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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14화 (871/2,000)
  • 1114화. 인마전투 (2)

    *

    대형 비차에 탄 백여 명의 병사들 사이에 자갑 마족과 녹포 노인이 냉랭한 얼굴로 서있었다. 지금까지가 전력을 알아보기 위한 신경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높은 단위에서 이를 내려다보는 곡 장로 등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기를 벗어난 마족 정예 부대의 수가 그들의 예상을 너무 빗나갔다. 이전 마겁의 전투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많은 숫자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 정도 숫자로 천연성을 함락할 수는 없었다.

    마수대군은 빽빽하게 떨어져 내리는 은색 뇌전을 맞아 재로 변하면서도 쉬지 않고 밀려들어 금색 빛의 장막에 공격을 하거나 맨 몸으로 박치기를 해댔다.

    허공의 마인들이 마기(魔器)를 발동해 만든 마운(魔雲)이 뇌전의 위력을 대부분 막아준 덕분이었다.

    갑옷을 입은 마족들은 비차를 멀리서 세우고 직접 병장기를 들고 공격에 나섰다. 동시에 새까만 빛줄기들이 연달아 날아올랐다.

    금빛 장막 앞은 함성과 폭음이 난무했다. 이때 한립이 금월선사 등 장로들을 돌아보았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첫 번째 전투는 탐색전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보물을 하나 제련 중인데, 완성만 된다면 마족들을 저지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겁니다.”

    “확실히 이전보다 거세기는 해도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군요. 흉흉한 소문에 너무 긴장하고 있었나 봅니다. 급한 용무가 있다면 돌아가서 일을 보시지요.”

    금월선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마수 떼들의 공격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직 마족도 전력으로 밀고 들어오지는 않으니 노부도 안심이 됩니다. 우리가 본 성의 가장 강력한 전력이라지만 마겁으로 인해 언제까지 중요한 수행을 미룰 수는 없지요. 마족이 본격적으로 진공하기 전에는 둘씩 짝을 지어 이곳을 지키고, 나머지는 급한 용무를 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물론 한 수사께서는 장로회 일원도 아니고 성의 방어 전략에 대해 깊이 파악하고 있지 않으니 당직을 설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본 성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큰 힘을 보태주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생각해본 곡 장로가 대책을 마련했다.

    “곡 형의 말씀대로 하지요!”

    “저도 따르겠습니다.”

    그의 말에 장로들과 한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가 격렬하게 달려드는 때에 한립은 태연한 얼굴로 궁전을 떠났다.

    곧 금월선사와 은광선자 등도 자리를 비워 백옥 궁전에는 곡 장로와 거한만이 남았다.

    “곡 형, 이렇게 지켜보기만 해야 합니까? 금욱보경으로 방어막을 형성해 마수들의 공격을 막는 방법은 영석 소모가 극심할 텐데요.”

    말이 없던 흑포 거한이 멀리 폭음이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며 냉랭히 물었다.

    “걱정 마세요, 포 수사! 마족들이 저계 마수들이 죽든 말든 진격을 시킨 것은 우리 천연성의 방어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저들을 실망시킬 수는 없지요. 칠성정화대진(七星精火大陣)을 펼쳐 호된 맛을 보여줄 작정입니다.”

    “칠성정화대진! 본 성의 비장의 무기 중 하나로 알고 있는데 벌써 노출해도 될까요.”

    곡 장로의 말에 흑포 거한이 머뭇거렸다.

    “어차피 위력의 10분의 1만 낼 거라 상관없습니다. 마족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면서도 진정한 저력은 들키지 않을 방법입니다. 또한 마족 수뇌부가 이를 통해 본 성의 방어력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되면 앞으로의 전투에서 유리해질 수도 있고요.”

    “흠, 곡 형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흑포 거한이 곰곰이 따져보고는 동의했다. 두 합체기 수사가 합의를 보자 신속하게 명령이 하달되었다.

    천연성 붉은 거탑의 지하 밀실. 새빨간 가죽 장포를 걸친 7명의 백발노인들이 금색 진법 도안 위에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풍기는 불의 기운이 불 속성 공법을 주로 수련하는 연허기 수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짤랑!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의 품에서 청동 방울이 울렸다. 방울 소리에 노인은 눈을 번쩍 뜨고 하얀 진법 원반을 꺼내 무언가를 확인했다.

    “칠성정화대진을 10분의 1의 힘으로 발동한다.”

    “예, 형님!”

    나머지 여섯 노인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일곱 백발노인이 동일한 수결을 맺어 몸에 불길을 일으킨 다음 자신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푹! 푹! 푹!

    노인들의 머리에서 붉은색 보물을 꼭 쥐고 있는 새빨간 원영들이 떠올랐다. 각각 고리, 깃발, 검, 도, 탑, 영패, 구슬의 형상을 한 법보들이었다.

    일곱 원영이 주문을 외자 정순한 불 속성 보물들이 날아올라 진법 곳곳으로 날아갔다.

    거처로 돌아가던 한립은 둔광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고공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천연성 위 맑은 하늘에 불현듯 일곱 개의 거대한 별이 떠올라 새빨간 화염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금제로 겹겹이 쌓여 있는 천연성 내부에서도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바삐 돌아다니던 병사들이나 거처에 머물고 있던 수사들도 전부 강력한 기운에 이끌려 그곳을 쳐다보았다.

    일곱 개의 붉은 별이 희미하게 발산하는 웅장한 기운에 그는 당장이라도 죽임을 당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때 붉은 별들에서 새빨간 기운이 흐르고 현묘한 진법 도안이 떠올랐다.

    거대한 진법 도안은 천연성 절반을 뒤덮었고 강렬한 천지법칙의 파동이 일었다. 별들이 흐릿하게 변해 놀랍게도 한 마리의 거대한 불새로 변해 맑은 울음소리를 냈다.

    쿠아앙!

    불새가 성벽 밖으로 떨어지고 버섯 모양의 붉은 안개가 피어올라 만 장 가까이 치솟았다. 충격으로 천연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멀리 떨어진 한립조차 그 위력을 체감하고 심장이 철렁했다.

    금색 빛의 장막을 중심으로 천연성 성벽 밖이 두 개의 세계로 완전히 갈라졌다. 금색 보호막 안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웠지만 바깥은 그야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불바다였다.

    불바다에 휩쓸린 마수들은 닿는 족족 펑펑! 터져나갔다. 그나마 마인들은 법기 등 보물을 꺼내 잠시 버텼지만 대규모 공격에 결국 참혹한 비명을 남기고 목숨을 잃었다.

    다섯 마리의 초대형 마수들만이 두꺼운 보호막을 응결해 버티는 중이었으나 그들도 고온을 오래 버틸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은 거대 조류는 훌쩍 날아올라 검은 빛으로 변해 불바다 밖으로 빠져나갔고, 새빨간 거대 원숭이는 땅을 박차 뛰어올라 돌풍으로 변한 다음 불바다를 가르며 물러났다. 거대 조류 보다는 늦었지만 가까스로 위험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얀 달팽이 두 마리와 보라색 구렁이는 움직임이 느렸기에 화를 당하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불바다를 헤치고 후퇴하다 더는 보호막이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타죽고 만 것이다.

    세 마리 초대형 마수들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라색과 녹색 둔광이 불바다를 뚫고 나왔다. 고계 마족인 자갑 거한과 녹포 노인이었다.

    합체기 고계 마족답게 무사히 불바다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불바다를 돌아보는 그들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인족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자갑 거한이 이를 갈았다.

    “예상 밖이기는 합니다. 보통은 겨우 마수 대군에 이런 강력한 수단을 사용하지는 않으니까요. 이런 공격을 하려면 소모해야하는 영석이 엄청날 텐데 인족을 지휘하는 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요!”

    녹포 노인도 살기등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성을 지키는 녀석이 미치광이건 말건 아무래도 좋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마수와 인원을 끌고 나와 거의 전멸을 당했으니 돌아가면 크게 문책을 받을 것입니다. 겨우 거대 마수 두 마리와 우리 둘만 살아 돌아가는 꼴이 아닙니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임무는 본래 상대의 방어력을 시험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첫 전투에서 이런 강력한 방어 수단을 끌어냈으니 어쨌든 공을 세운 것입니다. 공로를 인정받으면 중한 벌을 받지 않을 수도 있지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요. 이번에 정예병들을 데려오지 않아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아주 경을 칠 뻔했습니다.”

    녹포 노인의 침착한 반응에 자갑 마족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석 존자! 이번에는 미리 대비하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다음번 대군을 이끌고 올 때는 같은 수에 두 번 당할 일은 없을 겁니다.”

    “맞습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반드시 원수를 갚아 주겠어요. 수행이 늘고 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무참히 당한 적은 처음입니다. 녹 형 어서 돌아가 보고하십시다.”

    자갑 마족이 씩씩 거리고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녹색 장포 노인도 불바다에 가려진 천연성을 노려보고는 녹색 빛줄기로 변해 그 뒤를 쫓아갔다.

    천연성 밖은 활활 타오르는 소리 말고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도 몰랐지만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산봉우리에 수정 구슬이 떠서 깜빡깜빡 빛나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천연성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마족 진영.

    삼각형 거탑 안에 고계마족 스물대여섯 명이 대전에 앉아 있었고, 그 앞의 검은 의자에는 핏빛 장포를 입은 중년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인족과 생김새가 똑같았다.

    대전 중앙에 떠있는 수정 구슬이 천연성 인근의 불바다를 비춰주고 있었다. 수정 구슬을 보는 혈포 사내는 표정이 없었지만 나머지 고계 마족은 각양각색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성조대인, 석 존자와 녹 수사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손을 놓고 있다 겨우 금제공격 한 번에 저 꼴을 당하다니요. 돌아오는 대로 중벌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반 형. 석 수사와 녹 수사의 지휘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중 누가 갔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인족이 숨겨둔 방어 수단 중 하나를 알아냈으니 저계 마수들이 좀 죽어나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제 생각에는 벌을 내릴 것이 아니라 공로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나선형 뿔이 솟은 사내의 말에 얼굴이 투명한 마족 사내가 반박했다.

    “현 존자야 말로 말씀을 좀 가려서 하세요. 아무리 저계 마수들이 성전의 희생양이라지만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수를 잃은 것은 전력에 크나큰 손실입니다. 게다가 진귀한 거마(巨魔) 세 마리가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까? 저들을 문책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도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 몰살당해도 상을 내려야겠군요.”

    나선형 뿔 사내가 비꼬며 소리쳤다.

    “흥, 반 형이 나섰으면 저들보다 얼마나 더 잘 해냈을지 곰곰이 생각해보시지요. 석 수사와는 원한이 깊은 것으로 아는데 이번 기회를 빌려 앙갚음할 생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투명한 얼굴 마족이 냉소하며 받아쳤다. 두 마족의 싸움에 다른 어떤 이는 관심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했고, 누군가는 한숨을 내쉬었으며 또 팔짱을 끼고 재미있다는 듯 구경하는 이도 있었다.

    “조용! 모두 입 다물라!”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혈포 사내가 무표정하게 일갈했다. 그러자 웅성거리던 대전이 쥐 죽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저 둘은 돌아오는 대로 내가 알아서 처분을 내릴 것이다. 너희를 부른 이유는 천연성의 방어가 어떠한지 분석하고 가장 빠르게 함락할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다른 대군들은 이미 행동에 들어갔을지 모르는데 본 성조가 너희 때문에 뒤쳐져서야 되겠느냐.”

    혈포 사내가 음산한 눈빛으로 대전 안 마족들을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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