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115화 (872/2,000)

1115화. 인마전투 (3)

*

“대인께 아룁니다. 천연성 방어가 듣던 것보다 강해졌다 해도 저희 병력이면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대인께서 하루빨리 일이 성사되길 원하신다면 마수 대군을 교대로 돌아가며 조금씩 강도를 높여 공격하시지요.

상대의 방어수단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해결책을 찾고 마지막에 전력으로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방법을 쓰면 마수들이 꽤나 죽어나가겠지만요.”

금색 깃털들을 꽂아 머리를 올린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제안했다.

“성만 함락시킬 수 있다면 마수들이 죽어나가는 것쯤이야 무슨 상관이겠느냐! 우리 성계에 다른 것은 몰라도 저계 마수들은 수도 없이 많다. 다른 이들도 환우 장로의 생각을 들었으니 보충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

노인의 말에 혈포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른 마족들을 향해 냉랭히 물었다.

“대인, 제 생각에는 천연성을 공격함과 동시에 약간의 정예 마족들로 주변 인족 수사들을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고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또한 이것을 기회로 삼아 성족 정예병들이 인족 수사들과의 전투에 익숙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노란 장포를 입은 부인이 얼른 나서서 건의했다.

“그동안 주변을 정탐한 것으로 안다. 아직 남아 있는 대형 인족 거점이 몇 개나 되지?”

“시간이 부족해 세력이 큰 곳은 일단 위치만 파악해 두었습니다. 이 일대에만 일고여덟 개는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천연성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규모입니다.”

혈포 사내가 흥미를 보이자 새하얀 얼굴의 젊은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가륜전마(珈輪戰魔), 혈광정위(血光晶衛) 그리고 만상마기(万象魔騎)를 모두 출격시켜 전부 쓸어버리라! 세부 사항은 환우 장로의 뜻에 따라 진행하고.”

“예? 대인, 정말 혈광정위까지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가륜전마와 만상마기는 저희 고마족의 핵심역량이긴 해도 언제든 대체 가능한 병력입니다. 하지만 혈광정위는 대인의 호위대인데 어찌 대인 곁을 쉽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고계 마족들이 안색이 달라져 말렸다.

“내가 혈광정위를 출동시키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쓸데없는 걱정할 것들 없다.”

마족들의 설득에도 혈포 사내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 소리에 고계 마족들이 눈치를 보며 더는 무어라 하지 않았고, 혈포 사내는 고개를 들고 생각에 잠겼다.

* * *

영황성(靈皇城) 인근의 거산(巨山).

머리에 두 개의 새하얀 뿔이 솟은 여인이 바위 위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 뒤로 대략 5, 60명의 남녀 마족들이 숙연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거산의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사방에 마기가 들끓었고 갑옷을 입은 마족 거대한 깃발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까지 영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종족의 고계 마수들이 병사들 사이에 섞여 낮게 으르렁거렸다.

머지않은 곳에 있는 영황성은 바로 이 마족대군에 의해 포위당한 상태였다. 혈광성조와 달리 영황성을 담당한 마족은 처음부터 전 병력을 출병해 단숨에 임무를 완성하려는 듯했다.

영황성 외곽에는 이미 만여 개의 보루와 그곳을 지키는 병사들의 시체가 수북이 쌓여 있었고, 나머지 인족 수사들은 녹색 보호막으로 겹겹이 쌓인 통천거목(通天巨木)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공격하라!”

이에 수려한 얼굴의 쌍각(雙角) 여인은 살기를 머금고 명령을 내뱉었다.

“예, 육극 대인!”

여인의 명령에 5, 60명의 고계 마족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때 고계 마족들 사이에서 자색 궁장 차림을 한 마족여인이 살짝 고개를 들어올렸다. 절세미인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여인은 다른 고계 마족들과 마찬가지로 쌍각 여인의 명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

* * *

거처로 돌아온 한립은 밀실로 들어가 만검도와 호리병 속 비검들인 호중검(葫中劍)의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두 보물의 제련을 마치면 앞으로의 전쟁에서 그와 문하의 제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달 후, 먼저 호중검의 제련을 마친 한립은 그것을 해대소에게 주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만검도에만 쏟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반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그동안 천연성의 장로들은 한립의 수련을 방해하지 않고 그저 문하의 제자들로 하여금 매일 전황을 전하기만 했다. 마족이 쉬지 않고 천연성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마수대군의 공격을 무찌르면 며칠 후에는 더 많은 수의 마수들이 몰려왔다. 마치 마수들이 무궁무진한 것 같았다.

마수대군을 이끄는 고계 마족들은 저계 마수들의 죽음은 개의치 않고 무작정 돌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성의 방어를 담당한 합체기 수사들은 수차례 성 안의 몇 가지 초강력 진법을 동원해 적을 섬멸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계 마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마수대군을 몰고 달려들었다. 더욱 안 좋은 소식은 반년 동안 천연성 인근의 다른 인족 거점들이 함락을 당했다는 것이다.

거점을 방어하던 인족 수사들은 대부분 살해당하고 소수만이 마족들에게 끌려가 마기를 주입당해 마인이 되어갔다. 그나마 평범한 인족 범인들은 마족들도 잘 건들지 않아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고 했다.

천연성 주변 거점을 친 것은 저계 마수대군이 아니라 마족의 정예 병력들이었다. 개인의 신통도 뛰어나고 협공에도 능해 인족 거점을 지키던 합체기 수사 여럿이 마족 정예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 같은 소식에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마족의 실력은 듣던 것보다 더욱 무시무시하구나! 그들이 천연성 방어의 허점을 모두 파악하고 인근 인족 거점을 소탕하고 나면 천연성의 안위도 풍전등화(風前燈火)가 되고 말겠지.’

허나 어차피 전쟁의 승패는 혼자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금월선사 등 천연성의 합체기 수사들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나갈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만년 이상을 살아온 천연성 장로들도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한립은 보물을 제련하며 유유자적 보낼 수 있는 나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과연 한 달 후 한립은 금월선사로부터 장로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즉시 밀실을 떠나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 안에는 금월선사, 곡 장로, 은광선자 등 익숙한 얼굴들 외에 낯선 합체기 수사들도 있었다. 이전에는 만날 기회가 없었던 장로들이었다.

각자 급한 일로 장로회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오늘에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그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었다. 대부분 합체 초기여서 합체 중기인 한립에게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큼, 모두 한 형과 인사는 나눈 것 같으니 바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어제 장로회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마족이 대량의 병사들을 파견해 의천문(倚天門)과 천황종(天皇宗) 등 네 개 종문이 연합해 있는 성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네 종문은 더 이상 마족 공세를 이겨낼 수 없다고 판단해 위험을 무릅쓰고 천연성으로 사자를 보내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의천성(倚天城)은 천연성 다음으로 중요한 거대 인족 거점으로 이곳이 뚫리면 우리는 정말 고군분투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누군가 지원을 나가야 합니다.”

곡 장로가 초초한 기색으로 한립과 나머지 장로들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다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 말에 장로들의 안색이 어두워졌고 한립의 미간도 구겨졌다. 오늘 처음 본 장로들의 놀란 눈빛을 보니 그들도 모르는 일 같았다.

“곡 형, 의천문은 며칠 전 마족의 공격을 격퇴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여러 번 고계 마족들이 이끄는 마수대군의 침공을 이겨냈고요. 어쩌다 형세가 그리 급변한 것입니까?”

얼굴이 붉은 장로가 급히 물었다.

“의천문 등 네 개 종문의 연합 세력은 인족을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들만큼 규모가 크고, 그들이 건립한 의천성의 방어력은 천연성과 비교해도 많이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지난번 전투 때 열댓 명의 고계 마족들이 사대종문의 몇몇 태상장로들을 유인해 기습했기 때문입니다. 장로들 중 둘이 목숨을 잃어 사대종문의 전력이 크게 줄은 상태이지요.”

곡 장로가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서 곡 장로께서는 어떻게 하시기를 바라십니까?”

“본 성과 근접한 대규모 인족 거점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지난번 마겁에서도 멀쩡하게 버텼던 곳이니까요. 이번 위기에 그저 고계 수사가 부족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붉은 얼굴 노인의 말에 곡 장로가 탄식했다.

“곡 형의 뜻은 천연성의 합체기 수사 중 몇 분이 지원을 나갔으면 하시는 것이군요.”

금월선사가 눈을 빛냈다.

“맞습니다. 마족대군의 최종 목표는 우리 천연성이니 대량의 병사들을 보낼 수는 없고. 합체기 수사 중 두세 명 정도가 가서 지원해주면 눈앞의 급한 불도 끄고 본 성의 실력도 크게 꺾이지 않을 듯싶습니다.”

곡 장로의 말에 장로들이 수군거렸다. 장로들은 대부분 곡 장로의 의견을 받아들였지만 구체적이 지원 방법과 파견 보낼 수사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다.

“곡 형, 저와 여 수사는 안 됩니다. 위험해서 몸을 사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어 성을 떠나기 어렵습니다.”

눈썹이 새하얀 중년 사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조금 전 곡 장로가 그와 다른 장로에게 의천성으로 지원 나갈 것을 권했던 것이다.

“제 사정도 아시지 않습니까! 어렵사리 향소단(香霄丹)을 제련중인데 지금 성을 떠났다가는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장로도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진 수사와 뇌 형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미간의 주름이 깊어진 곡 장로가 다른 두 명을 지목했으나 그들도 난색을 표하며 거절했다.

“노부와 금월대사 등 천연성 방어를 맡은 책임자들은 더더욱 성을 떠날 수 없는데 이 일을 어쩐단 말입니까.”

“곡 형,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저와 천황종 임 선자는 오랜 지기인데 어찌 위험에 처한 의천성을 두고 보기만 하겠습니까.”

곡 장로의 한탄에 은광선자가 가면 밖으로 드러난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선자께서 가주신다면 당연히 노부도 안심입니다. 허나 선자를 홀로 보내는 것은 안 될 말이고 적어도 한 명이 더 가주셔야 할 텐데…….”

은광선자가 스스로 나선 것이 의외였던지 곡 장로가 반색하며 말했다. 말끝을 흐린 노인의 눈길이 은근슬쩍 한립을 향해 있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년 가까이 처리할 일이 있다며 쉬었으니 이번에는 부탁을 마다하기 힘들었다.

“그동안 진행해오던 보물 제련이 거의 끝나갑니다. 의천성에는 제가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천연성으로 돌아와 아무 도움도 드리지 못해 마음이 불편하던 차였습니다.”

“중기 수사인 한 형께서 나서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수사께서는 후기 수사와도 대적했던 일도 있으니 앞으로 의천성 걱정은 덜었습니다.”

곡 장로가 기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의천성은 천연성의 안위에도 중요한 곳이니 힘을 보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늦장 부릴 일이 아니니 짐을 꾸려 내일 바로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립은 빙긋 미소 지었다. 지금 그의 수행에 마족성조를 마주치지 않는 한 다른 고계 마족들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의천성의 상황이 급박하니 그래 주시면 감사하지요. 허나 의천성 전송진은 이미 마족들이 술법을 펼쳐 막아 놓았기에 아무래도 인근에 숨겨 놓은 비밀 전송진으로 보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남은 길은 두 분이 비행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지요.”

금월선사가 조금 미안한 기색으로 답했다.

“괜찮습니다. 저와 한 형의 수행에 그 정도 거리는 얼마 걸리지도 않으니까요.”

은광선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한립도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원을 나갈 수사가 정해지자 장로들은 한시름을 놓았고, 점점 거세지는 마족 공격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