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6화. 마반(魔斑)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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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사매가 스승님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겠군.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 봐야 결론이 나질 않네. 게다가 마겁이 수십 년 앞으로 다가왔으니 아무리 합체 후기를 준비하신다고 해도 마겁이 도래하면 어쩔 수 없이 출관하셔야 할 거야.”
“그건 그렇지. 마겁이 조금만 더 늦게 닥쳐와도 스승님이 후기 고비를 넘기실 텐데 아쉽게 되었어.”
기령자가 손을 흔들자 해대소가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되었네! 스승님이 어떻게 수련을 하시든 우리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마겁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보전할 준비를 하면 되네. 그렇지, 사매는 천연성으로 들어올 생각이 없는가? 마겁이 도래하면 인족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아마 천연성일 거야. 사매는 사부님의 제자로 알려져 있으니 장로회에서도 섭섭지 않게 챙겨줄 것이고.”
기령자가 정색하며 백과아를 바라보았다.
“기령자 사형의 말대로야. 나와 사형은 마겁이 발발하면 문하의 모든 제자들을 데리고 천연성으로 갈 생각이네. 가장 하급 병사로 머문다 해도 우리가 돌봐주면 화살받이로 쓰일 일은 없겠지. 사매도 함께한다면 더더욱 든든할 거야.”
해대소도 활짝 웃으며 동의했다.
“천연성으로요?”
“혹시 다른 계획이 있는가? 이런 일은 미리미리 결정을 내려놓는 것이 좋을 거야. 폐관에 들어가기 전 스승님이 마겁이 도래한 이후에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 우리 곁에 머물 수 없다고 하시기도 했고.”
그녀가 주저하는 것을 눈치 챈 기령자가 물었다.
“사실 얼마 전 아버지께 서신이 왔어요. 할머니께서 가솔들을 모두 데리고 현무황성으로 이주 하셨다고요. 마겁이 벌어졌을 때 혈육과 떨어져 서로 걱정하느라 전전긍긍하느니 현무황성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그런 일이 있었구만! 현무황성이면 안심이긴 하지. 사매가 그곳으로 간다면 우리도 마음이 편할 거야.”
“백 사매, 현무황성으로 갈 때 류풍과 부운을 데려가게. 결단기 수사들이니 곁에 두면 도움이 될 거야.”
해대소와 기령자가 번갈아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이 가장 아끼는 제자들을 어찌 제가 데리고 가겠어요. 결단기는 아니라도 저를 따른 지 오래된 시녀들이 있으니 걱정 마세요. 축기기 수행을 지녔어도 말이 잘 통한 답니다.”
백과아는 사형들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하하, 그렇다면 나와 해 사제도 걱정하지……!”
콰르릉!
기령자가 마주 웃으며 무어라 말하려는데 돌연 고공에서 벼락 소리가 들리고 산이 흔들렸다. 그들은 안색이 확 달라져 동시에 고개를 쳐들었다.
구름 한 점 없던 맑은 하늘에 거대한 회색 반점이 떠올라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동시에 강렬한 공간파동이 회색 반점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갔다.
“마반(魔斑)! 마겁 도래를 알리는 마반일세!”
안색이 창백해진 해대소가 소리쳤고, 백과아와 기령자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난색을 표했다.
“마겁이 예상보다도 더 빨리 도래할 줄이야…….”
“저게 마반인지 아닌지는 천연성에서 수사들을 파견해 검증할 것이네. 독특한 천기현상일 수도 있으니까.”
백과아의 중얼거림에 기령자가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확인하고 말고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마반이라면 이곳에서만 나타난 현상은 아닐 텐데!”
“그렇겠지. 아마 지금쯤 삼경 곳곳의 수사들도 비슷한 광경을 보고 있을 것이야.”
“사형들, 너무 걱정 마세요! 마반은 마계의 침략이 시작되었다는 징조일 뿐, 계면 압력이 약화되어 마족들이 영계로 진입하려면 반년은 걸릴 것입니다. 그동안 인족도 충분히 준비를 하면 되고요.”
백과아가 사형들을 안심시켰다.
“그 말도 맞지만 마족들은 마반이 나타는 곳을 위주로 결집해 처음 몇 번의 전투에서 맹공을 가했다고 했네. 얼마나 많은 성이 화를 입을지 걱정이 되는구만.”
기령자가 쓴웃음을 머금었고 백과아와 해대소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그때 멀리서 빛이 번뜩이고 금색 전함이 날아들었다. 그 위에 선 열댓 명의 병사들이 검푸른 갑옷을 입고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마반 아래에서 전함을 멈춘 병사들은 진법 깃발이며 원반을 던져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일시에 어두컴컴하던 하늘이 요란한 빛으로 번득였다.
“천연성 순찰병들이 도착했군. 가게, 우리도 어서 동부로 돌아가 스승님께 이 일을 고해야지 않겠는가.”
기령자가 조용히 제안했다.
* * *
은은한 하얀빛이 드리운 밀실 안, 사람 키만 한 푸른 솥이 허공에 둥실 떠있었다. 푸른 솥을 중심으로 세 명의 ‘한립’이 가부좌를 하고 둘러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하나는 금빛 찬란한 몸에 검은 기운을 두르고 있었고, 또 다른 하나는 녹색 피부에 보라색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은 등 뒤로 금색 주술문자를 머금고 금빛 광채를 발산했는데 그가 바로 진짜 한립이었다.
금빛 광채의 중심에는 72개의 비취색 비검들이 서로의 꽁무니를 쫓으며 빙글빙글 날아다니고 있었다. 세 명의 한립이 동시에 눈을 뜨고 두 팔을 뻗어 허공을 때렸다.
쿵!
커다란 솥뚜껑이 하늘로 솟아오르자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하얀 실들이 빠져나왔다. 이에 세 명의 한립이 동시에 한 손가락으로 솥을 가리켰다.
솥 안에서 튀어나오던 하얀 실들은 무형의 장막에 가로막힌 것처럼 허공에 멈춰 섰다.
웽! 웨웽!
바로 그때 솥 안에서 열세 개의 금빛 덩이들이 날아올랐다. 보라색 반점으로 뒤덮인 딱정벌레들은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며 달려들어 서로 갉아먹으려 들었다.
웽웽웽!
엄청난 살기가 솥 주변을 휘감았다.
그것을 본 세 ‘한립’이 재빨리 법결을 날렸다.
웽!
법결을 맞은 영충들이 애달픈 소리를 내며 흩어지자 세 한립의 주문과 수결이 또 달라졌다. 그러자 딱정벌레들은 금제로 인해 통제를 받는지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흩어져 분출했던 하얀 실들을 다시 갉아먹었다.
하얀 실들이 전부 사라졌을 때, 녹색 피부 ‘한립’이 입을 벌려 콩알 크기의 빛을 푸른 거대 솥으로 분출했다. 은빛은 손바닥만 한 은색 꽃들로 피어났는데 꽃잎의 핏빛 반점들이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딱정벌레들은 은색 꽃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꽃잎을 마구 갉아댔다. 한식경이 지나 수천 송이의 은색 꽃을 포식한 딱정벌레들이 몸집이 한층 커지고 보라색 무늬도 짙어졌다.
화륵.
금빛 ‘한립’이 새빨간 눈동자 속에서 검은 화염을 분출해 영충들을 검은 불바다 속에 가두었다.
그러나 영충들은 두려워 않고 크게 입을 벌려 검은 화염을 삼키기 시작했다. 검은 화염이 점점 줄어들다 마지막에는 불씨 하나 남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한립이 낮게 기합을 넣고 천둥소리 속에서 금빛 뇌전을 분출했다. 그의 소매를 빠져나간 금빛 뇌전 그물은 열댓 마리 딱정벌레들을 덮치고 콰르릉! 거리는 폭음을 내뿜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금색 영충들은 뇌전 공격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지를 쭉 뻗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뇌전들을 받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표면의 보라색 무늬가 깜빡깜빡 거릴 때마다 영충들의 표정도 한결 편해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뇌전이 사라지고 등 뒤로 금빛 광채를 띠운 한립이 72자루의 푸른 비검들을 날렸다.
채채채챙!
푸른 실로 변한 비검들이 딱정벌레를 가를 때마다 강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딱정벌레들은 강한 힘에 이리 저리 튕겨나가기는 해도 전혀 칼에 베이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공격당한 영충들은 분노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날개를 빠르게 파닥거려 신형이 모호하게 변했다.
이제 푸른 실들이 아무리 빨리 날아들어도 분분히 허공을 가를 뿐 영충들을 맞추지 못했다. 멀리서 푸른 실들을 쏘아 보낸 한립이 안색을 굳히고 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댕!
맑은 종소리가 울리고 솥 표면에 주술문자들이 떠올라 연기처럼 영충들을 감쌌다. 영충들은 연기 때문에 달팽이보다 더 느리게 움직였다. 이에 푸른 실들이 열댓 마리의 보라색 무늬 딱정벌레들을 미친 듯이 채찍질했다.
채채채채채챙!
금속성의 충돌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순식간에 영충들이 눈부신 빛을 뿜어냈고 날카로운 울음소리도 더욱 거세졌다. 이에 세 명의 한립이 동시에 수결을 맺어 솥으로 불어넣던 법력을 거두고 푸른 실을 회수했다.
연기에 묶여 꼼짝 못하던 딱정벌레들이 자유를 되찾고 열 받은 듯 웽웽거렸다. 전혀 힘든 기색도 없이 앞 다퉈 그들을 괴롭힌 세 한립을 향해 날아들었다.
“멈추어라.”
세 한립은 당황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웅!
그 말에 빠르게 쇄도하던 영충들은 허공에서 비틀비틀 허우적거렸고 그와 동시에 푸른 솥이 하얀 기운을 내뿜어 보라색 무늬 딱정벌레들을 휘감아 돌아갔다.
영충들은 내키지 않아도 얌전히 솥 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본 한립이 탄식했다.
“시간이 갈수록 통제하기가 어렵구나! 비술에 적힌 대로 주인 의식을 다시 치러야겠어. 그보다 영충들의 실력이 엇비슷해서 서로 갉아먹지 못하니 충왕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겠어.”
한립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명하의 땅을 떠나 재료를 수집하며 백년 만에 인족으로 돌아왔다. 마겁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는 제자들에게 당부를 하고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이번 폐관 수련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명하신유를 이용해 체질을 개선해 하루 빨리 법력을 중기 최고봉으로 끌어올려 후기 고비에 도전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부유족 비술대로 충왕을 길러내는 것이었다.
마겁이 도래하기 전 합체 후기에 이르고 서금충왕이 탄생한다면 적어도 마족에게 목숨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부유족 태상장로가 냉큼 비술을 내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립은 주저하지 않았다.
인족으로 돌아오는 백년간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을 응용해 자신만의 배양법을 연구해냈기 때문이었다. 부유족 비술과 큰 줄기는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부유족 비술에서는 영약이 너무 귀해서 단 한 번만 먹여도 된다고 적혀있는 것을 그는 신비한 병으로 대량 생산해냈고 틈만 나면 서금충들에게 먹였다.
또한 영충들을 단련시키는 부유족의 다른 방법을 건너뛰고 그가 지닌 뇌전의 힘을 사용했다. 물론 이런 개선이 얼마나 더 도움이 될지는 하늘만이 알 일이지만 최소한 부유족 비술보다는 서금충왕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었다.
과연 2백 년 만에 일부러 남겨 놓은 서금충 성체 만 여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시 변이를 일으켰다. 특수한 방식으로 서금충들을 자극해 서로 갉아먹도록 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문하의 제자들을 시켜 막대한 돈을 들여 눈앞의 푸른 거대 솥도 사들였다. 적을 공격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전문적으로 제련해서 서금충들을 통제하는 데에는 유용했다.
결국 수만 마리 변이 서금충들은 지속적으로 서로를 뜯어먹고 지금은 눈앞의 열세 마리 보라색 무늬의 자문서금충(紫紋噬金蟲)밖에 남지 않았다.
이 새로운 서금충들은 서금충왕이 될 후보들로 각각의 신통이 대단했고 열세 마리가 협공을 하면 평범한 합체 중기 수사를 대적할 만했다.
그런데 신이 난 것도 잠시 문제가 발생했다. 열세 마리의 실력이 엇비슷해 아무리 애를 써도 서로를 잡아먹지 못했던 것이다.
충왕의 탄생은 서로를 살육하는 과정이 필수였기에 한립은 답답하기만 했다. 일단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어 다양한 방법으로 자문서금충들을 성장시키기로 했다.
서로 잡아먹기 전에 실력을 높여두면 충왕이 탄생할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게다가 자문서금충들은 겨우 13마리였기 때문에 쉽게 부릴 수 있어 서금충 수만 마리를 데리고 있을 때보다 훨씬 실용적이었다.
그리고 한립은 그동안 명하신유를 아낌없이 써서 체질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경지까지 개선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천지원기 관련 수련 속도가 이전보다 3할은 빨라졌다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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