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6화. 진마쇄(鎭魔鎖)
*
한립은 또 다른 오색 구슬을 불러내고는 이상한 고대 문자를 중얼거렸다.
파앗.
다른 손으로 머리를 내려치자 전라의 금색 원영이 떠올라 똑같이 괴이한 주문을 외웠다. 주변의 오색 눈알들이 손바닥 크기의 오색 빛기둥을 원영으로 쏘아 보냈다. 동시에 금색 원영은 법결을 맺어 본체가 들고 있는 구슬을 가리켰다.
금빛 환영이 원영에서 빠져나와 구슬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구슬 속에는 희미하게 원영의 그림자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원영이 작은 손으로 오색 구슬을 가리켰다.
쉭!
광채를 머금은 구슬이 빛으로 변해 땅에 놓인 목함 속으로 스며들었다.
* * *
잿빛 공간에 오색 광채가 반짝이고 모호한 인영이 나타났다. 이목구비는 흐릿했는데 복색으로 보아 한립이었다. 그는 남색빛이 어른거리는 눈으로 연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흠, 수미공간이라기 보다는 환술금제 같아 보이는데? 설마 분혼이 목함 금제를 뚫지 못하고 어딘가에 갇힌 것은 아니겠지.”
허상은 한립의 의식 한줄기가 임시로 화신의 모습을 취한 것이었다. 이종족 비술을 이용해 13층 상고 금제 속을 살피려 목함 속에 불어넣었는데 이 공간은 조금 의외였다.
그러나 한립은 놀라긴 했어도 두렵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겨우 의식 한 줄기가 사라지는 것이라 본체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그는 주변을 관찰하고는 신형을 날려 날아갔다. 회색 안개를 따라 몇 시진을 날아가도 주변의 풍경은 시종일관 똑같았다. 이에 한립은 둔광을 멈추고 잠시 고민하다 이번에는 수직으로 치솟았다.
반나절을 고공으로 날아올랐는데 옅은 회색 안개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다시 멈춰선 한립은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다 어딘가를 주시했다.
“누가 숨어 계신지 모르겠지만 나와 보시지요!”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을 본 한립은 냉소하며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튼 채 수결을 맺었다.
그는 반나절 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는데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파앗.
그가 이곳에 들어온 지 이틀째 되었을 때 허공 어딘가에 초록빛이 맺히고 어두운 녹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수척한 얼굴에 기다란 눈썹을 지닌 노인은 노란 나무 비녀로 머리를 올리고 있었다. 장포에 삼두육비의 흉악한 마물 형상이 수놓아져 있는 것이 특이했다.
“…….”
노인은 모습을 드러내놓고도 다가오지 않고 냉랭한 시선으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한립도 마치 노인이 나타난 것을 모르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청년과 노인은 대치했고, 삼일 밤낮이 흐른 후에도 그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노인의 회백색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고, 한립을 보는 표정에 놀란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서너 시진이 더 흘러 노인의 눈알은 더욱 분명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눈에 기이한 은빛을 반짝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져 한립과 가까운 곳에서 나타났다.
그럼에도 한립은 꿈쩍도 하지 않자 노인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노부 면전에서 그러고 앉아 있다니 담도 크구나.”
드디어 입을 연 노인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어투를 들으니 신분이 있는 분 같습니다. 제가 어찌 불러드리면 되겠습니까?”
한립은 천천히 눈을 뜨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문했다.
“겨우 인족 수사 따위가 노부의 이름은 알 것 없다. 다만 의식 화신이 여기까지 숨어들어온 것이 의외로구나! 아마 이 물건이 네 본체의 수중에 들어간 모양이지.”
노인은 한눈에 한립이 본체가 아닌 것을 알아보았다.
“하하, 수사께서는 고마계 분이신 듯합니다. 제가 목함을 손에 넣어 의식을 이용해 내부를 살피는 중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목함 속이 아니라 아마 모종의 금제 안이겠지요.”
한립은 이미 상대가 마족인 것을 예상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 이곳은 목함 속이 아니라 10층으로 이뤄진 금제 속이다. 중요한 몇 가지 환술을 파악하면 이곳 환경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지. 그런데 인족이 이 보물을 차지하게 하다니. 요즘 성족들은 정말 무능하가 보구나! 네 말을 들어보니 보물의 모양도 목함의 형태를 띠는 듯하고. 하긴, 이전보다 훨씬 눈에 안 띄기는 하겠어.”
미간에 주름이 깊어진 노인이 중얼거리다 한쪽 소매를 펄럭였다. 그러자 한립은 눈앞이 밝아지며 회색 안개로 가득 찬 풍경이 깨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풀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희미하게 개울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흠칫 놀라 서둘러 주위를 살피는데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쪽빛 하늘에 걸린 하얀 구름과 푸른 산과 녹음이 파릇파릇한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과 그는 시냇물이 흐르는 개울가에 서있었는데 그리 깊지 않아 종아리까지 밖에 오지 않았다. 그의 옆으로 손바닥만 한 푸른 물고기 몇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한립은 개울 속에 손을 넣어보았다.
찰랑!
푸른 물고기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와 퍼덕거렸다. 감촉이 매끄럽고 물고기 특유의 서늘함이 전해졌다.
“훌륭한 금제입니다. 그런데 수사는 어째서 이곳에 계시는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펼친 비술의 효과면 의식이 바로 목함 안으로 들어갔어야 하는데 이곳에 갇힌 것도 당신과 연관이 있겠지요?”
“노부가 어째서 알려줘야 하지?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스스로 알아 내거라.”
녹색 장포 노인은 한립의 말에 눈을 부라렸다.
“하하, 수사도 저와 이런 한담을 나누고자 모습을 드러내셨을 리 없다는 것을 압니다. 수사도 실체를 지니지 않은 것 같은데 이곳에 스스로 원해서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닐 테고요.”
“넌 정체가 무엇이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지. 혈광 그 소인배가 보낸 자더냐!”
갑자기 한립의 귓가에 괴성이 울리고 모골이 송연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은색 눈동자가 핏빛으로 변한 노인은 그의 목을 틀어쥐고 사납게 소리쳤다.
만황흉수에게서 느껴지던 포악한 기운과 함께 노인의 등 뒤로 거대한 핏빛 마물 환영이 어른거렸다.
“전 혈광이란 자는 모릅니다.”
한립은 내심 화들짝 놀랐지만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헛소리! 혈광 그 자식을 모르고 어찌 진마쇄(鎭魔鎖)를 손에 넣을 수 있더냐! 노부가 네 거짓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예로부터 진마쇄를 지닌 성조들은 항시 몸에 지니고 다녔다. 설마 네가 혈광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라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노인은 광기 어린 표정으로 뱉어내고는 한립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에서 초록빛이 실처럼 새어나와 언제라도 해를 입힐 것 같았다.
의식 화신에 불과한 한립은 대항할 방법이 없었기에 힘을 풀고 미소를 머금었다.
“이 물건의 이름이 ‘진마쇄’였습니까? 혈광이란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인족 수사인 제가 어찌 마족의 분부를 따르겠습니까. 게다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했으면 겨우 한 줄기 의식으로 이 안에 들어왔을 리도 없고요.
솔직히 이 화신이 어떻게 되어도 제 본체에는 별 지장이 없습니다. 제가 겁을 먹어 이 물건을 아무도 찾지 못하는 심연 같은데 던져두면 어떻게 될까요? 10만 년이고 100만 년이고 아무도 찾지 못하게 말입니다.”
“감히 노부를 위협해? 흐하하, 보아하니 정말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흠, 혈광 녀석이 보내지 않았다면 미안하게 되었다.”
그의 말에 노인의 눈에서 붉은 기운이 사라졌고 곧바로 한립을 놓아주었다.
“제 말을 믿으신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수사의 내력을 모르겠습니다.”
“물론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런데 네 예상대로 노부는 이곳에 오랜 세월 갇혀 있어서 바깥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단 말이지. 서로 한 가지씩 질문을 하도록 하자.”
녹색 장포 노인이 수염을 쓸어내렸다.
“공평한 거래입니다. 무엇이든 질문하시죠.”
한립은 잠시 침음하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넌 누구에게 진마쇄를 얻은 것이지?”
“마족의 존자들에게서 얻었습니다.”
“존자들이면 혈광 그 녀석의 수하란 말인가? 허나 어찌 이런 물건을 남에게 맡긴단 말인가…….”
노인이 이채를 띠며 생각에 잠겨 중얼거렸다.
“제가 답해드렸으니 당신의 이름을 말씀해 주시지요.”
“본 좌는 차기공이다. 너는 인족이면서 어찌 성족 존자를 마주쳤지? 설마 성계로 넘어온 것인가?”
“차기공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봅니다. 현재 고마계가 영계를 침략하는 시기라 어렵지 않게 마족 존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뭐라? 지금 성제(聖祭)가 벌어지고 있다고! 내가 그렇게 오랜 세월 이곳에 갇혀 있었다니, 성제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지? 초기라면 혈광 녀석도 직접 이곳에 강림할 수 없었을 것인데. 그래서 진마쇄를 남에게 맡긴 것인가!”
“그건 다음 질문이겠지요?”
한립은 ‘성제’라는 낯선 단어를 기억해 두었다.
“좋다, 네가 먼저 질문해 보거라.”
노인은 잠시 얼굴을 찡그렸다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화를 가라앉혔다.
“제 다음 질문은 간단합니다. 당신은 고마계의 성조 중 한 분이십니까?”
“다 짐작하고 있으면서 굳이 왜 묻는 거지? 노부는 성계의 성조일 뿐 아니라, 성계에서 가장 오래 살아온 성조들 중 하나다. 나와 비슷한 연배는 성계에서도 서넛 밖에 되지 않을 게야.”
녹색 장포 사내가 냉랭히 말했다.
“아, 그러셨군요. 제가 몰라 뵙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한립은 가볍게 웃었다. 상대의 거만한 말투와 이곳에서 펼친 놀라운 신통을 생각하면 놀라울 것도 없는 대답이었다.
“뭐가 좋다고 웃는 것이냐. 성조인 노부가 이곳에 갇혀 있는 것이 웃겨 죽겠다 이것이냐?”
돌연 차기공이 표정을 굳히며 눈빛이 사나워졌다.
“감히 그럴 리가요. 선배님처럼 강력한 신통과 연륜을 지닌 분을 비웃을 자는 없을 것입니다.”
“노부가 성계 성조라는 것을 알고도 천하태평이구나. 내가 네 의식 화신을 잡아먹지 못할 거라 여기는 것이냐?”
“선배님께서 저를 해치려 했으면 진작 그러셨겠지요.”
“나름 머리는 있는 녀석이구나. 이곳에 갇히기 전이었다면 너 같은 인족 수사는 보자마자 일격에 죽였을 텐데……. 되었고, 이제 노부가 물을 차례다. 성제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되었지? 성조들은 아직 강림하지 못했겠지?”
냉정을 되찾은 차기공이 다시 물었다.
“예, 마겁이 도래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성조들이 실제 모습으로 강림하기는 불가능한 때지요.”
“역시!”
흥분한 얼굴로 차기공은 무언가를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립이 노인의 마음까지 고려할 이유는 없었다.
“진마쇄의 용도를 알고 싶습니다.”
“진마쇄는 너희 인족들이 부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알아봐야 쓸데없다는 소리지.”
움찔한 노인이 비웃는 기색으로 한립을 훑었다.
“쓸데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스스로 판단하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주겠다. 진마쇄는 혼돈음양이기(混沌陰陽二氣)를 함유한 미완성의 현천의 보물이다. 스스로 공간을 지니고 있고 성계에서 진법에 정통한 대종사가 첨가한 13개의 상고 금제가 더해진 보물이지. 누군가 이 안에 갇히면 스스로 혼돈이기를 없애지 않고서는 13층 금제를 수도 없이 때려 부숴도 달아날 수 없다. 제련을 마쳐 진정한 현천의 보물로 거듭나면 천상의 진선도 가둘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미완성이라도 인족 대승기 수사나 나와 같은 성계 존재를 가두기에는 충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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