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3화. 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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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성벽 위의 인족 역사들도 들고 있던 무기의 위력이 다해 후퇴하고 있었다. 그 대신 네 가지 색의 전투복을 입은 인족 수사들이 나타나 다양한 법기를 발동했다. 오색 빛의 공격이 성벽 위에서 쏟아져 내려 저계 마수대군을 공격했다.
인족 수사들이 쓰는 법기의 위력이 역사들 것보다 셌기에 새까맣게 몰려들던 저계 마수들은 금방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만상마기들은 초대형 마수와 저계 마수대군의 죽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검은 구름을 부풀려가며 무언가에 열중해 있었다.
성벽 위 인족 수사들이 그것을 보고 고계 수사의 명령에 맞추어 법기의 방향을 틀었다. 요란한 빛들이 하늘 위에 뜬 별처럼 검은 구름을 강타했다.
퍼퍼퍼퍼펑!
요동치는 마운(魔雲) 속에서 검은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와 새까만 진법을 형성해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마운 속의 마족 기병들이 돌연 검은 장도를 응결해 휘둘렀고 십만 여개의 인족 법기가 검은빛을 맞고 터져나갔다.
법기들이 터질 때마다 폭죽처럼 아름다운 빛이 흩날렸다. 마족 기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거대한 진법 속으로 검은 장도를 던졌다.
우웅!
진밥 가운데에서 새까만 장도가 응결되어 의천성을 향해 날아들었다. 검은빛이 좌르르 흐르는 장도에서 검은 천들이 떨어져 내렸다. 어마어마한 영기의 압력에 놀란 인족 수사들은 우왕좌왕하며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검은 천이 번득일 때마다 인족 수사들은 핏물덩이가 되었고 성벽은 잘려나갔다. 거의 만 여명의 수사들이 일격에 몰살당했다.
그 모습에 성벽 위의 인족 수사들은 이를 악물고 맹공을 퍼붓기도 했고, 누군가는 허겁지겁 방어 법기를 방출해 목숨을 부지하려 들었다.
허공의 진법은 검은 거대 장도를 만들어내고 스스로 검은빛의 점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휘이익!
마족 전함에서 서늘한 휘파람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마운(魔雲) 속 기병들은 타고 있던 마수들을 조종해 튀어나갔다.
먼 거리를 단숨에 좁힌 기병들은 인족 수사들의 공격을 대부분 튕겨 냈다. 한 번에 여러 법기들에 공격당한 기병만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을 뿐이었다.
만상마기들이 의천성 성벽 앞에 몰려들어 병장기를 미친 듯이 휘둘러 댔고, 기병들이 탄 마수들도 입에서 불기둥을 뿜거나 뿔을 이용해 바람의 칼날을 날리는 등 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수많은 만상마기들의 공격에 의천성 보호막이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저계 인족 수사들의 법기로는 그들을 막기 어려웠다. 인족의 거대 토석괴뢰들도 이전 공격에서 힘을 다 써서 그런지 원래의 누각 형태로 돌아가 있었다.
그 중 거대 누각에서 맑은 울음소리가 울리며 공간 파동이 일었다. 수천 명의 인족 수사들이 그 주변에 나타나 누각을 중심으로 진열을 갖추고 주문을 외워댔다.
그러자 영력을 머금은 오색 법결들이 누각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에 호응하듯 의천성 성벽 밖 땅이 흔들리고 커다란 청동인간들이 솟아올랐다.
청동인(靑銅人)들은 장창을 거머쥐거나 등 뒤에 화살을 메고 있었는데 이름 모를 청동 영수나 청동 전차를 타고 마족 기병들을 향해 쇄도했다.
전함 속 마족의 우두머리가 그것을 보고 움찔하다 다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수만 마족 기병들이 눈을 부릅뜨고 청동괴뢰 대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만상마기들의 기세는 대단히 흉흉했다.
청동괴뢰와 마족 기병들이 엉켜들어 혼전을 벌였다.
그동안 밝은 둔광들이 의천성 성벽을 넘어 전투에 뛰어들었는데 수천에 이르는 고계 인족 수사들이었다.
인족의 청동괴뢰대군은 만상마군의 적수가 아니었지만 고계 수사들의 지원에 대치 상태를 이룰 수 있었고 성벽 위에서 저계 수사들이 죽어라 날리는 공격 덕에 승기를 잡는 듯 보였다.
괴이한 일은 멀리 거대 전함에 탄 마족 우두머리가 주위의 가륜전마들은 참전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시진이 흘러 만상마기와 인족대군 모두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때 전장에 징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족 기병들은 그것을 듣고 주저 없이 진형을 유지하며 퇴각했다.
멀리서 가륜전마들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기에 인족 고계 수사들도 섣불리 쫓아가지 않았고 청동괴뢰대군도 의천성 근방을 벗어나지 않았다.
퇴각한 기병들을 태운 전함들이 마지막으로 가륜전마까지 불러들이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수많은 마족 전함이 승승장구하다 갑자기 물러난 것이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한립과 은광 선자가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 이상하네요. 가륜전마들만 내보내도 완벽하게 승기를 잡을 수 있을 테고 거기에 마족 존자들이 나서면 성을 함락하는 것도 가능할 텐데요.”
“이렇게 많은 마족 정예들이 나타났다면 마족 존자들의 수도 꽤 되었을 겁니다. 이미 두 명의 태상장로를 잃은 의천성은 합체기 수사가 둘뿐이고요. 아마 의천성에 아직 강력한 방어 수단이 남아 있고 마족은 그것을 꺼려 전력으로 밀어붙이지 않는 듯싶습니다.”
침음하던 한립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네요. 그렇다면 우리도 큰 걱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건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의천성의 방어수단이 강력해도 마족 대군을 막기에는 미흡하기에 천연성에 도움을 청한 것 아니겠습니까. 구체적인 상황은 성 안으로 들어가 알아봐야 알 것입니다.”
“그래야겠죠! 마족대군이 철수하며 감시할 병사들을 남겨 놓겠지만 우리를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서둘러 성으로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저와 천황종 임란 선자는 오랜 벗이라 무사한지 걱정이 됩니다.”
“알겠습니다. 확실히 지금이 성 안으로 진입할 적기 같으니 가시지요!”
은광 선자의 말에 멀리 의천성을 바라보던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두 줄기 둔광으로 변해 의천성으로 날아갔다.
푸른색과 흰색 둔광이 밝은 빛을 머금고 하늘을 가르는 모습이 인족 고계수사들의 주의를 끌었다. 강력한 의식을 지닌 연허급 수사들은 둔광 속 존재의 수행을 눈치 채고 소란스러워졌다.
빠른 속도로 의천성 인근에 이른 한립과 은광 선자의 귀에 호의적이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도 기어 나오는 구나!”
주변 천지원기가 심상치 않게 움직이고 거대 손이 나타났다. 날카로운 손톱 끝에 짙은 녹색 화염이 휘날렸다.
“이런, 마족 존자가 매복해 있었습니다.”
은광 선자의 두 소매에서 한 쌍의 은색 갈고리가 날아올라 하얀 초승달과 새빨간 태양으로 변해 거대 손을 공격했다. 그리고 한립은 즉시 금빛 찬란한 두 주먹을 날렸다.
굉음이 터지고 다양한 영기의 빛이 충돌해 주변으로 여파가 퍼졌다.
대승기 존재와 맞먹는 괴력을 지닌 한립도 뒤쪽으로 물러섰을 정도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땅을 쿵쿵 찧으며 여덟 걸음을 가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은광 선자 역시 보물로 몸을 보호하고서도 멀찍이 튕겨나가 비틀거렸고 한립도 검은 거대 손의 위력을 8할이나 막아냈는데도 여덟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러나 거대 손의 주인도 그들의 일격을 맞고 휘청거리며 허공에 나타났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의 인물을 살피려는데 뒤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순식간에 기습해왔다. 평범한 합체 중기 수사였다면 그 엄청난 한기에 꼼짝하지 못했겠지만 오색 한염을 지닌 한립은 빙한 속성 합체 수사보다 관련 기운을 다루는데 더욱 능숙했다.
한기는 한립의 장포 자락을 살짝 얼리는 것으로 효력을 다했는데 한립의 등 뒤에서 돌연 녹색 허상이 튀어나가 주먹을 날렸다.
펑!
녹색 주먹과 새하얀 비도가 맞부딪쳐 초록빛과 하얀 한기가 산산이 부서졌다. 튕겨나간 하얀 비도를 받은 것은 열대여섯 살로 보이는 마른 소년이었다. 새하얀 장포를 입은 소년은 얼음장 같은 얼굴로 한립을 훑어보았다.
녹색 허상은 한립과 똑같이 생긴 녹색 장포 청년이었는데 손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조금 전 새하얀 비도가 주먹을 잘라내서 생긴 상처였다.
녹색 피부 ‘한립’은 잘려나간 부위에 초록빛을 내뿜어 새 손을 만들어냈다.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보는데 원래 손과 다름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백포 소년이 그것을 보고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녹색 피부 ‘한립’은 합체기 영체였다. 기습받은 순간 영체를 불러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진짜 한립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백색 장포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적이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는데도 감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강력한 의식을 지닌 그에게 드문 일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굉음에 한립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서둘러 은광 선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은색 깃발을 꺼낸 여인은 검은 거대 손으로 습격했던 또 다른 마족과 싸우는 중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눈빛이 흔들리는 것이 부상을 입은 듯했다. 이전의 전투로 원기를 상한데다 또 강력한 상대를 만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슴이 서늘해진 한립은 여인과 싸우고 있는 마족을 올려다보았다. 머리에 핏빛 혹이 난 거한이 새까만 뼈 망치 한 쌍을 들고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립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흑갑 거한은 합체 후기를 대성한 마족이었고 강력한 공법을 익혔는지 음산한 기운이 풀풀 풍겼다.
“두 분도 마계에서 지위가 있는 분들일 텐데 비열하게 암습을 하다니요?”
은광 선자가 열 받은 목소리로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전장에서 적을 죽이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려야 하나? 흐하하하, 어린 계집이 멍청하기까지 하구나!”
혹 달린 거한이 쌍망치를 쾅 하고 부딪치며 광소했다.
“마족 존자들 중에서도 꽤 솜씨가 있는 분들 같은데 이름이나 들어봅시다.”
그들을 차분하게 관찰하며 한립이 입을 열었다.
“내 공격을 막아냈으니 이름 정도는 알고 죽어도 좋겠지. 노부는 성족 강골부(鋼骨部) 철륭이고 이쪽은 빙령부(氷靈部)의 비야다. 의천성을 도우러 온 지원병 같은데 너희의 이름을 밝혀라.”
철륭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마족 거한이 교활한 눈빛으로 물었다.
“저는 한 가인데 명성이랄 것도 없는 처지라 이름을 말씀드려도 잘 모르실 것입니다. 허나 기습도 실패한 마당에 정말 우리 둘을 어찌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립은 상대의 도발에도 빙긋 미소 지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의천성 방향에서 두 개의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합체기 수행을 드러낸 둔광이었다. 그것을 본 마족 거한의 표정이 달라져 백색 장포 소년을 향해 눈짓하고 먼저 검은 전차를 불러내 그 위에 탔다.
소년은 어느 순간 신형이 흐려지더니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소년이 다시 걸음을 뗐을 떼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마족 거한은 큰소리로 웃으며 검은 전차를 조종해 하늘 저편의 검은 점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한립은 그것을 지켜볼 뿐 전혀 쫓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은광 선자도 거한에게 쓴맛을 본 터라 무턱대고 움직이지 않았다.
마족 통솔자들의 실력이 그녀의 예상보다 강했고 이게 전부가 아닐 거라 짐작했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우리가 지원을 해도 의천성을 지키기 어려울 지도…….’
여인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한립은 차분한 얼굴로 의천성에서 날아든 둔광을 돌아보았다.
빛이 가시고 사내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듯한 인상의 사내는 노란 유생 복장을 하고 손에 두꺼운 옥으로 만든 서책을 들고 있었는데 등 뒤에 교차로 멘 금색과 은색의 커다란 붓이 눈길을 끌었다. 보라색 바구니를 든 암녹색 궁장 여인은 갸름한 얼굴이 제법 아름다웠다.
“임 선자, 무사하셨습니까? 소식을 듣고 제가 지원을 나왔습니다.”
은광 선자가 암녹색 궁장 여인을 보고 반갑게 외쳤다.
“은광 선자가 와주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처음 뵙는 데 누군지 알 수 있습니까?”
궁장 여인이 은광 선자를 알아보고 얼굴이 밝아졌다가 한립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허허, 이분은 한립 수사입니다. 구선산에서 뵙고 이렇게 다시 뵙습니다.”
황포 유생이 나서서 말했다.
“구성종(九星宗) 청룡상인이셨군요.”
한립은 안 그래도 유생의 얼굴이 낯익다고 생각하던 차에 상대의 신분을 떠올리고 포권을 했다. 구선산에서 오며가며 두세 번 본적은 있었지만 깊게 교분을 나눈 사이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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