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5화. 문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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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회수한 한립의 얼굴이 묘했다.
“허허, 노부가 내준 비술에 문제라도 있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비술이 제가 영충을 기르며 이전에 품었던 여러 가지 의문점들을 해소해 주어 놀라고 있었습니다.”
한립은 옥간을 소매 속에 집어넣고 공손히 답했다.
“벌써 어느 정도 내용을 파악한 것을 보면 자네도 영충에 대한 이해도가 높구만.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서금충왕이 대단하기는 해도 기연이 따르지 않으면 기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니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네.”
“조언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허령의 의미심장한 말에 한립이 고개를 숙였다.
“알면 되었네! 거래도 끝났겠다, 이제 흑풍각에서 나가보게. 나도 곧 따라 나설 것이야. 금염과 청원자 수사가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예,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한립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누각 밖 검은 기운 속으로 날아올랐다.
“크큭, 서금충왕! 겨우 합체기 수사가 서금충왕을 키워보겠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우리 부유족이 벌써 서금충왕을 여럿 만들어 영계를 재패했을 것이다. 명하신유가 살짝 아깝기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서금충을 얻었으니 다음 천겁을 위한 만령산(万靈傘)은 문제없겠지. 성체 서금충들의 몸은 거의 금강불괴에 가까우니 이것들로 만든 만령산도 엄청나게 단단할 것이야.”
노인이 한립의 둔광이 사라진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는 서금충이 가득한 영수환을 꺼내 수결을 맺었다. 영기의 빛이 번득이고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영수환을 새까만 얼음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파팟!
노인은 검은 얼음 덩어리 위에 남색 부적들을 붙이고 다시 회수했다.
* * *
반 시진 후, 금빛와 푸른빛이 섬의 보호막을 떠나 어딘가로 날아올랐다. 한립과 청원자였다.
한립이 먼저 흑풍각에서 나왔지만 금염후와 청원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거래에 대해 일절 묻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허령 노인까지 나오자 한동안 한담을 나누던 그들은 금염후가 빚은 술을 맞보고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십여 일 후, 한립의 눈에 익숙한 산봉우리가 들어왔다. 이때 청원자가 돌연 둔광을 멈췄고 한립도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한 수사, 이번 여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노부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보네. 난 돌아가는 대로 산을 봉쇄하고 다음번 대천겁 준비에 매진할 생각이라 수사를 오래 남겨둘 수 없네!
요아도 합체기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말이지. 아이가 순조롭게 합체기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쉽게 이곳을 떠나게 하지 않을 것이야. 내 말뜻을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저는 선배님의 거처로 가지 않고 여기서 바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를 대신해 두 소저께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청원자의 말에 한립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지만 곧바로 예를 취했다.
“허허, 노부를 정 없다 여기지는 말아주게. 수행의 중요한 기로에 선 요아가 수사를 자꾸 만나봐야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그런 것이니. 괜히 심마라도 생겼다가는 일이 어렵게 될 것이야. 노부가 이리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군.”
“오해십니다, 선배님. 저는 원요 소저를 벗으로 여길 뿐 다른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얼굴을 푼 청원자의 해명에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수사가 우리 요아를 벗으로 여기는 것은 알겠네. 허나 딸아이의 마음도 같을까?”
청원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시선을 보냈다.
“제가 어떤 말씀을 드려도 믿기 어려울 거라는 것은 압니다. 어찌 되었든 선배님 덕에 명하신유를 얻었으니 그 은혜만은 마음 속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다음번에 다시 뵈었을 때는 대천겁을 이겨내셨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한립은 이 일에 대해 오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곧바로 허리 숙여 작별을 고했다.
“나 역시 수사가 빠른 시일 내로 대승기에 이르기를 고대하겠네!”
청원자 역시 진지한 얼굴로 한립에게 포권을 했다. 이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처음 이곳에 들어온 공간균열이 있는 장소로 날아갔다. 이전에는 수행이 부족해 청원자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합체 중기에 이른 지금은 공간균열을 통해 충분히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명하신유까지 얻었으니 합체 후기에 이르는 것은 시간문제이겠구나. 허나 대승기에 이르려면 또 다른 기연이 필요할 텐데……. 수많은 보물과 비밀을 지닌 녀석이라 언제고 정말 대승기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지. 이번에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와주었으니 언젠가 내가 도움을 받을 날이 올지도 모르겠구나.”
청원자가 멀리 사라지는 한립을 보고 탄식하고는 곧바로 둔광을 일으켜 동부로 날아갔다.
반나절 후 명하의 땅 어딘가에서 극심한 공간파동이 퍼지더니 회색 안개 속에서 새까만 공간균열이 나타났다. 귀청을 때리는 천둥소리가 울리고 오색 빛기둥이 날아올라 그 안으로 사라졌다.
공간파동이 약해지며 거대 균열이 닫히자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 3백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장구한 역사를 지닌 영계에서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평범한 범인에게는 엄청나게 긴 시간이었다. 몇몇 종문과 세가들은 그동안 몇 대에 걸친 후인과 제자들을 양성했고, 인족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인족 삼경 곳곳에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무리를 지어 돌아다녔고, 곳곳에 방어용 요새와 같은 거대한 성들이 들어섰다. 거대 성 중심에는 각양각색의 금제진법들이 빼곡하게 펼쳐져 있어 무단으로 성에 침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한 평소라면 한 번 만나기도 어려운 결단기와 원영기 수사들이 범인들 앞에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고 심지어 화신기 수사도 얼굴을 내밀었다.
게다가 연체사들의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해 이전에 열댓 배가 넘었다. 범인들도 스스로 목숨을 보전할 최소한의 힘을 기른 것이다. 범인들은 대대손손 힘을 키우며 곧 마겁이 닥칠 거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백 년 전 성도에서 파견된 사자들이 성에 나타나 2백 년 내로 마겁이 강림할 것이며 이전보다 훨씬 흉흉할 거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공표했기 때문이다.
멸망의 위기에 인족은 범인과 수도자를 가리지 않고 경악했다. 모두 정신없이 마겁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고, 시장에서는 각종 재료와 영약이 급속도로 고갈되어갔다.
이제 거대 종문이나 세가의 약재 밭에서나 종자로 쓰일 영약만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실력을 감춰두었던 각종 세력들이 이제는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강력한 보물과 공법을 내놓았고, 수도자들 사이에도 다양한 비술로 단시간 내로 수행을 높이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당연히 인족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세력은 천연성과 삼대 황성이었다.
천연성은 인요족의 정예병들이 모여 있고 장로회 합체기 수사 열 명이 머물러 든든했고, 삼대 황성은 삼경의 고계 수사들이 결집하고 삼황이 머물렀기에 마찬가지로 믿음이 갔다.
그 다음 세력으로는 십대 종문과 삼대 진령세가 등이었다. 이들은 범인들과 산수들을 모아 겨우 몇 백 년 만에 인구를 열배 이상 늘렸고, 거의 포화상태에 이를 때까지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사의 각오로 배수진을 친 것은 인족뿐만이 아니었다. 요족과 인근의 이종족들도 안간힘을 쓰며 실력을 키웠고 서로 빈번히 교류하며 마겁에 관한 정보를 교환했다.
인족 전체가 전쟁 준비에 들어간 이때, 천연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맥에서 3, 4백 명의 수사들이 정상에 모여 백의 여인의 설법을 듣고 있었다.
여인은 열일곱이나 여덟 살 밖에는 돼 보이지 않았지만 우윳빛 연꽃 환영이 층층이 몸을 가리고 있고 미간에 짙은 남색 연꽃 표식이 새겨져 있어 꼭 천상의 선녀처럼 보였다.
수사들의 성별과 나이는 천차만별이었으나 대부분이 도사의 복색을 하고 있었고, 일부는 남색 도포에 동일하게 검은 메고 있어 한 종문에 속한 수사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수행은 그리 높지 않아 극소수가 결단기 수사였고 나머지는 전부 축기기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다음 번 공개 설법은 세달 후에 너희 사백께서 맡아 하실 예정이니 돌아가 수련에 매진하거라.”
한 시진이 흐르자 여인은 평온한 말투로 수사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항시 사고(師姑)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수백 명의 수사들이 그녀를 향해 예를 올리고 법기를 타거나 둔술을 일으켜 자리를 떠났다. 백의 여인은 그들이 멀어지기를 기다려 한쪽의 굵은 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해 사형, 제자들은 사형과 기령자 사형이 거두어들이고선 어째서 설법은 항상 저만 시키세요? 너무들 하십니다. 정말!”
“나는 제자들을 거둘 생각이 없었는데 대사형에게 속아 저 골칫거리들을 받아들인 것 아닌가. 게다가 사매의 설법 솜씨가 나와 대사형 보다 백배는 나아 문하의 제자들이 겨우 수백 년 만에 눈부신 성취를 보여주었단 말이지! 심지어 결단기 수사도 여럿 나왔으니까.”
나무 아래에서 남색 장포를 입은 사내가 실실 웃으며 나타났다.
“제자들이 빠른 성장을 보인 것은 전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단약 덕이지요. 우리에게는 이미 쓸모가 없는 것들이라 두 분의 제자들만 호강합니다. 기령자 사형이야 무해관의 미래를 위해 제자들을 거둬들인다지만 사형은 왜 거기에 장단을 맞추고 그래요?”
“사매, 그건 절대 나를 탓할 일이 아니야. 기령자가 고의로 날 도발해서 이렇게 된 것 아닌가.”
백의 여인의 타박에 남포 사내가 울상을 짓는 척했다.
“하하, 사제 그렇게 말하면 양심에 찔릴 텐데? 제자들이 스승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입이 찢어져라 웃는 것을 내 똑똑히 보았는데 말이야!”
또 다른 나무 뒤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빛이 반짝이고 노란 장포를 입은 도사가 나타났다.
그들은 바로 한립의 기명 제자들인 백과아, 해대소 그리고 기령자였다. 3백 년이 흘렀는데도 그들의 외모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백과아와 해대소는 원영 초기였고 기령자는 그들보다 성취가 빨라 이미 원영 중기 수사였다.
“스승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2백 년 전에 만황세계에서 돌아오신 뒤로 줄곧 폐관 수련 중이지 않은가. 설마 벌써 합체 후기 고비를 넘기 위해 준비에 들어가신 것은 아니겠지?”
해대소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건 저도 알 수 없지요. 사부님이 폐관 중이신 곳은 금제로 층층이 뒤덮여 있어 빙봉 사고께서도 접근하지 못 하시니까요. 제 생각이지만 강력한 새로운 신통을 수련 중이신 것이 아닐까 해요.”
“스승님께서는 합체 초기에서 중기에 이를 때도 겨우 3, 4백 년 밖에 걸리지 않으셨지 않은가. 이렇게 빨리 후기 수사가 된다면 인족 전체가 놀랄 것이야!”
백과아의 말에 해대소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들뿐만 아니라 인족 전체의 경사겠지. 허나 보통 합체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데 보통 1, 2천 년이 걸리니 그리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는 아니네.”
기령자가 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대사형, 스승님이 어디 보통 수사인가요? 다른 수사들의 기준에 맞춰 판단하면 안 되죠. 게다가 천연성과 삼황 쪽에서 빈번히 사람을 보내 뵙기를 청하는데 저희가 소식을 전해도 전혀 대답이 없으시잖아요. 온전히 수련에 집중하시는 걸로 보아 무척 중요한 일임은 분명해요!”
백과아는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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