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화. 포위당한 천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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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족의 황량한 평원. 몇 무리의 병사들이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10만 마리에 이르는 회색 늑대 무리와 만 마리가 넘는 남색 사자 떼가 맞붙어 치열하게 서로를 죽였다.
커다란 몸집의 회색 늑대들은 청록색 눈을 반짝이는 저계 요수들이었고, 늑대들보다 훨씬 큰 거구의 남색 사자들은 머리에 검은 뿔이 달렸고 입에서는 불덩이와 얼음송곳들을 뿜어냈다.
네 발 달린 짐승들 위에서는 수천 마리의 새하얀 거대 매와 머리가 둘 달린 날개 달린 뱀들이 격전을 벌였다. 하얀 매가 강철 같은 발톱을 휘두를 때마다 은색 뇌전이 번뜩였고 쌍두 뱀이 입을 벌리면 독액이 난무했다.
거대 매와 뱀이 충돌할 때마다 시체들이 사정없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짐승들의 전투가 벌어지는 곳 후방에는 화형 요족들이 고계 마족과 대치해 냉랭히 전황(戰況)을 주시하고 있었다.
푸른 바다 한가운데의 거대 섬을 마기가 뒤덮으려 했다. 마기 속에는 천군만마가 숨어 있는 것처럼 수많은 마물 허상들이 어른거렸다.
그런데 섬 인근의 심해에서 갑자기 포효소리가 울리고 고요하던 해수면에 거대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도를 뚫고 떠오른 푸른 짐승은 표면이 수많은 산호초와 암석으로 울퉁불퉁해 진면목을 알 수 없었다.
짐승은 흐린 두 눈을 번쩍 뜨고는 검은 기운을 서늘히 올려다보더니 심연과 같은 입을 쩍! 벌렸다.
콰르르릉!
남색 소용돌이가 거대한 입에서 뻗어나가 검은 기운을 휩쓸었다. 이에 마기 속에 있던 만여 마리의 마수(魔獸)들은 소용돌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거대한 짐승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심지어 대량의 바닷물이 같이 빨려 들어가 주변 해수면이 한층 낮아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마수들을 잡아먹은 거대 짐승은 눈을 감고 다시 심해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자 파도는 잠잠해졌고 마기로 뒤덮인 하늘은 다시 맑아져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고요했다. 멀리 거대 섬의 탑 위에서 누군가가 서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한립은 탑 꼭대기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금색 호리병박과 금빛 찬란한 만검도를 허공에 띄운 채 수결을 맺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가 수결 모양을 바꾸고 손을 뻗자 금색 호리병박이 바르르 몸을 떨고 아름다운 오색 주술문자를 방출했다.
우웅!
뚜껑이 열리고 호리병박에서 금색, 노란색, 푸른색, 붉은색, 남색의 비검이 나타났다. 찬란한 빛을 번쩍이는 비검들은 아름다운 잔영을 만들어내며 붉은 비검은 불뱀으로 변했고, 남색 비검은 물의 기운을 발산하며 안개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그 중에 가장 요란한 것은 노란 비검으로 나무처럼 길쭉한 노란 검은 멀리서 보면 석검(石劍)처럼 보였는데 내뿜는 기세가 대단했다. 금색 비검과 푸른 비검은 화려한 빛을 내뿜을 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한립은 맑은 눈으로 다섯 자루의 비검이 주위를 배회하는 것을 지켜보다 검결(劍決)을 거두었다.
우우웅!
비검들은 길게 울며 원래 형태로 변해 금색 호리병박 속으로 들어갔다. 만검도로 시선을 돌린 한립의 표정이 퍽 신중해졌다.
그의 손에서 법결들이 날아가 화폭 속으로 흡수되자 표면에 금빛이 번지며 만검도에 무수히 많은 검들이 나타났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 있는 그림이었다.
한립은 입에서 푸른 기운을 뿜었다.
채채채채챙!
기운을 흡수한 만검도 안에서 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금색 검 그림자들이 빠져나왔다. 검은빛이 번득이며 한립의 이마에서 파멸법목이 나타나 강대한 의식의 힘을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순식간에 밀실을 채운 검 그림자가 그를 중심으로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달팽이처럼 느리던 것이 나중에는 기민하게 움직이며 희미하게 검진의 기운을 드러냈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대량의 법력을 운용해 검 그림자들을 자극하려는데 만검도가 낮게 울더니 암담하게 변해버렸다. 이에 밀실을 가득 채우고 날아다니던 금색 검 그림자들도 애달피 울고 모호하게 변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한립의 파멸법목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만검도를 응시했다.
광한계에서 금색 호리병을 얻은 이후, 선인이 제련한 법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다행히 금전문과 은과문을 이해할 수 있었고 금색 호리병박이 아직 미완성의 보물이라 어느 정도 기본 원리를 파악하는데 성공했다.
한립이 이해한 바에 따라 오행(五行) 속성의 진귀한 재료로 호리병박의 제련을 마친 덕에 원래 금속성의 비검들은 이제 오행 비검이 되어 있었다.
원주인이 제련한 것에 비해서는 떨어지겠지만 웬만한 영보에는 밀리지 않는 보물이었다. 그러나 보물이 풍족한 한립에게는 그다지 필요가 없어서 연구를 완전히 마치면 문하의 제자에게 내줄 생각이었다.
만검도가 방금 전 보여준 기이한 현상은 한립이 이종족 비술에 영감을 받아 두루마리의 놀라운 검기를 특수한 방법으로 제련한 결과였다.
두루마리가 품고 있는 검기는 진선계의 것이었기에 완벽하게 부릴 수 있게 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아마 합체기 수사라도 만검도의 검기들에 둘러싸이면 속수무책이겠지.’
안타깝게도 두루마리 제련에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법력을 쌓는데 대부분의 수련 시간을 할애한 탓에 아직 미완성이었다. 거기다 두루마리 속 검기는 원형이 없기에 힘을 다하면 만검도 자체가 사라질 가능성도 농후했다.
만검도가 지닌 염검결(念劍決)을 철저히 익히기 전에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한립이 만검도 조종이 실패한 이유를 되뇌다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쉭-!
밀실 대문을 지나 작은 불덩이가 그의 손으로 날아들어 폭발했다.
“스승님! 장로회에서 사람을 보내 스승님을 관천대(觀天臺)로 청했습니다. 마족들이 천연성을 포위하고 있는데 그 중에 고계 마족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고계 마족…….”
급박한 해대소의 목소리를 듣고 한립이 얼굴을 굳혔다. 금색 호리병박과 만검도를 회수한 그는 금색 빛줄기로 변해 밀실을 빠져나갔다.
반 시진 후, 멀리 거대한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성벽 밖 상공이 마기로 뒤덮여 해가 들지 않았다. 누군가 막대한 법력을 써 태양을 가린 듯했다.
마기 아래로는 사람의 불안하게 하는 기이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대로 천연성 안에서는 호각 소리가 연달아 울렸고 거탑에서 갑옷 입은 수사들과 연체사들이 법기나 병장기를 들고 뛰쳐나왔다.
거대한 성벽 위로 우뚝 솟은 제단에 몇몇 진법들이 윙윙거리며 발동되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거대한 원반이나 송곳모양의 보물들을 일고여덟 명의 수사들이 둘러싸고 지키는 중이었다.
이밖에도 천연성을 둘러싼 거대한 보호막 위로 백옥 궁전이 떠올라 위엄을 드러냈다.
수많은 은색 주술문자가 떠다니는 궁전에는 많은 병사들이 있었고 궁전 안 가장 높은 탑에 설치된 금색 고대 거울에서는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태양처럼 강렬한 빛이 천연성 대부분을 비춰 인족 역사(力士)들은 물론 수사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한립은 고공의 백옥 궁전을 살피고는 그곳으로 날아갔다. 그가 궁전에 접근하자 금갑 천연위가 열댓 명의 청명위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왔다.
“혹시 한 선배님이십니까? 장로님의 명을 받아 선배님을 관천대로 모시려고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내가 한 모일세. 길을 안내하게.”
한립이 둔광을 거두고 담담히 답했다.
“예! 선배님, 이쪽으로 가시지요.”
금갑 병사의 말에 병사들은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내주었고 한립은 그들의 안내를 받아 궁전의 높다란 단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금월선사 등 익숙한 천연성 장로들을 볼 수 있었다. 멀리 마족을 주시하던 장로들은 한립이 날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미소로 환대했다.
“오셨습니까, 한 수사! 과연 이번 마겁은 이전과는 양상이 다릅니다. 처음부터 아주 기세가 대단합니다.”
한립과 가장 익숙한 금월선사가 불호를 외치고 걱정을 드러냈다.
“고계 마족의 수가 그렇게 많습니까?”
“상황이 어떤지는 직접 보시면 알 것입니다.”
한립의 물음에 금월선사가 멀리 하늘을 가리켰다. 고공의 높은 단까지 올라오니 성 밖 상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성벽 수십 리 밖까지 흉악하게 생긴 마수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게다가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은 다섯 마리 거대 마수들이 몸을 웅크리고 음산한 눈으로 천연성을 지켜보고 있었다.
새빨간 거대 원숭이, 우윳빛 거대 달팽이 두 마리와 강철 날개가 달린 검은 조류 그리고 머리가 셋 달린 보라색 구렁이였다.
다른 마수들도 이 다섯 마리 거대 마수들을 슬금슬금 피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한립이 눈여겨 본 것은 마수들이 아니라 거대 마수 위에 떠있는 다양한 복색의 수사들이었다.
마기에 둘러싸인 이들은 인족과 똑같이 생겼고 족히 만 명은 되는 듯싶었는데 다들 화신기 또는 연허기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저들은…….”
한립이 무언가를 짐작한 듯 말끝을 흐렸다.
“노부와 다른 장로들의 짐작이 맞다면 인계에서 비승해 진마계에 이른 인족 수사들일 겁니다. 마공을 주로 수련했고 마계에서 오랜 세월 마기의 침식을 당해 이미 인족이라 볼 수는 없겠지만요.”
하얀 장포를 입은 곡 장로가 탄식하며 대답해 주었다.
“이전 마겁에서는 저런 마인들이 정식으로 나선 적은 없었습니다. 이번 마겁이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진행될 거라는 정보가 맞았어요. 마족이 이번 마겁에 그만큼 필사적이라는 뜻일까요?”
은색 가면을 쓴 은광선자가 의문을 제기했다.
“인족 마인들이라면 성가시기는 하겠습니다만, 저는 이번 천연성 전투를 맡은 고계 마족들이 어디 있는지가 더 궁금하군요.”
“마족성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대군이면 고계 마족 중 합체기 수사들도 몇 될 텐데요. 마계의 영계 침식이 이제 막 시작되어서 아직은 경계면의 저항력이 셀 겁니다. 마족성조의 본체는 넘어오기 어려울 것이고 기껏해야 화신 정도겠지요.”
한립의 물음에 금월선사가 생각한 바를 들려주었다.
“그동안 철저히 대비했으니 그저 성조의 화신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이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지금 보이는 것은 마족 세력의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이 저계 마수입니다. 마족들이 화살받이로 내놓은 희생양에 불과하죠. 고마족의 진정한 정예들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고요.”
곡 장로가 지난 마겁을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천연성의 방어력은 인족 세력 중 최강입니다. 우리마저 마족 공격에 저항하지 못한다면 어느 곳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미리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영황이 있는 천령성이야 말로 마족들의 주요 공격 목표라고 하더군요. 그곳에 몰려든 마족 대군의 수가 우리 쪽보다 몇 배는 많을 것입니다.”
은광선자가 냉소했다.
“맞습니다. 마족들이 아무리 날뛰어도 인족 전체가 협심해 굳세게 저항하면 이번 마겁도 무사히 지날 수 있을 겁니다. 천연성을 둘러싼 금제와 보루만 이용해도 눈앞의 마수 대부분은 거뜬히 죽일 수 있을 것이고요.”
금월선사는 이런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천연성은 원래 이종족 연합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세워진데다 지난 천 년간 우리가 특별히 보수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마족들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줄곧 말이 없던 흑포 거한이 냉랭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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