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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18화 (875/2,000)
  • 1118화. 삼마격전 (2)

    *

    핏빛 실이 검은 산을 날카롭게 파고들다 멈칫하더니 소실되었다. 그러나 한립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원자극산이 얼마나 단단한지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진귀한 재료로 몇 차례 제련한 후에는 웬만한 통천령보로도 상처를 낼 수 없었다.

    그런 원자극산을 거의 관통한 핏빛 실의 위력이 실로 대단했다.

    ‘내겐 별 것 아닌 공격이었지만 은광선자의 수행으로는 막을 수 없을 텐데.’

    한립이 얼른 은광선자 쪽을 살피는데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니 한 손으로 어깨를 움켜쥔 은광선자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녀 앞의 붉은 방패, 깃발 그리고 옥패가 세 겹의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전부 빛이 어두워진 것이 큰 손상을 입은 듯했다.

    은광선자는 잠시 고통스런 기색을 드러내다 입에서 은색 비검을 뿜었다. 비검은 뜻밖에도 그녀가 한 손으로 쥐고 있던 팔뚝을 잘라냈는데 상처부위에서 피 한 방울 떨어져 내리지 않았다.

    떨어져 나간 여인의 팔이 화륵! 붉은 화염에 휩싸여 재빨리 재로 변했다.

    “식혈마염(蝕血魔焰)! 한 형,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 화염은 마족의 4대 마염 중 하나로 일단 들러붙으면 전설 속의 몇몇 이보를 제외하고 절대 떨쳐낼 수 없습니다.”

    분노한 은광선자가 한립을 향해 큰 소리로 당부하고 서둘러 맑은 향이 진동하는 하얀 단약을 꺼내 입에 집어넣었다.

    파앗.

    순식간에 푸른빛이 그녀의 잘려나간 팔 부위를 휘감아 부드러운 살결의 팔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여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으로 보아 신체 일부를 다시 재생하는 술법의 대가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식혈마염과 같은 화염을 지니고 있었다니 저도 제대로 상대해 드려야겠습니다. 이는 수사가 마족 존자들 중 지위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절대 살려 보낼 수는 없겠습니다.”

    한립은 잘려나간 은광선자의 팔에서 시선을 떼고는 삼두육비 마물을 보고 살의를 드러냈다.

    “흐하하하, 겨우 너희들 힘으로 나를 죽이겠단 말이더냐!”

    독각 노인이 변한 마물이 광소하며 두 손으로 검은 방망이를 쥐고 흔들어대자 거대한 방망이 그림자들이 한립과 은광선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방망이 그림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 영기의 압력으로 인해 주변 공간이 왜곡되고 있었다.

    “실력에 상당히 자신이 있나 봅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놀라기는커녕 눈빛이 서늘해져서 두 손으로 수결을 맺었다. 그러자 금빛을 크게 방출한 그의 몸이 순식간에 거대한 금털 원숭이로 변해 있었다.

    두 손에 검은 산봉우리와 푸른 산봉우리를 불러낸 금털 원숭이는 두 팔을 번쩍 들어 거산으로 변한 산봉우리들로 방망이 그림자를 막았다.

    퍼퍼퍼펑!

    역 존자가 변한 마물의 힘도 대단해서 방망이 그림자들과 산봉우리의 충돌에 폭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늘을 뒤덮고 날아든 방망이 그림자들이 가시고 두 산봉우리는 표면이 조금 울퉁불퉁해 졌지만 멀쩡했다. 그것을 본 독각 노인의 세 머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난 규룡대력마공(虯龍大力魔功)을 대성했건만 어찌 인족 합체기 수사가 나보다 더 힘이 셀 수 있단 말인가! 엇, 그 변신술은…….”

    독각 노인은 깜짝 놀라 한립이 변한 거대 원숭이를 자세히 살피고 더욱 아연해했다.

    “하하, 아직 제대로 선보이지도 못했는데 벌써 놀라십니까?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입니다. 이번에는 제 공격을 받아보시지요.”

    원숭이가 냉소하고는 거산(巨山)을 냅다 던져버렸다. 그것은 즉시 하얀 흔적으로 변해 허공을 갈랐고, 독각 노인이 변한 마물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형의 압력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거산(巨山)이 허공을 산산조각낼 듯 엄청난 기세로 쇄도하자 독각 노인은 기겁해 맹렬히 기합을 넣으며 들고 있던 검은 방망이를 힘껏 휘둘렀다.

    산만한 방망이 그림자들이 두 개의 거산을 향해 날아들었다.

    쿠콰콰쾅!

    삼두육비의 마물이 손이 저릿하다고 느낀 순간 거대 방망이가 튕겨 날아갔고 압도적인 힘에 의해 검붉은 피를 토하고 뒤로 밀려났다. 두 거산은 잠시 주춤하다 다시 한번 호되게 마물을 내리찍었다.

    이에 독각 노인의 팔이 갑작스레 떨어져 나와 핏빛 안개로 변하더니 마물의 몸을 감쌌다.

    쾅!

    두 거산이 핏빛 안개를 짓눌렀지만 안은 텅 비어있었다. 독각 노인이 비술을 펼쳐 사라진 것이다. 이에 거대 원숭이가 대노하며 두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동시에 원숭이 미간이 갈라지고 수직의 새까만 눈동자가 박힌 제3의 눈이 나타났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검은 빛기둥이 뻗어나가 종적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 멀리 고공에서 폭음이 울리고 마물의 거대한 신형이 공간 파동 속에서 비척거리며 빠져나왔다.

    그것을 본 한립이 바로 두 산봉우리를 가리켰다. 두 거산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각각 회색 기운과 푸른빛의 무형의 검기들을 방출했다.

    회색 기운이 하늘을 뒤덮고 무수히 많은 무형의 푸른 검기들이 섞여들자 천지가 회색과 푸른색으로 물든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독각 노인이 하얗게 질려 주저 없이 허공을 박찼다.

    퍼펑!

    핏빛 안개로 둘러싸인 두 다리가 폭발해 은색 뼈를 드러냈다. 표면에 은빛으로 빛나고 발바닥에 핏빛 부적이 붙어 무척 괴이했다.

    역 존자의 세 머리가 이상한 주술을 외우자 핏빛 부적이 화르륵! 타올라 열댓 개의 핏빛 주술문자로 변해 뼈로 스며들었다. 한 쌍의 은색 다리뼈가 빙글빙글 돌아 핏빛 화염에 둘러싸인 은색 수레바퀴로 변했다.

    쉬익!

    둥근 수레바퀴는 핏빛 빛줄기가 되어 쏘아져 나갔다. 핏빛 마염의 힘을 빌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역 노마는 자신이 한립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달아나기로 한 것이다.

    황당해진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죽기 살기로 덤빌 것처럼 하더니 고마진신(古魔眞身) 변신술까지 쓰고 달아난 것이 의외였다.

    이때 한쪽에서 영력을 끌어올려 몸 상태를 안정시킨 은광선자가 크게 소리쳤다.

    “한 형, 절대 저 마두가 달아나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마족들을 찾아 우리의 행방을 고하면 성가셔질 것입니다.”

    은색 갈고리 한 쌍을 회수한 여인이 한발 앞서 청록색 베틀 북을 불러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콰릉!

    베틀 북이 청록색 빛으로 변해 핏빛을 쫓는데 그 속도가 비술을 쓴 마물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벽천사(碧天梭)! 저 여인이 만령방에 이름이 오른 통천령보까지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허나 나도 마두를 달아나게 할 생각은 전혀 없단 말이지.’

    청록색 베틀 북을 한눈에 알아본 한립이 차갑게 웃음 지었다. 금털이 북슬북슬한 손으로 수결을 맺은 거대 원숭이가 은색 빛에 둘러싸여 더욱 커다란 붕새로 변해 날아올랐다.

    콰릉!

    날개를 펼친 붕새의 등에 은색 뇌전이 번뜩이고 수정 날개 한 쌍이 더 생겨났다. 은색 수정 날개는 풍뢰시였다.

    지난 수백 년간 한립이 천붕 변신술과 풍뢰시를 결합해 만들어낸 극한의 둔술을 펼칠 때였다.

    은색 붕새가 네 개의 날개를 펄럭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연달아 천둥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는 아주 빠르게 멀어져 갔다.

    그때 독각 노인은 꽤 멀리 달아났다고 여겨 핏빛 빛줄기 속에서 초조하게 사방을 힐끔거렸다.

    두 인족 수사와 격전을 벌이기 전에 연락해둔 동료들이 머지않은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 겁 없이 덤볐는데 인족 여 수사는 그렇다 치고 손자를 죽인 인족 사내의 신통이 너무 뛰어나 쓴맛을 보고 말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힘만으로 널 죽일 수 없다면 동료들을 찾아 도움을 구하면 그만이다.’

    독각 노인이 분노를 억누르고 중얼중얼 주술을 외웠다. 어깨의 상처부위에서 핏빛 안개가 스멀스멀 밀려올라와 떨어져 나간 여섯 개의 팔뚝을 복원했다.

    바로 그때 그의 귓가에 익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역 형, 어쩌다 그렇게 큰 부상을 입은 것입니까? 인족 수사들이 상대하기 꽤 까다로웠나 봅니다. 허나 걱정 마세요! 우리가 미리 인근에 마진(魔陣)을 펼쳐 두었으니 그들을 유인해 가둔 다음 다함께 공격하면 반드시 죽일 수 있을 겁니다.”

    전음을 보낸 자는 대머리 마족이었다.

    독각 노인이 반색하며 바로 제안에 응하고 방향을 틀었다.

    일다경 후, 독각 노인은 멀리 덩그러니 솟은 작은 산봉우리들을 발견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슬쩍 고개를 돌려 멀리서 따라오는 청록색 빛줄기를 확인한 독각 노인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핏빛 마염에 휩싸인 그의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전방의 산봉우리에 고계 마존 두 명이 마진을 펴놓고 몸을 숨기고 있었다.

    독각 노인은 먼저 쫓아온 여인을 진법에 가둬 죽이고 남은 한립은 세 명이서 협공해 상대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청록색 베틀 북 속의 은광선자가 의심 없이 통천영보를 재촉해 그를 바짝 뒤쫓았다. 순식간에 노마와 여인이 모두 작은 산 인근에 이르렀다.

    독각 노인이 막 산봉우리 중 하나에 내려서려는데 머리 위에서 홀연히 천둥소리가 울리고 은색 뇌전으로 둘러싸인 거대 붕새가 기세등등하게 나타났다.

    네 개의 날개가 미세하게 움직이자 거대 붕새의 몸이 모호해져 뇌전 빛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다음 순간 강철 같은 거대 발톱이 쾌속으로 날아들었다.

    기함은 노인은 필사적으로 두 머리를 꺾고 영력을 끌어올려 보호막을 몇 배로 두껍게 만들었다.

    폭!

    그러나 독각 노인의 보호막에서 무언가 뚫리는 소리가 났고 잠시 후 노마가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추락했다. 머리가 있던 양쪽 어깨에서 핏물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노마도 보통내기가 아니라 극통에 시달리면서도 발밑에 있던 핏빛 화염에 휩싸인 수레바퀴를 날려 보냈다. 핏빛 불덩이로 변한 수레바퀴가 거대 붕새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자 불덩이는 모든 것을 불사를 수 있을 것처럼 주변 온도를 확 끌어올렸다.

    동시에 노마가 몸을 틀어 얼마 남지 않은 작은 산 정상을 향해 달아났다. 미리 펼쳐 놓은 진법으로만 유인하면 기다리고 있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때 거대 붕새가 갑자기 오색 광채를 일으키며 빙글 돌아 아름다운 오색 공작으로 변신했다.

    오색 공작이 날개를 활짝 펼쳐 오색 기운을 내뿜자 다섯 개의 고리가 나타나 불덩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다시 날개를 펄럭인 공작은 오색 기운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핏빛 불덩이와 격돌한 다섯 개의 고리 중 세 개가 치지직 거리며 녹아내리고 네 번째 고리만이 공격을 막아냈다. 남은 두 개의 오색 고리가 반대로 핏빛 불덩이들을 덮쳐 두 덩이의 거대한 빛구슬로 감싸 안았다.

    콰쾅! 쾅!

    두 개의 빛구슬이 스스로 폭발해 오색 기운을 퍼트렸다.

    달아나던 독각 노인은 오색 기운에 닿아 몸이 묵직해졌다. 주변 공기가 찐득찐득 달라붙어 빨리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사, 살려주시오! 어서!”

    독각 노인은 풍부한 전투 경험으로 자신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동료들을 부르는 그의 고함 소리가 산골짜기를 메아리쳤다.

    독각 노인이 두 손으로 수결을 맺어 은색 주술문자가 아름답게 새겨진 검붉은 갑옷을 입었을 때 오색 기운 속에서 금빛 찬란한 거대 주먹 두 개가 날아들었다.

    오색 기운의 금제에 걸려 피할 수 없는 노인은 갑옷으로 법력을 응집하는 수밖에 없었다. 검붉은 갑옷이 빛을 크게 머금어 검붉은 태양이 뜬 것처럼 주위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본신의 괴력에 범성진마공이 더해진 한립의 주먹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금속성의 커다란 마찰음이 들리고 첫 번째 금빛 주먹이 갑옷을 때렸다. 검붉은 기운의 파동이 일기는 했지만 움푹 들어간 갑옷은 뚫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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