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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25화 (882/2,000)
  • 1125화. 성조의 후인

    *

    “혈혼부 배양이 끝나간다는 것은 희소식입니다. 은광 선자와 한 수사가 와주었으니 얼마간은 그럭저럭 버티겠지요. 마족들은 우리도 오양화월의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청룡상인이 얼굴을 풀고 밝게 웃었다.

    “그 괴물의 힘이면 최악의 사태가 벌어져도 우리와 마족 모두 양패구상할 겁니다. 전세가 아주 기울어지면 핵심 제자들을 이끌고 즉시 천연성으로 달아나는 것으로 하지요. 구차하게 연명을 하더라도 핵심 제자들이 살아남으면 종문의 맥은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양화월의 날이 오기 전 수사께서 성 안의 물자와 심복들을 모아 주십시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파운사(破雲梭)를 이용해 성을 떠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있는 힘껏 마존들을 막으면 그들은 무사히 달아날 수 있을 겁니다.”

    임란 선자가 세밀하게 안배를 하고는 다시 한 번 당부를 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너무 일찍 유명을 달리한 황 수사와 열 수사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들만 있었어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요…….”

    “마족들이 그렇게 교활하게 나올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간 넷이서 공들여 준비한 사상번천진법(四象翻天陣法)을 펼쳤으면 마족 존자들과 충분히 겨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하아, 아무튼 대략적인 대책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태상장로를 잃은 두 종문의 수사들의 동요가 심한데 임 선자께서 관심을 좀 기울여 주시지요. 네 종문이 수만 년에 걸쳐 제련해온 청동괴뢰들을 수리할 재료들도 거둬야하고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가륜전마를 상대하려면 우리 쪽에서도 정예병을 내보내야 할 텐데요. 청동괴뢰만으로 가륜전마를 막는 것은 무리…….”

    청룡상인과 임란 선자는 세부적인 사항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여인의 수행이 청룡상인보다 약간 낮았지만 종문 업무는 임란 선자가 주도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편이었다.

    그 시각, 멀리 마기로 뒤덮인 거대 산골짜기 속에서 네 마족 존자들도 모여 있었다. 그 중 흑갑 거한은 거들먹거리며 상석에 앉아 있었고 백표 소년은 문가의 돌기둥에 기대 무표정하게 서있었다.

    나머지 두 마족은 절색의 여인과 붉은 갑옷을 걸친 거인이었다.

    “역 존자를 비롯한 세 명이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했단 말입니까? 게다가 우리더러 의천성 공격을 멈추고 이 일을 조사하라고요?”

    방금 전 흑갑 거한의 말을 들은 홍갑(紅甲) 거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목소리를 낮추었음에도 대청이 쩌렁쩌렁 울려 나머지 마족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장 형, 이게 사실입니까? 저희를 데리고 농을 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작고 여린 체구의 여인이 의심스럽다는 듯 확인했다.

    “저도 전투에서 돌아오자마자 혈광대인께 직접 들은 명령입니다. 그게 가짜겠습니까? 대인께서 항상 데리고 다니시는 음양이살(陰陽二殺)도 파견하셨다니 한 달 후면 합류할 겁니다. 역 존자 등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혈광 대인께서 맡기신 중요한 물건이 사라진 듯싶습니다.”

    흑갑 거한이 음침하게 대답했다.

    “음양이살까지 나선 것을 보면 확실히 중요한 물건이기는 한가보네요. 장 형은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아십니까?”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조대인께서 따로 하신 말씀은 없습니다. 음양이살이 오면 그들에게 알아보던가 하세요.”

    “하하하, 성조대인께서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데 무슨 배짱으로 캐고 다니겠습니까. 그저 의천성 함락이 코앞인데 포기하자니 내키지가 않아 그럽니다.”

    흑갑 거한이 고개를 젓자 여린 여인이 눈을 깜빡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합체 초기의 여인은 합체 후기를 대성한 거한을 앞에 두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포기가 아니라 잠시 기다리다 오양화월의 날에 총공격을 할 예정입니다. 의천성에 나타난 새로운 인물들이 제법 실력이 있어 괜히 병사들을 보내 소란을 떨어봐야 별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음양이살이 총공격에 힘을 보태주면 일이 더욱 수월하게 풀릴 겁니다.”

    흑갑 거한이 꿈쩍 않고 자신의 할 말만 했다.

    “음양이살이 참전하면 의천성을 함락하는 것이 쉬워지기는 하겠네요. 그런데 장 형의 어투로 보아 이미 새로 나타난 인족 수사들과 겨뤄보셨나 봅니다. 그들의 신통이 어떤지 저희에게도 이야기해 주시지요.”

    “나뿐만 아니라 냉인도 손속을 겨뤄봤습니다.”

    그 말에 흑갑 거한이 미간을 좁히며 마지못해 답했다.

    “냉 형께서도 인족 지원병과 마주쳤다고요? 그들의 실력은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홍갑 거인이 윙윙 울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초기 한 명, 중기 한 명. 하나는 강하고 하나는 약합니다.”

    떠드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는지 백색 장포 소년이 뜸을 들이다 짤막하게 답했다.

    “냉 수사, 성의 있게 좀 이야기해 주세요. 설천(雪天) 성조의 직계 후인인 수사의 신통이 동급 수사를 월등히 초월해 그저 약하다 강하다로는 정확한 실력이 가늠되지 않습니다.”

    여린 여인이 입을 가리고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한 명은 당신만 못하고 나머지는 당신을 죽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이제 됐습니까?”

    표정 없는 소년의 말에 여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모욕적이라 느꼈는지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중이었다.

    “우 선자도 이전 명라대인의 방계 후인 중 한 명인데 그 말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홍갑 거인의 눈두덩에서 불길이 일었다.

    “내 생각을 말했을 뿐입니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백색 장포 소년은 무뚝뚝하게 답했고 홍갑 거인과 여린 여인이 할 말을 잃었다.

    “흐음. 냉 수사의 말이 조금 거슬리는 면이 있지만 그날 본 수사들 중 하나는 확실히 범상치 않았습니다. 적어도 육체 강도에서 나와 맞먹었고 괴력을 발휘해 만중일기대금나(万重一氣大擒拿)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냈으니까요. 약간이지만 법칙의 힘을 머금고 있어 산을 옮기고 바다를 뒤집을만한 위력을 지닌 공격입니다.”

    흑갑 수사가 소년의 말투에 익숙한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렇게 강하다고요?”

    여린 여인이 얼른 표정을 풀었다. 흑갑 거한의 말에 정말 가슴이 철렁한 것이다.

    “냉 수사가 과장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인족 수사를 보았을 때 극히 위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도 격퇴시킬 자신이 없었기에 냉 수사와 그냥 돌아온 것이니 두 분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흑갑 거한이 진지하게 충고했다.

    “충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마주칠 일이 있다면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군요.”

    여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눈빛에 승부욕이 어렸다. 흑갑 거한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무어라 하려는데 홍갑 거인의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강한 인족 수사라면 역 존자 등의 죽음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흑갑 거한과 여린 여인이 무의식중에 눈길을 마주쳤고 무표정한 백포 소년의 얼굴에도 희미하게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연 마존의 추측이 그럴싸합니다. 두 인족 수사가 나타난 시기를 따져보면 역 존자 등과 마주쳤을 가능성이 있어요. 정말 그렇다면 그 자의 실력이 예상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다른 마존의 도움을 받아 역 존자 등을 이길 수는 있어도 그 자리에서 죽일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으니까요.”

    흑갑 거한이 심사숙고한 끝에 의견을 밝혔다.

    “이게 사실이면 강적이네요! 음양이살이 도와도 그 자를 전장에서 붙잡아 두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만한 실력자가 달아나려고 마음을 먹으면 성조대인께서 직접 나서지 않는 이상 우리는 막을 수 없을 거예요.”

    여린 여인도 중얼거리며 우려를 표했다.

    “의천성 전투에 그 자가 참전하면 큰 변수가 될 수 있겠습니다.”

    흑갑 거한의 표정이 심각해지며 말했다. 그 말에 대청 안이 일순 고요해졌는데 여린 여인이 갑작스런 제안을 해왔다.

    “흥, 정 안 되면 ‘그 방법’을 이용해 상대하죠. 그 자를 유인할 수만 있으면 날개가 달려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지난번 인족 합체기 수사 두 명도 그렇게 죽였잖아요?”

    “그건 안 됩니다. 일전에 그 방법을 쓰느라 만상마기 천여 명과 가륜전마 열댓 명을 잃었습니다. 성족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정예들을 그렇게 쉽게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홍갑 거인이 놀라 대청이 꽝꽝 울리게 반대를 했다.

    “하지만 그 자가 달아나면 이후에 더 많은 성족 사상자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혈광대인께서 찾는 자라면 임무에 실패한 우리가 책임을 져야할 것이고요.”

    흑갑 거한이 냉소하며 반박했다.

    “제가 방금 한 말은 그저 추측에 불과합니다. 솔직히 이 넓디넓은 땅에서 그 자가 역 존마 등과 마주쳤을 확률이 높지도 않고요.”

    홍갑 거인이 눈 속의 화염을 응축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조사해보면 알겠지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준비를 해두고 아니면 그 방법을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요.”

    고민하던 흑갑 거한이 말했다.

    “장 형,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십니까?”

    “화낼 것 없습니다, 우 선자! 음양이살이 약하지는 않아도 둘이 협공해야 노부와 엇비슷한 실력을 내는 정도입니다. 성조대인이 그들을 보내 역 존자 등 을 죽인 흉수를 쫓게 했을 때는 무언가를 준비해 주셨겠지요.”

    여린 여인의 불쾌한 기색에 흑갑 거한이 화내지 않고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제 생각에도 장 형의 말씀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혈광대인께서 준비하신 방책이 있을 텐데 우리가 걱정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홍갑 거인이 안심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냉 형 생각은 어떠세요?”

    여린 여인이 그래도 아쉬운 지 고개를 돌려 백포 소년에게 물었다.

    “어떤 수단을 쓰든 그 자의 생명은 내가 끊어놓겠습니다. 그 자가 지닌 기이한 한기가 내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상관없는데……. 장 형의 의견을 모르겠네요?”

    서늘한 백색 장포 소년의 말에 여린 여인이 멈칫했다.

    “냉 수사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하지만 그 자가 지닌 보물의 절반은 내가 가질 겁니다. 나머지 절반을 우 선자와 연 형이 나누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난 그 인족 수사가 지닌 한기면 됩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하십시오.”

    “저와 연 수사도 괜찮습니다.”

    흑갑 거한의 제안에 백색 장포 소년과 여린 여인이 대답했다. 홍갑 거인은 여인이 자신을 대신해 대답했는데도 전혀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병사들을 파견해 역 존자 등이 변을 당한 곳을 조사하고 음양이살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오양화월의 날 전에 의천성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니 그 후에 자세한 계획을 논의하지요.”

    흑갑 거한이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렸다.

    * * *

    의천성 안, 한적한 대나무 숲에 세워진 누각에서 한립은 겹겹이 금제를 펼쳐놓고 우윳빛 목함을 살펴보고 있었다. 대머리 마족을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 괴이한 금제로 봉인되어 있어 의천성에 들어와서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목함 속에는 차가운 기운과 뜨거운 기운이 번갈아 새어나왔고 의식을 차단하는 위력이 대단했다. 한립은 눈에 폭발적으로 남색빛을 일으키고 목함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바로 영목신통을 거두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3일의 시간이 흘러갔다. 나날이 한립의 얼굴은 핼쑥해졌고 눈동자 깊은 곳의 남색빛은 어둑해졌다.

    일다경을 더 버틴 그의 표정이 괴이하게 변하며 영목신통을 거두었다.

    “흥미롭구나. 목함 자체가 13종류의 상고 금제로 봉인된 수미(須彌)의 보물이었다니! 명청령안을 극성으로 발휘해 이렇게 오래 연구하지 않았다면 실마리도 찾지 못했을 것이야. 그런데 금제가 너무 강력해서 수백 년 동안 하나씩 파훼하지 않고는 열어볼 수 없겠어.”

    대머리 마족이 펼쳤다고 볼 수 없는 수준의 금제들이어서 한립은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그는 목함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 채 한식경 만에 방법을 생각해냈다.

    “봉인은 못 풀어도 이종족 비술을 활용하면 안을 엿볼 수는 있겠지. 허나 만일 안에 위험한 것이 봉인되어 있으면 일이 성가실 것인데…….”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하던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빙긋 웃었다.

    “무엇을 만나더라도 어차피 의식 한 줄기인데, 기꺼해야 보름만 정좌를 하고 요양하면 회복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렇게 강력한 봉인으로 감춰놓은 것이니 위험을 감수할 만해.”

    그는 결정을 내리고 주저 없이 소매를 털어 열댓 개의 오색 구슬을 방출했다. 희미하게 오색 눈동자가 들어있는 구슬들은 기이한 빛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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