 한립은 마음을 놓고 금색 벽돌을 저물탁에 집어넣고는 밀실에서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되새겼다.

    ‘미완성의 현천의 보물! 신비한 액체가 진마쇄에도 효과가 있을까? 안에 마족 성조가 도사리고 있지 않았으면 시험해 보았을 텐데.’

    한립은 호기심을 억눌렀다. 다만 혈광성조가 수하들을 풀어 자신을 찾는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합체 후기 마존 네다섯 명에게 포위당하지 않는 한 문제없었다.

    혈광성조 화신은 평범한 합체 후기 존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겠지만 마군을 통솔해야하는 자라 쉽게 자신을 찾아다닐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혈광성조 화신이 직접 찾아 와도 현천의 보물을 지닌 그와 누가 이길지는 싸워봐야 알 일이었다.

    또한 수십 년 후 혈광성조가 진신으로 강림했을 때는 인요 양족이 모인 성도에서 무언가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 그때 천연성에 꽁꽁 숨어 있으면 혈광성조인들 어쩌겠는가.

    그는 생각을 정리하고 수련에 들어갔다.

    * * *

    한 달 후, 마족 대군이 주둔한 산골짜기에서 검은 거대 새 두 마리가 끄는 마차가 날아올랐다. 마차 안에 탄 남녀 고계 마족은 마기 속에서 무언가를 상의하고 있었다.

    “장 노괴가 우리를 갖고 노는 것은 아니겠죠. 역 존자를 죽인 인족 수사가 하필 의천성에 있다니요! 우리를 이용해 쉽게 의천성을 점령하려는 수가 아닌가 걱정 됩니다. 이전에 공격한 인족 거점을 멸하느라 꽤 고생했다고 들었어요.”

    “걱정 말거라. 장 노괴는 그저 차출되어 온 존자라 다루기 쉽지 않지만 이런 일에 거짓말을 할 작자는 아니다. 혈광 대인께서 직접 하명하신 일에 감이 어찌 그러겠느냐.”

    분홍 의복을 입은 미부인의 말에 은사 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하긴 우리도 역 존자 등이 죽은 곳을 찾아가 조사했지만 흉수가 흔적을 없애고 떠난 데다 오랜 시간이 흘러 쓸 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지요. 장 노괴가 정말 흉수를 찾아냈다면 다행일 것입니다. 저희도 대인께 면목이 서고요.”

    “그래, 대인께서 잃은 물건을 찾지 못하는 한 어차피 우리도 귀환할 수 없다. 그나마 이제 실마리를 찾았으니 전투를 준비해야 한다. 성족 존자 세 명을 죽인 인족 수사들을 상대할 때는 성조대인께서 빌려주신 보물이 있더라도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야. 또 의천성에 몸을 숨기고 있다면 불러내기 쉽지 않을 것이고.”

    “장 노괴가 우리의 힘을 빌려 의천성을 치려 한다면 그 정도는 알아서 해내겠죠. 그런 능력이 없다면 우리와 손을 잡을 자격이 되나요? 우리는 그저 흉수를 찾아 제거하면 그만입니다.”

    여인이 오만하게 말했다.

    “하하, 장 노괴 무리를 너무 얕보지 말거라! 장 노괴 본인은 합체 후기를 대성했고, 냉인 녀석은 나이는 어리지만 설천성조의 직계 후인이라 빙한(氷寒) 계열 신통으로 설천 대인의 찬사를 들은 적이 있는 자이다. 우 수사 또한 명라성조의 피를 이어받아 목숨을 부지할 강력한 신통을 한두 가지는 숨겨 놓았겠지. 가장 약한 것은 화원성(火元城) 출신 연 존자일 것이야.”

    중년 사내는 평온한 말투로 의천성을 공격 중인 존자들의 실력을 정리했다.

    “그들이 우리의 힘을 빌리려 한다면 우리도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사형, 어서 가죠! 얼마 안 남았으니 그들도 우리가 곧 도착할 것을 알고 있을 거예요.”

    미부인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을 때 멀리 산골짜기 상공에서 검은 마운이 갈라지고 북소리가 들려왔다.

    흑갑 병사들이 마운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빠져나왔고 맨 앞에 흑갑 거한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장 노괴 바로 뒤로 냉인, 우 여인 그리고 홍갑 거인이 뒤따랐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렇게 빨리 도착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장 노괴가 웃으며 멀리서 남녀를 향해 포권을 했다.

    “소식을 듣고 밤낮 없이 길을 재촉했지요. 보아하니 수사 분들의 계획에 지장이 가지는 않겠습니다.”

    미부인이 빙긋 미소 지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허나 의천성을 공격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들어가서 차차 이야기 나누시지요.”

    장 노괴가 팔을 뻗어 골짜기 쪽을 가리켰다.

    “좋습니다. 저희도 수사께서 어찌 의천성에 있는 흉수를 찾아냈는지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중년 사내가 상대를 훑어보며 웃는 얼굴로 답했다. 그들은 검은 마차에서 내려 두 거대 조류를 끌고 골짜기 쪽으로 날아갔다.

    이후 흑갑 거한과 음양이살 등 마족의 최정상급 존재들은 골짜기의 대전에서 반나절 정도 머물렀다. 장 노괴와 중년 남녀가 대전을 나설 때에는 서로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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