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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08화 (865/2,000)

1108화. 의탁

*

“대장로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만 거한은 희미하게 교룡의 허상이 보였고 동시에 정순한 마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설마 진마족과 연관된 자는 아니겠지요?”

“교룡과 마기? 아마 마족과는 큰 관련이 없을 것이다. 영계에서 마기를 빌려 수련하는 공법의 종류가 어디 한 둘이더냐. 게다가 본체가 교룡일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하고. 교룡 일족이 진마족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지 않더냐. 불구대천의 원수라 할 수 있는데 교룡이 마공을 수련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청삼 노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견문이 넓은 목족 대장로도 흑갑 거한의 본체가 영계에서 오래 전 멸종된 사룡(邪龍)의 후손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같은 시각, 백의 여인을 향해 못생긴 거한이 질문을 던졌다.

“성조대인, 흑령화가 쓸모가 있으면 전부 가져가시지 어째서 절반을 남겨두신 것입니까? 겨우 목족 대승기 수사가 성조대인께 위협이 되진 않을 텐데요. 대인의 실력은 성계 전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습니까.”

“그건 자네가 아직 어려 몰라서 하는 소릴세. 내 목족 대장로를 이길 자신은 있지만 그 자리에서 그를 격살할 수 있을지 확신은 할 수 없었네. 게다가 흑령화의 효과는 제한적이라 10송이가 넘어가면 내 부상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지. 그렇다면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백의 여인이 거한을 꼬마 취급하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제 풍원대륙도 거의 다 돌아본 것 같은데 아직 이렇다 할 수확이 없습니다. 그만 이곳을 떠나는 것이 어떨까요? 얼마 후면 성전(聖戰)이 시작될 텐데 그때 영계로 강림한 다른 성조대인들을 만나면 큰일이 아닙니까.”

거한이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어린 것이 겁은 많아서는! 그래, 확실히 이곳은 두 세계가 교차하는 접점 중 하나가 될 것이네. 허나 걱정할 것 없네. 성전이 발발해도 성조들은 기껏해야 분신으로 강림할 테니까. 또한 이곳에 오니 내가 찾으려는 물건이 가까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네. 이런 상황에 바로 떠날 수야 없지.”

백의 여인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소인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성조대인께서 원하시는 물건을 찾아내 대인의 회복을 돕겠습니다.”

“명라가 교육을 잘 시켜 놓았군. 자네가 내가 수행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준다면 그만한 보상이 있을 것이네.”

“감사합니다, 보화 성조님! 소인 이 한 몸 다 바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거한이 크게 기뻐하자 백의 여인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질풍처럼 인족이 머무는 곳으로 날아갔다.

* * *

산꼭대기에 서서 십여 리에 걸쳐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마반을 올려다보고 있는 한립의 표정이 퍽 심란해 보였다. 그 뒤로 백과아 등 제자들이 공손히 손을 모으고 그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자꾸나. 마겁이 반년 후에 도래할 것이 분명하다.”

“예, 스승님!”

한립이 소매 속에서 푸른 기운을 풀어 제자들을 휘감고 동부로 돌아갔다.

반 시진 후, 대청에는 한립과 은색 장삼을 걸친 미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줄곧 그의 비호를 받으며 수련에 매진해온 빙봉이었다. 빙봉은 한립이 내준 단약의 도움으로 이미 화신 후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녀 다음으로는 백과아, 해대소 그리고 기령자가 자리를 잡았다.

“한 형, 마반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바로 동부를 옮겨야 할까요?”

빙봉이 근심어린 눈빛으로 한립을 응시했다.

최근 수백 년 동안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근심걱정이 없는 나날들이었다. 수련하는데 필요한 단약이 풍족하게 쌓여 있어 수행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그런데 마겁이 곧 도래한다니 무척 아쉬웠다.

“거처를 옮기기는 해야 할 겁니다. 허나 다른 곳에 동부를 마련할 필요는 없고 바로 천연성으로 갈 생각입니다. 마겁이 발발하면 뭉쳐 싸워야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을 테니까요.”

“천연성으로요? 장로회에 들어가실 건가요?”

“아닙니다. 선자와 제자들은 천연성에 장기간 머물게 될 테지만 저는 몇 차례의 마족 공침을 막은 다음 은밀한 곳을 찾아 수련을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예? 어째서……. 설마 벌써!”

빙봉이 눈을 깜빡거리며 귀신 같이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맞습니다. 10년 정도 시간만 주어지면 합체 후기를 노려볼 수 있을 듯싶습니다.”

“너무 잘 되었습니다. 수사가 합체 후기 고비를 넘는데 도움을 드리기로 했으니 언제든 제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세요.”

빙봉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빙 선자께서 다른 의견이 없으시다니 바로 실행에 옮기겠습니다. 너희는 바로 제자들에게 명을 내려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거라. 3일 후에 출발한다. 과아는 제자들을 안배한 후에 바로 현무성으로 떠나도록 하고! 현무패황과 늙은 거북이 버티고 있으니 현무성도 마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중 하나일 게다.”

“존명!”

“감사합니다, 스승님!”

제자들이 공손히 인사를 했다.

3일 후, 기다란 통나무 배 여러 척이 산봉우리에서 날아올랐다. 가장 앞선 배 위에는 청년이 꼿꼿이 서서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상 무엇도 그의 심경에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처럼 평온해보였다.

나머지 배에는 수백 명의 수사들이 긴장과 설렘이 가득한 표정으로 올라타 있었다.

같은 시각, 한립의 동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작은 산맥에서도 수만 명의 범인과 수사들이 거대 비주(飛舟)들 위에 올랐다.

그들의 움직임으로 산맥이 꽤나 시끌벅적해서 소란스러워졌다. 그 중 한 척의 배 위에 열댓 명의 화신기와 연허기 수사들이 궁장 여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혈령 대인, 저희 허 가는 정말 성황에게 의탁하는 것입니까? 제 소견으로는 현무황성이 더욱 안전할 듯싶은데요.”

연허기 노인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내 판단을 의심하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질손(姪孫)이 어찌 감히 그런 불경을 저지르겠습니까.”

“흥, 너희가 무얼 알겠느냐. 현무성이 패황과 거북이 있어 천원성보다 안전한 대신, 천원성의 천원성황의 일맥은 나와 인연이 있다. 천원성 안에서 우리 허 가 자제들을 화살받이로 쓸 일은 없다는 말이지.”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도 모르고 제가 괜한 질문을 했습니다.”

궁장 여인의 말에 노인은 한시름을 놓았다.

“너도 허 가를 생각해 나선 것이니 이번만은 봐주겠다. 다시 경거망동한다면 혼쭐이 날 것이야.”

궁장 여인의 눈초리가 매서워지자 노인을 포함한 고계 수사들은 부들부들 몸을 떨며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반나절 후 크고 작은 백여 대의 전함이 어딘가로 날아갔다. 이제 시끌벅적 하던 산맥은 조용해졌다. 허 가가 오랜 세월 자리하던 산맥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인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 * *

두 달 후, 천연성의 거대한 성벽 위.

금색 장포를 걸친 노승이 눈을 가늘게 뜨고 형형한 눈빛을 번득이고 있었다. 노승 뒤로는 열댓 명의 고계 수사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멀리 하늘을 주시했다.

한식경쯤 하늘 저 끝에서 통나무배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여 있던 고계 수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자 노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헛기침 하나로 소란을 잠재웠다.

금포 노승이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멀리서 다가오는 전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 수사! 노승 금월이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금월선사의 목소리가 몇 척의 배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금월대사께서 친히 마중을 나와 주시고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가 미리 보내 놓은 서한을 받으셨나 봅니다.”

가장 앞선 배에서 푸른빛이 튀어나와 낭랑하게 대답했다. 푸른 둔광 속 인영은 한립이었다.

“허허허! 한 형께서 천연성을 도와주신다는 데 만 리 밖이라도 마중을 나가야지요.”

금월선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한립은 미소를 머금고 이동해 조용히 성벽 위로 날아들었다.

“대사의 풍채는 여전하십니다.”

한립이 성벽 위의 수사와 노승을 살피고는 먼저 포권을 했다.

“빈승의 나이에 풍채는요. 못 본 사이에 한 형께서는 중기 수행에 이른 것을 보니 이 늙은이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제가 수사의 나이였을 때는 겨우 연허기 수행을 지녔는데 말입니다.”

의식으로 한립의 수행을 살핀 금월선사가 화들짝 놀라 쓴웃음을 지었다.

“하하, 너무 겸손하십니다. 제가 본 것이 맞다면 대사의 두 눈에 영롱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 분명 강력한 신통을 대성한 징조입니다.”

“최근 보잘 것 없는 신통을 익힌 것은 사실이나 어찌 수사에 비할 바가 되겠습니까. 자, 빈승을 따라 장로전(長老殿)으로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한 형의 제자들은 따로 병사들을 시켜 안내하겠습니다.”

“그럼 대사께 수고를 끼치겠습니다.”

겸손한 노승의 태도에 한립도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는 고계 수사들을 시켜 뒤따르는 통나무배들이 성벽을 통과할 수 있게 명을 내리고는 한립을 데리고 천연성 안쪽으로 날아갔다.

한 시진 후, 한립과 금월선사는 거탑 안의 어느 전당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탁자를 물론 벽과 기둥 모두 옥으로 되어 있어 기품이 넘치는 곳이었다. 전당 안에는 그들 외에도 이미 세 명의 합체기 수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백발의 백색 장포의 노인과 검은 가죽 장포를 걸친 거한, 그리고 은색 가면을 쓰고 머리를 늘어트린 여인이었다. 그 중 백색 장포의 노인이 합체 중기를 대성했고 거한과 가면 여인은 합체 초기로 기이한 기운을 풍기는 것이 독특한 공법을 수련한 듯했다.

한립은 자리에 앉아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은색 가면 여인을 살폈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보였다.

“한 형, 은광 선자를 뵌 일이 있는지요?”

백색 장포 노인이 그것을 눈치 채고 미소 지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한 형, 무슨 일인지 말로 하시지요.”

그의 시선을 느낀 가면 여인이 은근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선자는 처음 뵙지만 제가 이전에 알던 이와 분위기가 너무 비슷해서 말입니다. 혹시 어느 종족 출신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한립이 바로 입 안을 맴돌던 질문을 했다.

“비슷한 분위기라면 아무래도 알고 지내던 분이 은랑족(銀狼族) 수사인가 봅니다. 은광선자께서는 은랑족의 양대(兩大) 합체기 수사 중 한 분이니까요.”

흑포 거한이 끼어들어 답했다.

“언 형 말씀대로 저는 은랑족 출신입니다. 수사께서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요? 제가 알 수도 있어서요.”

은광선자가 사정을 듣고 표정을 풀었다.

“은랑족에 ‘영롱’이라는 수사에 대해 아시는지요? 잘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한립은 이때다 싶어 바로 은월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의 수행에 이제 천규랑왕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은월에 대해서는 합체기에 들어선 이후 줄곧 소식을 알아보려고 했으나 은랑족이 워낙 외부와 접촉하지 않아 들려오는 소문도 거의 불확실한 것들뿐이었다.

“영롱이요? 수사께서 영롱을 아십니까. 아, 한 형은 비승수사로 들었는데 혹시…….”

은광선자가 깜짝 놀라 말을 하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이들의 이목을 고려한 것이다.

“은광 수사께서 영롱을 아시나 봅니다.”

한립은 내심 무척 반가웠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물었다.

“저와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동생입니다. 영롱의 근황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함부로 말씀을 드리기 어렵군요. 그저 잘 지내고 있고 최근 연허 후기에 이렀다는 것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은광선자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단 말입니까. 이곳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듯하니 이틀 후에 선자를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한립이 침음하다 입술을 달싹여 은광선자에게만 전음을 보냈다. 은광선자는 잠시 주저하는 듯 했으나 결국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장로들은 호기심이 일었지만 분별 있게 끼어들지 않고 마겁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들은 한립이 천연성에 힘을 보태기로 한 것에 환영의 뜻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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