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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104화 (861/2,000)
  • 1104화. 서금충왕

    *

    “선배님께서도 서금충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거기다 성체로요.”

    한참 후 한립이 숨을 고르고 중얼거렸다.

    “그래, 노부가 어린 시절부터 길러 수백 년 전에야 간신히 성체가 된 서금충이다. 얼마나 시간과 공을 들였는지! 사실 이번에 급히 대량의 명하신유가 필요한 것도 서금충을 위해서였다.”

    “명하신유와 서금충이 관련이 있습니까?”

    노인의 말에 한립이 놀라 무의식중에 질문을 던졌다.

    “상관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주인 마음에 따라 달라지니까!”

    허령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답해주었다.

    “주인 마음에 따라서요?”

    “그렇다. 수사가 그저 서금충 성체를 원한다면 명하신유가 아무 소용없겠으나,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싶다면 명하신유가 없어선 안 될 게야.”

    “성체에서 다시 진화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구체적인 이야기는 잠시 후에 계속하지. 수사의 수중에 성체 서금충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군! 그렇다면 명하신유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네. 노부가 수사에게 다른 거래를 제안하려하는데 단둘이 상의해야 할 것 같군. 금염, 청원자 이해해 주시겠지요?”

    허령이 이전과 달리 사근사근하게 한립을 대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금염과 청원자에게 물었다.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수사께서 강압적으로 거래를 진행하지만 않으신다면 저는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청원자가 허령 노인의 눈빛에 서둘러 답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허령 형, 좋을 대로 하시지요.”

    금염후도 상대의 비위를 맞추려 미소 지었다.

    “그럼 되었습니다. 노부는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대답이 흡족했는지 허령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에서 검은 기운을 일으켜 초소형 누각을 뱉어냈다. 각종 주술문자가 새겨진 누각은 검은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 수사, 서금충을 데리고 노부의 흑풍각(黑風閣)에서 이야기를 나누세.”

    수결을 맺어 누각을 키운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립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서금충을 회수한 다음 몸을 줄여 누각 속으로 뛰어들었다.

    “선배님들 저도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한립은 좌불안석 하면서 청원자와 금염을 향해 예를 취했다.

    “한 수사, 안심하고 다녀오게. 허령 형이 약조한 것이 있으니 괜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야. 허나 허무맹랑한 조건이 아니라면 그냥 거래를 수락하는 것이 수사에게 좋을 것일세.”

    미간을 좁힌 청원자가 당부했다.

    “강 선배님의 조언, 감사드립니다.”

    한립이 조용히 답하며 열댓 마리 서금충을 거둬 푸른 실로 변해 누각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가 들어선 순간 검은 기운이 꿈틀거리며 외부와 누각 내부를 완전히 단절시켰다.

    “강 형,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저 늙은이가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는 해도 실력은 진짜가 아닙니까. 만일 한 가 녀석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우리도 막지 못할 겁니다.”

    금염후가 입술을 달싹여 청원자에게 전음을 보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늙은이가 괴팍하기는 해도 우리와 알고 지낸 이래 약속을 어기는 것을 본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한 수사에게 신세진 일이 있어 어느 정도 돌봐주고는 있지만 정말 저 늙은이와 척을 지면서까지 편을 들어 줄 수야 없지요. 그렇게 되면 저도 앞으로 명하의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지 못할 테니까요.”

    청원자는 전혀 티내지 않고 전음으로 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저 늙은이의 실력이면 진령을 만나도 목숨은 부지할 텐데 우린들 어쩌겠습니까. 그런데 서금충이 아무리 진귀해도 늙은이가 너무 좋아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도 똑같은 영충을 갖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제가 무슨 수로 늙은이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그저 한 수사의 서금충이 큰 쓸모가 있겠거니 하는 것이지요.”

    금염후의 물음에 청원자가 눈을 번득였지만 두루뭉술하게 답하고 넘어갔다.

    “그런가요?”

    그것을 본 금염후가 입 꼬리를 꿈틀했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같은 시각, 검은 누각의 대청 안에서 한립과 허령 노인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수사, 이리로 앉게. 노부의 흑풍각은 반쯤 공간보물이라 크기를 마음대로 줄였다 늘렸다 할 수 있고 외부의 모든 감시를 피할 수 있다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노인이 권하자 한립이 예를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상의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할 일이 있네. 한 수사가 지니고 있는 서금충의 수량이 대략 얼마나 되는가? 정확한 수량을 알 수 있겠는가?”

    노인은 딱 보기에도 굉장히 들뜬 기색으로 물었다.

    ‘정확한 수량!’

    그 말에 미미하게 달라진 한립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노부가 너무 성급했구만! 서금충의 위력은 그 수가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가. 구체적인 수량을 말하기 어렵다면 5천 마리가 넘는지 안 넘는지만 말해주게.”

    노인이 한립의 표정을 보고 말을 바꿔 물었다. 한립을 보는 허령의 눈빛에 약간의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한립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솔직히 답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이족인이 안면몰수하고 그를 제압해 직접 서금충의 수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5천 마리 이상이라니, 잘 되었어! 그렇다면 내 수사에게 아주 좋은 거래를 제안하고 싶네.”

    “어떤 거래를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서금충의 수와 관련이 있습니까?”

    “물론일세! 노부는 수사에게 성체 서금충 5천 마리를 얻고자 하니까. 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는지 마음껏 말해보게.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이라면 절대 거절 하지 않지.”

    노인이 눈을 반짝였다.

    ‘서금충 5천 마리!’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한립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저를 무척 곤란하게 하십니다. 서금충 5천 마리면 제가 지닌 전부에 가깝습니다. 대승기가 되어 서금충들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을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한립의 말에 노인이 웃음을 거두었다.

    “서금충 5천 마리면 엄청난 가치를 지니겠지만 가격을 매길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거래하지 못할 것이 있는가? 노부가 서금충과 비슷한 명성을 지닌 영충도 두세 가지 남겨 두고 있고, 아니면 아까 보았던 현천잔보도 가치로 따지면 서금충 5천 마리 이상일 걸세.”

    “선배님께서 아직 보여주시지 않은 영충은 본명영충으로 압니다. 또한 제가 현천잔보에 아무리 마음이 끌려도 그것으로 거래할 마음은 없습니다. 제 수행에 그것을 얻어도 제대로 사용하기도 어려울 테니까요.

    그보다 그렇게 많은 서금충을 어디에 쓰시려는지 살짝 귀띔해 주신다면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함께해 저를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서금충들을 데려가셔도 제대로 부리기 어려우실 텐데요. 게다가 꼭 5천 마리가 필요하시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노부가 하려는 일을 시시콜콜 캐묻다니 간도 크구나!”

    “양해해주십시오. 피땀 흘려 겨우 길러낸 서금충 성체를 목숨처럼 아껴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내막도 알지 못하고 어찌 그냥 넘기겠습니까?”

    “크큭, 그 말은 또 맞는 말이구나. 좋다. 노부가 서금충이 필요한 이유를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지. 허나, 이 이야기를 듣고도 거래를 거절한다면…….”

    “그럴 일 없습니다. 용도를 말씀해 주시면 저도 거래에 응하겠습니다.”

    고민하던 한립이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허! 한 수사, 잘 결정한 것일세. 잘 듣게, 노부는 자네의 서금충으로 전설 속의 서금충왕을 길러낼 계획이네! 서금충왕이 탄생하려면 대량의 성체 서금충이 필요한데. 수중에 이미 5천 마리 서금충이 있기에 자네의 5천 마리가 더 필요한 것일세. 딱 그 정도면 서금충왕이 탄생하기 충분하기 때문에 그 보다 많은 서금충은 필요도 없네.”

    노인의 말에 한립의 심장이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충왕이요! 그렇다면 명하신유를 구하러 다니신 것도…….”

    “대량의 명하신유도 서금충왕을 키우는 방법 중 하나일세! 허나 충분한 수량의 성체 서금충만 있으면 그리 필수적인 요건도 아니지만.”

    “그랬군요. 서금충왕이 탄생하려면 대량의 서금충들이 서로를 갉아먹어야 하나 봅니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생각에 잠겼다.

    “어린 친구가 아주 명석하군! 당연히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서금충왕에 대해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청원자에게서 들은 것인가? 서금충왕에 대해서는 우리 부유족의 몇몇 태상장로를 제외하면 그들과 친한 강 수사밖에 모를 테니까.”

    “강 선배님이 언급하신 것을 딱 한 번 듣기는 했습니다. 서금충왕은 진선계의 선인들도 피해갈 정도라는데 사실인지요?”

    “그건 약간 과장된 면이 있고, 적어도 나라면 서금충왕과 싸울 생각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네.”

    “선배님께서는 제 영충을 데려다 서금충왕을 기르는데 성공할 거라 얼마나 확신하십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하던 허령이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겨우 2할이요. 성공 가능성이 그리 높지는 않군요.”

    “허, 서금충왕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노부가 아주 오래 연구해 알아낸 영충을 기르는 비술을 써서 성공 가능성을 2할까지 끌어올린 것이네. 됐고, 노부는 묻는 말에 다 대답해 주었으니 이제 수사가 약조를 지킬 차례겠지? 거래 조건을 말해보게.”

    한립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노인이 얼굴을 굳혔다.

    “서금충왕을 경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거래는 이미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으니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제 조건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한립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음을 굳혔기에 시간을 끌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어디 들어보지.”

    “첫째, 다른 보물은 필요 없고 오직 지니고 계신 명하신유 일부를 주셨으면 합니다. 조금 전 충분한 서금충 성체가 있으면 명하신유는 그리 중요치 않다고 했으니까요. 둘째, 저도 영충을 기르는 것에 관심이 많으니 얼마나 걸리든 다시 충분한 수량의 서금충 성체를 모아 서금충왕을 길러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선배님께 서금충왕을 기르는 비법과 비술을 배우고자 합니다.”

    한립이 진지한 얼굴로 조건을 나열했다. 미소를 머금고 있던 허령의 낯빛이 어두워지고 답이 없었다.

    “첫 번째 조건은 알겠네. 명하신유를 전부 넘겨 줄 수는 없어도 네다섯 병은 주지. 두 번째 조건이 번거롭구만. 서금충왕을 기르는 비술은 부유족의 독문비술이라 장로들이라 하여도 전부 알고 있지 않네. 그런 것을 외부인에게 누술한다는 것이 합당치 않군.”

    한참을 고민하던 노인이 미간을 좁히고 입을 열었다.

    “번거로운 것이지 선배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시겠지만 선배님의 본명영수나 현천잔보를 내달라는 것보다 과한 요구도 아니고요.”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차분히 상대를 설득했다.

    “허허, 일리가 있는 말일세! 알겠네, 노부가 두 가지 조건을 수락하지. 다만 자네는 내 앞에서 심마를 걸고 서금충왕을 기르는 비술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하네. 수행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 심마를 건 맹세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지. 일단 맹세를 어기면 천겁을 넘기다 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립은 기뻐하는 내식을 하지 않기 위해 얼굴 근육에 힘을 주었고, 바로 심마를 걸고 맹세했다.

    “자, 명하신유 일세. 잘 받아가게.”

    노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소매 속에서 비취색 병 5개를 꺼내 날려 보냈다. 한립은 병들을 끌어와 일일이 확인해보고는 얼굴이 밝아졌다.

    “서금충 5천 마리가 들어있습니다. 확인해 보시지요.”

    한립도 영수환을 꺼내 상대에게 던져주었다. 눈을 감고 의식으로 영수환 내부를 살핀 노인이 흥분한 얼굴로 눈을 떴다.

    “그렇지, 전부 성체 서금충이 맞구만! 게다가 내 예상보다 아주 잘 키워놨어. 이제 이 옥간을 잘 넣어두게. 절대 누구에도 보여주어서는 안 될 것이야.”

    훅! 숨을 내쉬고 노인이 한립의 눈을 매섭게 바라보았다. 그가 미리 준비해둔 옥간이 소매 속에서 번득이며 날아가 괴이하게도 한립 바로 앞에 나타났다.

    “명심하겠습니다.”

    한립도 희색을 거두고 신중하게 답한 후 옥간을 이마에 댔다. 옥간 속에는 고대문자와 생생한 삽화들이 가득했다. 허령이 영수환을 거둬들이고 흥미로운 얼굴로 그의 모습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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