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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09화 (866/2,000)

1109화.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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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출발하기 전 만리부를 이용해 마겁이 발발하고 몇 년 간 천연성에 머물며 마족 침공을 함께 막겠다고 장로회에 전했다. 그 대신 문하의 제자들이 성의 비호를 받을 수 있도록 조건을 걸었다.

장로들은 그가 마족들의 공세가 가장 강렬한 마겁 초반에 도움을 주겠다는 말에 무척 기뻐했고 바로 제안을 수락했다.

그 후 그들은 마겁에 대처할 여러 가지 방안을 상의한 후 흩어졌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은광선자는 한립이 멀리 사라질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서있었다.

이틀 후, 한립은 은광선자의 거처를 찾아 나섰다가 반나절 만에 어두운 얼굴로 그곳을 나섰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다 피식 웃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한립이 머무는 곳은 천연성의 하얀 탑이었다. 다른 거탑에 비해 10분의 1 밖에 되지 않았지만 혼자 이곳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는 탑의 최상층에 임시거처를 마련했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다. 10일 후 세 제자를 불러 여러 가지 일을 당부하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탑을 떠났다.

마겁이 도래하기 전 반드시 해둬야 할 일이 있었다. 한립은 천연성의 전송진이 있는 곳으로 가서 담당 병사에게 명을 내려 모처의 거대 시장 근처로 이동했다.

시장 근처로 이동한 한립은 바로 둔광을 일으켜 날아올라 어딘가로 향했다.

* * *

두 달 뒤, 한립은 어느 산맥에 도착했다.

산맥은 끝도 없이 구불구불 이어졌고 크고 작은 성들이 둥근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성벽 밖에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진법들이 펼쳐져 있어 산맥 전체가 거대한 요새처럼 보였다. 또한 갑옷을 입은 수사들이 열댓 명에서 백 명 단위로 뭉쳐 거대한 산맥 주변을 쉼 없이 맴돌았다.

그러나 한립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곧장 산맥 깊은 곳으로 날아가 열댓 개의 성 중에서 가장 큰 성 앞에 멈춰 섰다. 성벽에는 고대 문자로 ‘농(隴)’ 자가 적힌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천연성에서 들은 대로 구나.’

이곳은 농 가가 다른 열댓 개의 세가들을 모아 구축한 마겁 대비 거점이었다. 규모는 달랐지만 전부 진령세가로 각각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기에 마겁에서 충분히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 것은 인족 최고 전력 중 하나인 농 가 노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믿고 있는 농 가 노조가 마겁이 끝나기도 전에 이곳을 떠날 거라는 것을 알면 다들 어떤 얼굴을 할지!

한립은 내심 조소하며 누런 부적을 꺼내 쏘아 보냈다. 부적이 금빛으로 변해 사라지자 그는 산맥에 내려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후, 눈을 뜬 한립은 농 가의 거성에서 금빛이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금빛 둔광 속 중년 사내는 농 가 노조였다.

산봉우리 위에 도착한 그는 고공에서 무표정하게 한립을 아래위로 훑었다.

“농 형을 뵙습니다.”

한립이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합체 중기에 이르렀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빠른 수행 속도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허나 제가 이번에 찾아온 것은 수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은 아닙니다.”

“그렇겠지요! 마계를 갈지 말지 결정을 내리셨습니까?”

농 가 노조가 입 꼬리를 꿈틀했다.

“예, 참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허나 오늘 이리 찾아온 것은 농 형과 거래를 하나 청하기 위함입니다.”

“무슨 거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농 가에 진룡진혈을 주재료로 하는 용령단(龍靈丹)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합체기 수사가 고비를 넘길 때 뛰어난 효력을 발휘한다고요. 또한 경천전주(擎天戰舟)의 모조품을 제련하는데 성공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설마 그 두 가지 때문에 오셨다면 안타깝게 되었군요. 노부는 절대 그것들을 갖고 거래하지 않을 겁니다.”

“하하, 그 말은 조건을 들으신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적절한 가격을 치른다면 거래하지 못할 물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호오, 제 마음을 돌릴만한 물건이 있나 봅니다.”

“농 수사께서 수련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배회한지 어언 수만 년째라고 들었습니다. 도움을 드릴만한 물건이 있다면 흥미가 생기실지요?”

한립이 조용히 웃음을 흘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정말 그런 물건이 있다면! 허나 웬만한 단약으로는 얼마 효과를 내지 못할 겁니다. 노부도 그간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없으니까요.”

농 가 노조가 화들짝 놀라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 냉정을 되찾았다.

“직접 보시고 말씀 나누시지요.”

한립이 빙긋 웃고는 소매 속에서 옥으로 만든 작은 병을 꺼내 농 가 노조에게 던졌다. 노인이 병을 끌어다보고는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이건…….”

무언가 알아차린 것 같으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코를 가져다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천하은유(天河銀乳)? 아, 아니지. 경전에 적힌 천하은유보다 이건 약성이 더 강해! 태청선액(太淸仙液)을 닮은 것도 같은데 색깔이 완전히 다르고…….”

“어떻습니까. 명하신유가 수사께 도움이 되겠습니까?”

농 가 노조가 신이나 중얼거리자 한립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물었다.

“명하신유라는 영약은 처음 들어봅니다. 하지만 고비를 넘기는 데는 분명히 효과가 있겠습니다. 허나 겨우 이 한 방울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물론 제게는 명하신유로 꽉 찬 병이 하나 더 있습니다. 조건은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용령단과 경천전주 한 척이고요.”

“너무 과욕을 부리시는 것 아닙니까. 농 가의 용령단이 명하신유보다는 효과가 떨어져도 크게 떨어지는 보물은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다 경천전주를 얹어 달라니요!”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효과가 엇비슷하다고 그 가치가 같지는 않지요. 명하신유는 인족을 통틀어 제가 지닌 것이 유일할 겁니다. 나머지는 제가 수행을 쌓느라 모두 써버려서 풍원대륙을 다 뒤져도 다른 명하신유는 찾아낼 수 없을 겁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명하신유를 얻을 길이 없다는 말이지요. 저야 기다리기만 하면 언제고 용령단을 구할 날이 반드시 오지 않겠습니까? 농 가에서만 만들어진다 해도 절대 밖으로 새어나가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농 가 노조가 얼굴을 굳히든 말든 한립은 태연하게 미소를 유지했다.

“흥, 앉은 자리에서 말 몇 마디로 가격을 잘도 올리십니다. 허나 저는 그런 수가 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영약이 간절해도 불공정한 거래를 하려한다면 노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농 가 노조가 코웃음을 치며 물러서지 않고 버텼다. 이에 한립은 순간 미간을 좁혔으나 바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농 수사께서 명하신유가 필요 없으시다니 그럼 이번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하지요. 병에 들어 있는 것은 그냥 드리겠습니다.”

한립이 말을 마치고 주저 없이 둔광을 일으켰다. 당장 떠날 것만 같았다.

“자, 잠깐!”

안색이 급변한 농 가 노조가 체면을 차리지 않고 소리를 높였다.

“왜 그러십니까, 농 형? 그새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천천히 몸을 돌린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큼, 우리 신분에 이런 말장난은 그만 두지요! 확실히 명하신유는 노부에게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수사가 제시한 조건은 너무 각박하니 반드시 다른 보물 혹은 대량의 영석으로 가격을 맞춰주셔야 할 것입니다.”

농 가 노조가 서늘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이렇게 하시지요. 명하신유에 영석 일억 개에 상당하는 재료를 더해 용령단과 경천전주를 거래하겠습니다.”

한립이 가만히 서서 턱을 쓰다듬다 농 가 노조가 말한 가격과 얼추 비슷한 제안을 했다.

“어떤 재료를 말하는 것입니까?”

“재료 목록입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한립은 미리 준비했는지 소매 속에서 하얀 옥간을 날려 보냈다.

“아주 만반의 준비를 해오셨습니다. 흠, 이것들은…….”

의식으로 목록을 살핀 농 가 노조가 놀란 얼굴을 했다.

“만족하십니까? 마침 농 가에서 필요로 하는 재료들이 아닐까 합니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 있게 말했다.

“거대 세력에서 요긴하게 쓸 만한 재료들을 대량으로 구해두다니 우리 농 가의 경천전주를 눈독들인지 오래인 모양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많은 영석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재료들인 것으로 보나 한두 해 전부터 모아 놓은 재료들이 아니에요. 이렇게 되면 노부가 크게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닙니다. 수사의 뜻대로 하시지요.”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농 형.”

한립도 기뻐하며 품에서 푸른 고리를 꺼내 옥병과 함께 손에 들었다. 그는 바로 상대에게 물건을 던지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눈을 마주쳤다.

이에 농 가 노조가 소매를 펄럭여 금빛과 검은빛을 방출했다. 금색 병과 새까만 초소형 전함이었다.

금색 병은 이파리 문양이 새겨진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점이 없었지만 돛대가 세 개나 솟아 있었고 5층 규모에 빼곡하게 수많은 진법이 새겨져 있었다.

농 가 노조가 두 물건을 던지자 한립도 옥병과 저물탁을 던졌다. 금색 병과 초소형 전함을 끌어온 한립은 뚜껑을 열어 의식으로 핏빛 단약을 확인하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족 전체에서 위명이 자자한 단약답게 약성이 뛰어나 보였다. 이로써 그가 후기 고비를 넘길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졌다.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새까만 전함으로 이동했다.

‘이게 바로 경천전주로구나! 겉으로도 비범해 보이지만 위력이 어떤지는 직접 확인해보아야겠지.”

그는 곧바로 작은 전함을 공중에 던지고 손가락에서 법결을 내뿜었다.

쿠릉!

굉음과 함께 검은빛이 번지고 거대한 전함이 나타났다.

거대 전함에는 검은 괴수들이 새겨진 돛 세 개가 걸려 펄럭이고 있었는데 괴수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고 흉흉한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더욱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전함의 중심에서 다양한 형태를 하고 빛나고 있는 물건들이었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물건들을 전부 발동하려면 수백 명의 수사들이 전력을 쏟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선실 가장 위쪽의 투명한 오색 수정기둥 세 개가 눈길을 끌었다. 거대한 기둥은 다른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한립이 신중하게 거대 전함을 살피고 있을 때 명하신유와 저물탁을 다 살핀 농 가 노조가 입을 열었다.

“경천전주를 만드는 원재료 가격만 영석 일억 개는 넘습니다. 거기다 이것을 제련하는데 들어간 수사들의 심혈을 따지자면 가격을 배로 불러도 거래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이번 거래에서 이득을 보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명하신유는 물론이고 재료들도 지금은 영석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물건들입니다. 거래도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더는 수사의 시간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이후 마계로 진입하기 전 천연성으로 소식을 전해 주시면 시간에 맞춰 가겠습니다.”

한립이 가볍에 웃으며 수결을 맺어 전함을 축소해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인족이 마족과의 전투를 몇 차례 막아내고 마겁이 통제 가능한 수준이 되면 꼭 미리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 수사의 수행이면 마계행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무뚝뚝한 농 가 노조의 얼굴에 옅게 웃음기가 어렸다.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나기 전 괴이하게 허공 한쪽을 향해 미소 짓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그것을 본 농 가 노조가 안색이 달라져 굳어졌다. 그리고 푸른 빛줄기가 시야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한립이 힐끗 쳐다본 허공에서 공간파동이 일어나더니 농 가의 또 다른 태상장로인 흑포 사내가 빠져나왔다.

“저 자가 진작 제 존재를 알고 있었나 봅니다. 제가 새로 수련한 은신술은 농 형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인데 저 자의 이목을 피할 수 없다니요. 특수한 공법을 익히거나 강력한 보물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저 자의 의식이 나보다 강대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수행이 저렇게 빨리 느는 것을 보면 역천의 신통을 한두 가지 지니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어찌 되었든 저 자가 합류해 마계 행에서 인족의 실력이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영족의 성계 수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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