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화. 식선단(蝕仙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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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자, 노부와 겨뤄보자는 것입니까. 그것도 좋겠지요! 우리가 겨뤄본 지도 수천 년이 지났지 않았습니까. 듣자니 최근에 익힌 신통이 굉장하다던데 어디 구경이나 해봐야겠습니다.”
노인은 청원자가 나선 것에 화내지 않고 손바닥을 비비며 기대감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한립은 이제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이에 한립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허령이 미치광이를 흉내 내는 노련한 능구렁인지 아니면 변덕이 심한 노인네인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청원자는 허령의 모습을 보고 옛일을 떠올렸는지 손을 내저었다.
“제가 무슨 실력이 있다고 허령 형과 실력을 겨루겠습니까. 그저 한 수사가 제 동족 후배이고 하니 사정을 봐달라는 뜻입니다.”
“비무가 싫다고요? 흥, 아깝게 되었습니다. 그럼 수사의 얼굴을 봐서 더는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다른 급한 용무도 있고 말입니다.”
노인이 실망한 기색을 드러내며 조금 풀이 죽어 말했다.
“저도 무슨 용무이신지 참 궁금합니다. 허령 형은 비승을 앞두고 천 년 전에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요. 어쩐 일로 명하의 땅까지 찾아오셨습니까?”
금염후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물론 아주 중요한 일 때문이지요! 노부가 할 짓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들 갖고 있는 명하신유나 전부 꺼내 보시지요. ‘오원단(五元丹)’과 ‘만곤충(万坤蟲)’ 알로 전부 바꿔가려고 합니다.”
“수사께서 원하시는 게 명하신유란 말입니까?”
“허령 형, 명하신유는 어디에 쓰려 그러십니까?”
그 말에 금염후와 청원자가 놀라 반문했고, 한립도 깜짝 놀랐다.
“왜들 이리 소란인 겝니까! 내가 명하신유가 필요하다는 게 그리 놀랄 일인가요. 아니면 노부가 가져온 오원단과 만곤충 알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것입니까?”
노인이 또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 제가 갖고 있던 명하신유를 방금 전 전부 강 수사에게 넘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금염후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청원자, 저 말이 참말입니까?”
노인이 눈을 끔뻑거리며 청원자를 쳐다보았다.
“사실입니다. 금염 수사의 명하신유는 제가 다른 물건으로 교환했습니다. 명하신유는 이제 허령 형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요. 게다가 귀 족에 대량의 명하신유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째서 찾으시는지요? 다른 사람을 몰라도 허령 형의 신분이면 명하신유를 충분히 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노부가 명하신유를 찾는 것은 내가 복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섭니다. 또 부유족이 아무리 많은 명하신유를 지니고 있어도 쓸 데가 많단 말이지요. 그나마 남은 명하신유를 내가 전부 써버려서 이렇게 직접 찾아다니게 된 것이고요. 다른 녀석들의 것을 전부 받아 왔는데도 아직 부족합니다. 그러니 내 값을 두 배로 쳐 줄 테니 넘기세요.”
노인이 진지하게 말했다. 청원자는 안색이 달라져 생각에 잠겼고 한립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가슴이 뛰었다. 금염후만이 팔짱을 끼고 길 건너 불구경하듯 웃고 있었다.
“허령 형께서 그리 높은 가격을 제시하셨으니 원래는 거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명하신유를 여기 한 수사에게 준 터라 제가 답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주었다고요? 저 녀석에게?”
청원자의 말에 노인이 불쾌한 내색을 했다.
“이전에 크게 신세진 일이 있어 그 보상으로 명하신유를 주기로 하였습니다. 수사께서 강제로 뺏으려 하신다면 저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입장이고요.”
청원자가 한숨을 푹 쉬었다.
“보아하니 엄청난 신세를 졌나봅니다. 노부가 성격이 아무리 지랄 맞아도 어린 후배의 손에서 강제로 명하신유를 뺏을 정도는 아닙니다. 본인이 스스로 원해 넘긴다면 강 수사도 막지 않겠지요?”
노인의 눈에서 노란빛이 번득이고 하품을 하며 물었다.
“한 수사가 원해서 하는 거래라면 저도 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되었습니다.”
청원자의 답에 노인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실실 웃는 낯으로 한립을 보았다.
“선배님, 명하신유는…….”
“긴말할 것 없다. 나도 강제로 빼앗을 생각은 없으니까. 네가 원해서 두 손으로 바치게 할 것이야.”
한립이 포권을 하고 서둘러 양해를 구하려는데 노인이 말을 끊었다. 이어서 그의 소매 속에서 검은 기운이 나와 탁자 위에 열댓 개의 옥병을 늘어놓았다.
“노부가 모아 둔 합체기 수행을 늘려주는 단약들이다. 이 정도 수량이면 명하신유 한 병보다 훨씬 가치가 높지. 네가 몇 병을 내놓든 그에 상응하는 단약을 내주마.”
그가 내놓은 단약들은 외부 세계로 나서면 합체기 수사들이 피 튀기며 경쟁할 영약들이었다. 그것들을 열댓 병이나 늘어놓았으니 확실히 명하신유 한 병보다 가치가 높았다.
이제 이런 단약이 불필요한 청원자와 금염후도 단약의 수량에 놀라고 있었다.
청원자와 금염후가 한립의 살피는데 단약을 본 한립의 표정이 어딘가 이상했다. 너무 좋아 펄쩍 뛰어도 모자랄 판에 당황한 기색이 가득했다.
쉭!
주저하던 한립이 병들 중 하나를 끌어와 푸른 단약을 꺼내 들었다.
“그건 청영단(靑影丹)이다. 청해족(靑海族)의 성약이라 한 알만 먹어도 한 달의 고된 수련을 줄일 수 있지! 게다가 내가 내놓은 단약들 중에는 그보다 좋은 것도 허다하다.”
허령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간단히 설명했다. 자신이 모은 단약들을 보고 뿌듯해하는 얼굴이었다.
“전부 진귀하기 그지없는 것들입니다만, 안타깝게도 명하신유로는 교환할 수 없겠습니다.”
푸른 단약을 살피던 한립이 쓴웃음을 지었다.
“뭐라! 감히 내가 내놓은 단약이 가짜일까 봐 의심이라도 하는 것이냐?”
움찔한 노인이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청원자와 금염후도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절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수행을 늘리는 단약은 이미 충분합니다. 이 단약들이 아무리 좋아도 제게는 큰 쓸모가 없다는 뜻이지요.”
“충분하다고? 설마 그것들이 노부가 지닌 것보다 낫다는 말이더냐?”
“제가 어찌 감히 선배님을 속이겠습니까.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것을 먼저 봐주십시오.”
한립이 말을 마치고 소매 속에서 백옥 약병을 꺼내 던져주었다. 노인은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약병을 받아 거칠게 뚜껑을 열었다. 향기가 진동하며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이에 노인의 표정이 달라지며 급히 약병을 코에 가져다 대고 깊게 향을 음미했다.
“허령 형께서는 연단종사가 아니십니까. 한 가 녀석의 단약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허령의 모습에 금염후가 궁금해하며 입을 열었다.
“문제랄 것은 없습니다. 그저 향이 너무 특이한데…….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아예 약병을 기울여 단약을 꺼내들었다. 새빨간 표면에 금색 문양이 들어간 단약은 영기가 좌르륵 흘러 살아 있는 생명체 같아 보였다.
“이건, 식선단(蝕仙丹)! 내 눈이 틀릴 리가 없지. 네 녀석이 어떻게 오래전에 멸종된 식독초를 찾아낸 것이더냐?”
도겁 비승을 앞둔 대승기 노괴답게 노인은 단약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뭐라고요? 이게 정말 식독초로 만든 단약이란 말입니까?”
금염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관심을 보였다. 청원자도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었다. 노인은 한참 더 단약을 관찰해 보고는 조심스레 그것을 약병에 넣고 한립에게 던졌다.
“식선단이 있다면 노부가 준 단약들이 필요하지 않겠구나. 네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어. 식독초를 찾아 이 단약을 제련했으면 너도 천운을 타고났다는 뜻이겠지. 대승기 수사들도 필요할 때 식독초를 구하지 못하니까.”
“저는 식독초가 그저 합체기 수사에게만 도움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선배님께 가르침을 구해도 되겠습니까?”
의미심장한 노인의 말에 한립이 깊게 예를 올렸다.
“뭐, 비밀이랄 것도 없다. 식독초의 독을 정련해서 대승기 수사가 먹으면 독성이 발작한 순간 수련의 고비를 넘길 가능성이 얼마간 높아진다. 그러나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방법이라 평소라면 득보다 실이 많지.
다음 뇌겁을 넘길 방법이 없어 고비를 넘기지 않으면 어차피 죽을 목숨인 경우에 한번 시도 해볼 만하다. 그저, 식독액(蝕毒液)을 추출하는데 필요한 식독초의 수량이 너무 엄청나서 실제로 해본 녀석은 얼마 없을 게다.”
노인이 실실 웃으며 청원자와 금염후의 얼굴을 훑었다. 청원자는 아무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금염후는 눈빛이 흔들렸다.
“됐고, 기왕 네 녀석이 단약은 부족하지 않다니 법보로 교환하겠다. 이 중 아무거나 세 개를 골라라!”
허령 노인이 소매를 펄럭여 수백 개의 보물을 쏟아냈다. 그러자 눈부신 빛을 뿜는 보물, 맑게 울부짖는 보물, 보일 듯 말 듯한 보물, 푸른 연기 같은 보물 등이 잔뜩 쌓여갔다.
하나같이 엄청난 기운을 내뿜는 최상급 영보였다. 한립은 현란한 보물들을 보며 잠시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금염후와 청원자가 그것을 보고 미소 지었다.
“허령 형, 주머니가 두둑한 녀석이라 혼돈만령방에 올라있는 보물도 지니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들로 명하신유와 바꾸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그러지 말고 진짜 귀한 걸로 몇 개 꺼내 저와 강 형의 견문이나 넓혀주시지요!”
“다짜고짜 더 귀한 것을 보여 달라고 하다니 입만 살아서는. 혼돈만령방에 오른 보물을 몇 점 갖고는 있지만 내 그걸로 설마 명하신유를 교환할 성 싶습니까?”
노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거절했다.
“하하, 저도 그냥 말이나 한 번 꺼내 본 것입니다. 수사께서 폐관에 들어가기 전에 굉장한 보물을 얻었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현천의 보물과 연관된 물건이라니 구경이나 해보고 싶군요.”
“현천의 보물!”
아쉽다는 기색으로 금염후가 한 말에 청원자도 흥미가 생긴 얼굴이었다.
“흥, 소식 한 번 밝습니다. 허나 워낙 형편없이 망가진 물건이라 진정한 현천의 보물이라 할 수는 없지요. 금염 수사가 꼭 보고 싶다 조르는데 보여주지 않는 것도 좀생이 같은 짓이겠지요.”
허령 노인이 금염후와 청원자를 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와 강 형이 안목을 넓힐 기회가 되겠습니다. 저도 오늘날까지 수도의 길을 걸으며 현천의 보물을 직접 본 적은 없으니까요.”
“오래전 현천의 보물이 발동된 것을 본 일이 있지만 법력이 워낙 미천할 때라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오늘에서야 현천의 보물을 보는군요. 풍원대륙의 거대 종족 중 하나인 부유족은 진정한 현천의 보물을 보유하고 있겠지요.”
금염후와 청원자가 들뜬 기색을 보였다. 한립도 현천의 보물이라는 말에 노인을 주시했다.
“부유족에 현천의 보물이 딱 하나 있기는 한데 까마득하게 먼 옛날 성충 대인에게 바쳐서 나도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그림으로만 보았을 뿐입니다. 현천의 보물은 영계 전체를 통틀어 봐야 열댓 개밖에 안 되니까요.”
노인이 담담히 말하고 양손을 스쳐 붉은빛을 불러냈다.
붉은빛 속에는 향로(香爐) 모양의 물체가 들어있었다. 금색 주술문자가 어른거리는 향로 위에는 매의 머리에 말의 몸을 하거나 돼지 머리에 용의 몸을 지닌 괴상한 요수들이 새겨져 있었다.
노인의 말대로 굉장히 파손이 된 상태였다.
“이게 부서진 현천의 보물이란 말이지요?”
금염후는 붉은빛 속 향로를 보고 은근히 의심하는 투로 말했다. 청원자도 미간을 좁혔다.
“쯧쯧, 그 나이를 먹어서도 아직 외관에 미혹되어서야 쓰겠습니까.”
노인은 믿지 못하는 그들을 보고 화를 내기는커녕 우습다는 듯 실소했다.
탱!
노인의 손끝이 향로를 튕기자 금색 주술문자들과 요수 문양들이 밝게 빛나며 붉은빛으로 파손된 부분을 채워나갔다.
탱!
이때 노인이 다시 향로를 튕겼다. 금색 주술문자들이 흩어져 금빛으로 향로를 감쌌고, 괴수 문양들이 붉은빛을 머금고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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