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화. 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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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자의 말대로 명하신유로 개선된 몸은 합체기 후기 고비를 넘는데도 유리해졌다. 지연 사대요왕들이 명하신유를 구하기 위해 명하의 땅에 쳐들어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법력 증진용 단약까지 밥 먹듯 먹으니 법력이 빠르게 늘어났다. 현재 그는 합체 중기 최고봉까지 법력을 쌓아 십여 년의 시간만 있으면 후기 고비를 넘볼 수 있을 듯했다.
한립이 생각을 정리하고 두 손을 무릎에 얹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밀실 대문에서 하얀 빛이 반짝이고 투명한 파동이 일었다. 한립 본체가 움찔해 소매를 펄럭였다.
휙!
하얀 빛의 장막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불덩이가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의식으로 불덩이 안을 살핀 그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펑!
한립은 다섯 손가락으로 불덩이를 쥐어 멸하고는 난색을 표했다.
“마반이 이렇게 일찍 나타나다니! 아무래도 이제 그만 나가봐야겠구나.”
한립 본체가 영기의 빛을 방출하자 두 명의 나머지 ‘한립’이 허상으로 변해 그의 몸으로 뛰어들었다. 나머지 ‘한립’과 하나가 된 한립이 몸을 일으켜 푸른 거대 솥을 향해 손짓했다.
솥이 작아져 소매 속으로 들어가고 그의 신형이 흐릿해져 밀실 밖으로 사라졌다.
* * *
만황세계 심처, 거대한 산봉우리 아래 백색 장포 청년이 뒷짐을 쥐고 만황 고대 짐승 세 마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쌍두거인(雙頭巨人)은 머리를 산발한 채 새까만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나머지 두 마리 고대 짐승은 크고 작은 새빨간 거대 구렁이들이었다. 큰놈은 쌍두 거인보다 몸집이 컸고 작은 놈은 크기가 쌍두거인과 비슷했는데 모두 입에서 붉은 독을 뿜고 있었다.
고대 짐승들은 긴장된 눈빛으로 청년을 주시했다.
“이틀 전, 일대에 사는 모든 짐승들은 전부 떠나라고 경고했을 텐데? 나머지 짐승들은 얌전히 자리를 비켜주었는데 너희 셋만 꾸무럭거리고 있구나. 설마 너희 셋이 힘을 합치면 나를 대적할 수 있다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아예 가지 말고 내게 정핵(晶核)과 혼백을 바치거라!”
얼굴에 괴이한 금빛 문양이 새겨진 백포 청년이 차갑게 소리쳤다. 고대 짐승들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커다란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치며 포효했고, 새빨간 구렁이들은 보랏빛 혀를 날름거리며 쉭쉭!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그 모습에 백포 청년은 냉소하며 한 발로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펑!
하얀 한기가 피어오르고 주변에 투명한 눈꽃이 아름답게 반짝이더니 그 속에서 새하얀 몸을 지닌 지네가 튀어나왔다.
여섯 개의 날개를 지니고 새빨간 눈을 번득인 지네는 날카롭게 울며 쌍두거인 만하게 커져 입에서 대량의 한기를 뿜어냈다. 한기의 바다가 세 거대 짐승들을 향해 퍼져나갔다.
짐승들은 깜짝 놀라 한기의 무서움을 알기라도 한 듯 서둘러 그것을 막아내려 했다. 쌍두거인은 검은 몽둥이를 맹렬하게 휘둘러 돌풍을 만들어냈고 새빨간 구렁이는 입을 벌려 붉은 기운으로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하얀 한기는 붉은 기운 돌풍을 순식간에 없애고 세 짐승을 얼음 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거대 지네는 짐승들의 위를 날며 날개를 털어 하얀빛을 쏘아 보냈다.
콰르릉!
하얀빛들이 번개처럼 얼음조각을 뚫자 짐승들은 산산이 부서져나갔다. 짐승들의 혼백이 겁에 질려 달아나려했지만 육익(六翼) 지네가 입을 벌려 숨을 들이마시자 무형의 힘이 그것들을 빨아들였다.
얼음조각으로 부서진 짐승들의 잔해와 세 개의 혼백이 그대로 지네의 거대한 입 속으로 사라졌다.
하얀빛이 반짝이고 지네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자리에 나타난 백포 청년은 냉랭히 주변을 훑고 거대한 산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빛줄기로 변해 산 중턱에 오른 청년은 다시 천연 동굴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속 울퉁불퉁한 자홍색 암벽을 보는 그의 눈길이 뜨거워졌다.
“하하! 자음광맥(紫陰鑛脈) 같은 희귀한 광맥을 찾아내다니, 진령의 몸을 이루는 일이 머지않았구나!”
그는 땅을 박차고 다시 지네의 모습으로 돌아가 입에서 반짝이는 기운을 뿜어 암벽을 공격했다. 자홍색 암벽은 풍화가 되는 것처럼 서서히 녹아 검은 구멍이 뚫렸다.
지네가 그 안으로 뛰어들자 동굴 안에서는 폭음이 끊이지 않았다.
* * *
심해(深海)의 궁전 안 밀실.
무수히 많은 핏빛 실로 된 누에고치가 꿈틀거리며 빠르게 부풀어났다. 표면의 핏빛 주술문자들이 응결되고 순식간에 방대하던 밀실이 누에고치로 가득 차고 말았다.
고치 속에서 희미한 검은 그림자가 요동쳤다.
콰르릉!
거대한 핏빛 고치가 터져나가고 그 안에서 가부좌를 튼 나체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옥처럼 매끄러운 청년의 얼굴은 아름다웠고 몸에는 커다란 금빛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연꽃잎이 청년의 몸을 뒤덮고 있어 괴이한 느낌을 주었다.
눈을 꼭 감고 아무런 반응이 없던 그가 한참 만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조용히 눈을 떴다. 청년의 눈동자는 굉장히 검어 마치 신비한 기운을 품고 있는 듯했다.
화륵! 화륵!
놀랍게도 청년의 두 눈에서 화염이 일었다. 금빛과 은빛 화염이 그가 고개를 돌릴 때마다 깜빡거렸다. 그의 시선이 제일 먼저 닿은 곳은 밀실 구석의 어떤 물건이었다.
탁자에 놓은 수정 구슬에 희미하게 영기의 빛이 어려 있었고 무언가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은빛 찬란한 연꽃이 둥실 떠있는 모습이었다.
청년의 눈에서 금빛 화염이 번뜩이고 몸에서 한기가 새어나와 주변을 휘감았다.
파앗.
그는 수결을 맺고 금빛 화염을 불러내 화려한 금색 장포를 만들어 몸에 걸쳤다.
쉬익!
이어 수정 구슬이 끌려와 그의 몸 안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노부가 선계에서 저걸 구하려다 죽을 뻔했는데 감히 겁도 없이 그걸 갖고 달아나다니. 누군지 모르겠지만 기필코 찾아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주마! 몸도 완성되었으니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겠지!”
청년은 불같이 화를 내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의 손바닥이 교차하며 금빛 구슬이 나타나 미친 듯이 크기를 키웠다.
쿠콰콰쾅!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해의 신비 궁전은 금색 빛기둥에 사방팔방이 뚫려 무너져 내렸고, 그 속에서 금포 청년이 떠올라 해수면 위로 치솟았다.
금빛으로 변한 그는 풍원대륙을 향해 날아갔다.
* * *
풍원대륙 목족(木族) 영토. 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맨발로 비취색 거목 위에 서서 푸른 장삼을 걸친 노인과 대치하고 있었다. 여인 아래에는 검은 갑옷을 입은 거한이 창백한 얼굴의 중년 남녀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를 둘러싼 사내와 여인은 거한이 팔짱을 끼고 흉흉한 눈빛을 보내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사가 누군지 모르나 목족 성지에 몰래 침입해 흑령화(黑靈花) 열댓 송이를 가져가는 것은 너무 한 처사가 아닙니까. 목족에는 대승기 수사가 없는 줄 아셨습니까?”
청삼 노인이 백의 여인을 노려보았다.
“본 궁도 목족에 대해 알아보기는 했습니다. 당신이 목족의 대장로겠군요! 그러나 교 수사, 겨우 흑령화 몇 송이에 그렇게까지 화를 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백의 여인은 강적을 앞두고도 태연했다.
“말을 참 교묘하게도 하십니다. 흑령화는 목족의 성수인 흑령수(黑靈樹)로 만년에 겨우 백여 송이를 피워내는 불가사의한 효과를 지닌 영약입니다. 수사가 남은 흑령화의 절반을 가져가 버리면 노부의 체면이 어찌 되겠습니까.”
성지와 가까운 곳에서 수련하던 목족 대장로는 우연히 출관할 일이 없었으면 눈앞의 여인이 이곳에 침입한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당장 도적을 잡으려 했지만 백의 여인의 법력이 심후해 대승기 수사인 그 조차 긴장감이 들어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체면이라! 본궁이 흑령화를 절반만 가져간 것도 충분히 사정을 봐준 것입니다. 수사의 수행이 약하지는 않으나 내 적수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비키시지요?”
백의 여인이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청삼 노인을 도발했다.
“하하! 수사가 우리 목족을 이리 무시한다면 저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겠습니다. 실력을 겨루어 저를 이긴다면 목족 영통에서 감히 수사를 건드릴 자는 없을 겁니다.”
청삼 노인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을 흘렸다.
“수사가 본 궁의 적수가 아닌 바에야 다른 목족이 내게 덤빈다는 것은 어차피 자살 행위 아닙니까. 그래서 여기서 실력을 겨루자는 말인지요?”
백의 여인이 빙긋 웃자 안 그래도 청아한 얼굴이 만개한 꽃처럼 화사했다. 목족 대장로는 순간 멍해졌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굳혔다.
“당연히 목족 성지에서 그럴 수야 없는 법입니다. 자신이 있으시면 저를 따라오십시오.”
청삼 노인이 고공을 향해 소매를 펄럭여 사발 굵기의 푸른 빛기둥을 쏘아 올렸다.
콰쾅!
빛기둥이 거대한 검으로 변해 허공을 갈랐고 하얗게 공간균열이 벌어져 안에서 희미한 노란빛이 새어나왔다. 노인이 먼저 공간 균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것을 본 백의 여인이 비웃는 듯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잠시 다녀올 테니 자네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예, 대인!”
백의 여인이 발끝으로 허공을 사뿐히 밟자 발밑에서 분홍색 꽃이 피어나 그녀를 데리고 공간균열 속으로 올라갔다.
콰릉!
잠시 후 균열 속에서 폭풍이 몰아치듯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영기의 빛이 어른 거렸다. 안에서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는 듯했다.
목족 남녀는 걱정스런 듯 시선을 교환했으나 거한은 백의 여인에 대한 믿음이 충만한지 그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만 보았다.
일다경이 지났을 쯤 갑자기 공간균열 내부가 고요해졌다.
“…….”
중년 남녀가 초조한 기색으로 균열을 주시하고 있을 때 흑갑 거한이 그들을 향해 조소했다.
잠시 후, 공간균열 속에서 푸른빛이 번득이고 청삼 노인이 튀어나왔다.
겉보기에는 멀쩡했지만 안색이 창백했고 균열을 돌아보는 눈빛에 희미하게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그 뒤로 백의 여인이 꽃을 밟고 표표히 균열을 빠져나왔다. 들어갈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가보아도 되겠지요.”
“목군, 목교! 명을 전해라. 두 분이 목족 영역을 벗어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앞을 막지 말라 하거라.”
목족 대장로가 어두운 얼굴로 이를 악물고 명을 내렸다.
“허나 대장로님, 흑령화는 그럼 어찌…….”
“닥치거라! 감히 내 명에 토를 다는 것이냐?”
목족 사내의 말에 노인이 버럭 화를 냈다.
“아닙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놀란 사내가 얼른 허리를 굽혔다.
“어서 소식이나 전하거라.”
이번에는 목족 사내도 머뭇거리지 않고 여러 푸른 부적들을 꺼내들었다. 그가 허공을 손가락으로 이리 저리 긋자 부적들이 푸른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백의 여인은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거한에게 손짓해 말없이 몸을 돌려 떠나갔다. 이에 흑갑 거한은 고개를 쳐들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검은 기운으로 변해 그 뒤를 따랐다.
흑갑 거한의 조롱에 청삼 노인은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지만 백의 여인과 거한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교, 네가 수련 중인 청령혜안(靑靈慧眼)으로 보건데 저들이 어떠하더냐?”
“청령혜안을 극성으로 끌어올렸지만 송구하게도 별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대승기 여인은 꽃잎 허상에 가려져 본체를 파악할 수 없었고요. 설마 그녀도 목령(木靈)이 수련을 쌓아 지금의 경지에 이른 것일까요? 저희 목족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여인은 절대 우리 목족인이 아니다. 나무 속성 기운을 풍기는 것은 아마 수련한 공법 때문이겠지. 마겁이 도래하기 직전 목족 인근에 저런 실력자가 나타난 것이 복인지 화인지 모르겠구나.”
청삼 노인이 어두운 얼굴로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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