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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22화 (879/2,000)
  • 1122화. 만상마기(万象魔騎)

    *

    한립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한 얼굴을 했으나 소매 속에서 우윳빛 목함을 숨겨두고 계속 만져보았다. 대머리 마족을 죽이고 얻어낸 전리품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명청령안으로도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자 호기심이 생겼다. 강력한 금제가 걸린 목함은 그의 능력과 진법 지식으로도 쉽게 열 수 없었다.

    목함을 쓰다듬는 손끝에서 순간 따듯한 느낌이 들다가 갑자기 차갑게 변했다. 한립은 놀라 더욱 목함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해졌다.

    파앗.

    그는 손가락을 튕겨 핏빛 부적들을 목함에 흡수시켰다. 이종족에게 배운 금제술을 이용해 목함에 자신만의 금제를 걸어둔 것이다. 그는 목함을 저물탁에 넣고는 이동하는 데만 집중했다.

    * * *

    그 시각, 아주 멀리 떨어진 삼각뿔 형태의 거탑. 마성(魔城)의 대청 안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이럴 수가! 존자 세 명을 보냈건만 이게 어찌 된 것이야! 이 쓸모없는 것들!”

    대청 상석에 앉은 핏빛 장포의 소년이 화가 나 몸을 떨었다. 영계에 강림했다는 혈광성조의 화신이었다. 그의 뒤에는 거대한 마물 그림자가 어렸는데 핏빛 몸에 머리에는 괴이한 뿔이 솟아 전신의 촉수들을 흔들어댔다.

    대청 안을 지키던 병사들은 그 무시무시한 기운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혈광성조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있던 고계 마족 두 명이 눈을 마주쳤다.

    “혈광 대인, 무슨 일로 그리 화를 내시는 것입니까?”

    커다란 은색 장포를 걸친 사내가 놀라 물었다.

    “수하 셋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을 들려 보냈는데 본 성조가 남겨 놓은 의식 한 줄기가 누군가의 비술로 단절되었다. 그놈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겠지.”

    혈광성조는 삽시간에 노기를 거두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마존 셋이 나섰으면 인족의 합체 후기 수사를 만났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인족 대승기 수사는 천여 년 전에 성계에 침입했다가 몇몇 성조 대인들의 협공에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리 쉽게 나서지는 않을 텐데요.”

    분홍색 의복을 입은 중년 부인이 말했다.

    “그들이 동시에 일을 당한 것도 이상하지만 소식이 새어나갔다면 누군가 보물을 노리고 나섰을 수도 있다. 여봐라, 신혼전(神魂殿)으로 가서 마존의 혼백 중 소멸된 것이 있는지 확인하라!”

    혈광성조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명을 내렸다.

    “예, 성조 대인!”

    흑갑 병사 중 하나가 얼른 대청을 나섰다. 혈광성조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생각에 잠기자 곁의 남녀 고계 수사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일다경이 흐르자 흑갑 병사의 발소리가 들려와 침묵이 깨졌다.

    “성조께 고합니다. 신혼전에서 마존 대인 세 명의 혼백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마족 병사는 바닥에 엎드려 서둘러 보고했다.

    “셋 다?”

    혈광성조가 눈을 번쩍 뜨고 쥐고 있던 의자 손잡이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예, 성조대인! 며칠 전 출타하신 남 존자 등 세 분 대인의 혼백이 사라졌습니다.”

    겁먹은 병사의 말에 혈광성조의 얼굴이 섬뜩하게 굳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은색 장포 사내와 미부인은 내심 깜짝 놀랐다.

    혈광성조는 그들이 죽은 것 때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보물 때문에 저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너희 둘은 당장 혈광정위 부대를 이끌고 출발해 그들이 사라진 곳으로 가라. 대승기 수사가 손을 썼다고 해도 어떤 흔적이라도 남아 있겠지. 그곳을 샅샅이 파헤쳐 반드시 어떤 놈의 짓인지 알아내야 할 것이야!”

    혈광성조가 곰곰이 생각하다 분부를 내렸다.

    “예, 혈광대인!”

    남녀 고계 마족이 허리를 굽혀 명을 받들었다. 반 시진 후, 수정 갑옷을 입은 마족 병사 백여 명이 삼각뿔 거탑에서 날아올랐다.

    * * *

    산을 등지고 호수를 낀 대형 인족 인근. 두 개의 둔광이 은밀하게 하늘을 가르고 이름 없는 산 위로 떨어졌다. 그들은 은색 장삼을 휘날리는 은광 선자와 푸른 장포의 한립이었다.

    한 달이 훌쩍 지나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의천성 방향을 바라보는 표정이 어두웠다.

    의천성 성벽 밖에는 만여 개의 검은 전함이 빽빽하게 떠있고 각종 마수(魔獸)를 탄 기병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안개에 둘러싸인 마수들은 평범한 저계 마수들과는 질적으로 달라보였다.

    “만상마기(万象魔騎)입니다. 과연 명불허전이군요. 마족들이 천연성은 저계 마수 대군으로 공격하면서 정예들은 주변을 소탕하는데 쓰고 있다는 정보가 사실이었습니다. 마족 기병들은 결단기나 원영기 수행을 지니고 있지만 마수와 비술로 공생관계를 맺은 후에는 몇 배나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인족 동급 수사는 적수가 되지 않고, 화신 연허기 수사도 대량의 만상마기들에게 포위당하면 달아날 수밖에 없다더군요. 게다가 협공에도 능해 만 명 이상이 거대한 진법을 펼치면 합체기 수사도 골치가 아프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만상마기가 족히 십만 명 이상은 되어 보이니 의천성의 상황이 위급할 만합니다.”

    은광 선자가 신중하게 판단을 내렸다.

    “그래도 가장 거슬리는 것은 만상마기들이 아니라 저들입니다.”

    한립이 손을 들어 새까만 전함에 모여 있는 병력을 가리켰다. 수량은 마족 기병들에 비해 얼마 되지 않았으나 머리가 셋에 팔이 여섯 개나 달려있었다.

    이런 마족들의 중간 머리는 아름다운 사내나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두 개의 머리는 포악하기 그지없었다.

    여섯 개의 손에는 다양한 병장기가 들려 있었고, 등 뒤로는 회색빛의 허상을 내뿜었는데 자세히 보면 흉악한 거대 마수 법상이었다. 이 괴이한 마족 병사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이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마족의 미치광이라 불리는 가륜전마(珈輪戰魔)들입니다. 몇 천 명이긴 하지만 의천성을 성가시게 하기에는 충분하겠습니다.”

    “의천성의 태상장로가 둘이나 죽어나간 것도 가륜전마들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가륜전마의 명성이야 자자하지요. 마족의 여러 정예 병력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두 수사도 저들에게 포위당해 다른 마족 존자들의 습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진짜 실력이 어떤지는 직접 싸워봐야 알 수 있겠지요.”

    “하하, 선자께서 원하신다면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빙긋 웃은 한립이 마족 대군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웅! 웅! 웅! 웅!

    검은 전함들이 거의 동시에 진동하며 의천성을 향해 무수히 많은 검은 빛기둥을 발사했다.

    쿠콰콰콰콰쾅!

    의천성 벽에서 다채로운 빛의 진법들이 떠올라 겹겹이 보호막을 형성하고 검은 빛기둥들을 막았다. 엄청난 폭음과 충돌로 인한 파동이 퍼져나갔다.

    잠시 후, 마족 전함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초대형 마수 백여 마리가 날아올랐다. 코뿔소처럼 생긴 초대형 마수는 씩씩거리며 성벽으로 돌진했다.

    동시에 각양각색의 저계 마수들도 전함에서 몰려나와 그 뒤를 쫓았다. 의천성 성벽 위로 무수히 많은 인족 역사(力士)들이 늘어서서 불덩이, 얼음송곳, 바람의 칼날 등을 비처럼 쏘아 보내며 마수들을 막았다.

    줄줄이 쏟아지는 공격에 저계 마수들은 피를 뿜거나 잿덩이 혹은 얼음덩이로 변해 죽어나갔다. 순식간에 마수 대군에서 만여 마리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초대형 코뿔소 마수들이 인족 역사들의 공격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두꺼운 보호막을 두르고 공격을 튕겨내며 코에 솟은 뿔로 허공을 들이받았다.

    쿠쿠쿠쿵!

    새까만 뿔에서 검은 광채가 번득이자 의천성 성벽 표면에 검은 파문이 나타나 보호막을 갈랐다.

    찌지직!

    진법이 만들어낸 보호막들이 검은 광채 앞에서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며 성벽이 길게 갈라졌다. 그 틈에 빠진 인족 역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 나갔고 검은 광채에 휩싸여 재로 변했다.

    그 모습에 다른 역사들이 두려움에 물러나려는데 머리 위로 노란 수정 구슬이 떠올라 노란 실을 방출했다. 노란 실은 달아나려는 인족 역사들의 목을 분리해 그 자리에서 죽였다.

    “전투 중에 달아나는 자,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음뿐이다. 최선을 다해 적을 섬멸하라!”

    서릿발 같은 매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핏빛 갑옷을 입은 원영기 수사들이 노란 구슬 옆에 나타났다. 집법수사들의 출현에 인족 역사들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영구를 이용해 공격을 퍼부었다.

    초대형 마수들도 보호막이 흔들거려 앞으로 더는 전진하기 못했다.

    성 안에서 들려온 현묘한 주술소리와 함께 성벽에 남색 기운이 맴돌았다. 남색 뇌전들이 튀어나와 거대한 뇌전 그물이 만들어지자 초대형 마수들과 주변의 저계 마수들을 덮쳤다.

    저계 마수들은 뇌전에 몸이 갈기갈기 찢겼고 초대형 마수들도 멀쩡하지 못했다. 거대한 뇌전 그물에서 남색 벼락이 떨어져 독사처럼 초대형 마수들을 물어뜯었다.

    초대형 마수들은 강력한 공격에 목숨을 잃기는커녕 도리어 난폭해졌다. 그들은 코에 솟은 검은 뿔로 허공을 쳐 검은 광채로 성벽을 직접 공격했다.

    콰르릉!

    성벽 몇 곳이 버티지 못하고 절반 정도 내려앉자 그 뒤에 숨어 있던 인족 역사들이 드러났다. 인족 역사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 크게 동요했지만 허공에 떠있는 집법 수사들과 진법 때문에 달아나지는 못했다.

    마족 대군의 거대 전함에서 살의가 담긴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인근에 대기 중이던 마족 기병들이 서늘하게 눈을 번득이고 소리 없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멀리서 보면 검은 바다가 출렁이며 복잡한 진법을 펼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족 기병들은 물론 그들이 탄 마수까지 대량의 검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우웅!

    검은 기운이 하늘을 뒤덮을 때, 몇몇 전함에서 보라색 빛기둥을 방출해 초대형 마수들에게 흡수시켰다. 중상을 입은 초대형 마수들은 놀랍게도 몸을 회복하고 두 눈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다시 돌진했다.

    인족 역사들의 공격에 주춤하던 저계 마수 대군이 초대형 마수들의 엄호를 받아 의천성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의천성 성벽에서 영기의 빛이 연달아 반짝이자 진법 법기와 깃발을 든 인족 수사들이 나타나 필사적으로 법보를 흔들어댔다.

    콰르르!

    그러자 다양한 빛깔의 거대한 벽돌이 고공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려 무너진 성벽을 메꾸었다.

    벽돌들이 빈자리를 메꾸자 수사들은 특수한 법결을 발동해 그것들을 빈틈없이 이었다. 완성된 성벽 위로 주술문자로 뒤덮인 거대한 누각들이 떠올랐다.

    주술문자들은 크고 작은 진법으로 변한 후 흙과 돌로 뭉쳐져 초대형 꼭두각시들로 변하였다. 외눈박이 거인들은 배 안이 움푹 파여 있었는데 그 안에 인족 수사 몇이 긴장된 얼굴로 기괴한 진법 법기를 들고서 있었다.

    쿵! 쿵!

    거인들은 땅을 박차고 성벽 상공에 올라 두 주먹을 교차했다. 그러자 차가운 바람 속에 남색빛의 점들이 나타나 응결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얼음 창들이 나타났고 거인들은 그것을 쥐고 사납게 내던졌다.

    휘휘휘휘휭!

    얼음 창들이 남색빛으로 변해 사라졌다가 의천성 성벽 앞에 이른 초대형 마수들 위로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얼음 창이 코뿔소들의 몸에 박혀 폭발했다. 특수한 신통을 지닌 창은 중상을 입고 막 회복한 초대형 마수들을 꽁꽁 얼려 빙산으로 변하게 했다.

    콰르릉 콰쾅!

    그때를 노리고 백여 줄기의 굵직한 붉은 뇌전들이 떨어져 빙상을 깨부수었다. 이에 초대형 마수들은 혼백도 달아나지 못하고 절명했다.

    의천성 안 토석괴뢰(土石傀儡) 체내의 밀실 안에서 인족 화신기 수사들이 긴장을 풀고 손에 들고 있던 주술문자가 적힌 새빨간 부적들을 내려놓았다. 부적들은 인족 수사들의 손을 떠나 빛을 잃고 푸른 연기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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