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1화. 귀한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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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염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민에 빠졌고, 한립도 금강멸마신뢰라는 이름을 듣고 눈에 이채가 어렸다. 어쩐지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했더니 주재료가 그가 내준 금뢰죽 이파리였다.
금강멸마신뢰는 역외천마를 상대하기에 좋은 무기였지만 천마는 대승기 고비를 넘을 때와 대승기 이후 천겁 때만 선택적으로 나타났기에 그에게는 당장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그도 이종족 시장에서 금강멸마신뢰 제련법을 구해 알고 있었는데 필요한 대량의 뇌전 속성 재료들을 보고 기겁했었다. 당시에는 그 많은 재료들을 모으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승기 수행을 지닌 청원자도 예닐곱 개를 제련하는데 수백 년이 걸렸다니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금강멸마신뢰 세 개면 식양토와 교환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명하신유는 왜 필요한 것입니까? 수사도 이미 지니고 있을 텐데요.”
금염후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백 년 전 다른 수사에게 명하신유를 빌려줬는데, 한 수사가 합체 후기 고비를 넘는데 그것이 필요하다지 뭡니까? 당시 신세진 일이 있어 명하신유를 내어주겠다 약속했기에 이렇게 거래를 해서라도 구하려는 것입니다.”
“강 수사에게 명하신유를 얻을 정도라면 엄청난 일을 해주었나 봅니다.”
청원자의 말에 금염후가 한립을 훑었다. 한립은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표정으로 시선을 받았다.
“이제 할 말은 다했습니다. 금 형께서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면 다른 분들을 찾아 거래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뇌겁을 앞둔 언 노괴는 아주 흔쾌히 거래에 응할 듯싶습니다만.”
청원자가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탁자를 두들겼다.
“제가 언제 거절한다고 했습니까? 수사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일전에 도움받은 일도 있고 거래하겠습니다.”
금염후가 가볍게 웃으며 거래를 수락했다. 그는 곧바로 입을 벌려 네 개의 빛덩이를 뱉어냈다. 하얀 병 세 개와 노란 옥갑이었다.
그는 네 가지 물건을 청원자에게 날려 보내고 소매로 탁자를 쓸어 옥갑과 나머지 두 개의 금강멸마신뢰를 챙겼다. 청원자가 의식으로 물건을 확인하고는 만족스런 기색을 드러냈다.
“좋은 거래에 감사드립니다. 한 수사, 여기 명하신유 세 병일세. 잘 지니고 다니게!”
청원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세 개의 명하신유를 한립에게 던져주었다. 그가 받기로 한 것은 명하신유 두 병이었지만 한립이 더 많은 재료를 모아왔기에 세 병을 준 것이다.
보아하니 수집한 재료를 전부 가져다주기로 한 결정은 틀리지 않았다.
금염후는 이번 거래가 퍽 흡족했는지 웃는 낯으로 청원자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영계의 극소수만이 아는 비밀이나 여러 공법과 관련된 내용도 있어 한립도 아주 흥미롭게 들었다.
반 시진이 흘러 청원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자 금염후도 그를 배웅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르릉!
바로 그 순간, 섬 위쪽에서 굉음이 울리고 궁전이 흔들렸다. 섬을 방어하는 결계가 공격당한 것이다. 막 자리에서 일어난 금염후와 청원자가 시선을 마주쳤다.
‘누가 이리 대담하게 금염도를 공격한단 말인가!’
청원자도 검기로 섬의 가장 바깥 결계를 갈랐지만 겉보기에만 요란했지 실질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 강제로 금제를 깨려하고 있었다.
금염후가 열이 받아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려는데 어떤 사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염, 청원자! 안에 있으면 어서 나와 보지 않고 뭐하는 겁니까?”
거칠고 우악스런 목소리에 둘의 표정이 싹 달라져 달갑지 않은 웃음을 흘렸다.
“언제까지 더 기다리게 할 셈인지! 이 낡은 궁전을 전부 때려 부숴야 나올 것입니까!”
사내의 말소리가 끝나자마자 궁전 위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심지어 그때마다 공간파동이 일어 섬 전체가 난리였다.
이때 대전 밖에서 금색 빛줄기가 날아들어 금염후 앞에서 둔광을 거두었다. 당황한 얼굴의 금갑 병사였다.
“주인님께 아룁니다. 바깥에 지금……!”
“알고 있다. 귀빈이 오셨으니 내가 직접 나갈 것이다. 강 형, 저 늙은이가 궁전을 부수기 전에 아무래도 함께 나가서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금염후가 손을 저어 병사를 물리고 청원자를 향해 말했다.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온 것을 보니 만나봐야겠지요. 쯧, 저 늙은이를 만나면 항상 골치 아픈 일이 생겼거늘…….”
청원자도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답했고, 금염후도 한숨을 쉬며 몸에서 금빛 화염을 일으켰다.
펑!
화염이 폭발하고 금염후가 모습을 감추었다. 보기 드문 고명한 화둔술이었다. 청원자는 금빛으로 변해 대청 입구로 날아오른 다음 번득이며 사라졌다.
이제 대청 안에는 한립만이 홀로 남아 있었다.
“늙은이라고? 대승기 수사들이 그렇게 칭할 만한 인물이라니 상상이 가지 않는구나.”
한숨을 내쉰 한립의 등 뒤로 수정 날개가 나타났다. 그는 날개를 펄럭여 청백색 뇌전 속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밖으로 나가자 섬 상공에 청원자와 금염후가 엄청나게 거대한 물체를 앞두고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전신이 새까만 거대 갑충(甲蟲) 위에 깡마른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움푹 파인 눈덩이와 들창코를 지닌 사내로 알록달록한 장포를 걸치고 목에는 은빛 찬란한 구슬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미 섬을 둘러쌌던 하얀 보호막이 사라졌고 금갑 병사 세 명이 갑충이 뿜어낸 하얀 실에 꽁꽁 묶여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한립이 청원자 곁에 도착했을 때, 금염후가 곤경에 처한 세 명의 수하를 무시하고 갑충 위 노인을 향해 포권을 했다.
“허령 형,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셨으면 안으로 드시지 않고요.”
“크크큭! 금염 수사, 말만 그렇게 하고 속으론 저놈이 썩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 다 압니다.”
“그럴 리가요! 아, 그나저나 강 형께서 이곳에 계신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금염후가 움찔하며 얼른 화제를 청원자에게로 돌렸다. 그 말에 청원자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저도 궁금합니다. 혹시 제 동부를 거쳐서 오시는 길인지요?”
“강 수사의 동부뿐이겠습니까! 다른 수사들이 처박혀 있는 소굴도 전부 거쳐 오는 길입니다. 폐관수련 중이라고 못 나오겠다는 녀석들도 집을 때려 부수려하니 얌전히 잘만 기어 나오더군요! 진작 그럴 것이지 귀찮게 한단 말이에요.”
허령이라 불린 노인이 득의양양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에 금염후와 청원자는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한립도 크게 놀랐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일단 엉덩이 붙이고 앉읍시다. 금염 수사가 빚은 벽령주가 마실 만하니까 한 여덟 병 내와 보시오.”
마른 노인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여덟 병이요! 허령 형, 벽령주는 한 병을 빚는데 삼백 년이 걸리는 귀한 술입니다. 재료를 찾는 게 워낙 어려워서 지금은 서너 병밖에는 없고요.”
금염후가 얼굴 근육을 꿈틀하고 난색을 표했다.
“허허, 그럼 그 서너 병이라도 내오면 되지요.”
노인이 웃음을 터트리며 한 손으로 수결을 맺자 발밑의 거대 갑충이 검은 안개로 변해 그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 노인도 검은빛으로 변해 궁전으로 날아가 버렸다.
금염후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손을 뻗어 허공에 매달려 있는 금갑 병사들을 풀어주었다. 비틀거리며 허공에 선 병사들은 부끄러운 낯으로 금염후에게 예를 올렸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무능하여 주인님의 체면을 상하게 하였으니 벌을 내려 주십시오!”
“너희를 탓할 일이 아니다. 실력이 대단해 나도 상대하기 거북한 늙은이를 너희가 어찌하겠느냐. 당장 금제나 복구하거라.”
금염후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금색 화염을 불러일으켜 튀어나갔다.
“한 수사, 우리도 가세. 비위 맞추기 어려운 노인네이니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야.”
청원자도 한숨을 내쉬며 발밑에 금빛을 반짝이고 그 자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이에 한립도 둔광을 일으켜 내려갔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 대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 청원자 앞에 허령이란 노인이 앉아 있었다. 금염후가 손뼉을 치자 금색 옷을 입은 아름다운 시녀들이 진귀한 영과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벽령주는? 금염 수사, 이런 걸로 때울 생각일랑 마세요.”
허령 노인이 당장 눈을 부라렸다.
“허령 형, 너무 조급해 마세요. 벽령주는 숙성을 시키느라 만년현빙 속에 넣어 두어서 얼음 창고에서 가져오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이미 사람을 보내두었으니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금염후가 화를 억누르고 해명했다.
“아, 그렇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홍색 과실을 집어 몇 번 우물거리다 꿀떡 삼켜버렸다. 심지어 씨앗까지 그냥 삼켜버렸다. 이때 노인이 갑자기 한립에게 관심을 보였다.
“2천여 살밖에 안 먹은 어린 녀석이 지금에 경지에 이르렀다니 자질이 썩 괜찮구나. 네가 청원자의 동족 후배더냐?”
“선배님을 뵙습니다. 예, 저는 강 선배님의 동족 후배입니다.”
뜬금없는 상대의 칭찬에 한립은 기쁘기보다 긴장되었다. 청원자가 같은 대승기 수사가 골치 아프다고 했으니 그는 더더욱 몸을 낮춰야 했다.
게다가 상대는 맨눈으로 그를 보고 바로 실제 나이를 알아맞히지 않았는가.
“영계에서도 흔치 않은 자질이야! 인족은 별 볼 일 없는 작은 종족인줄 알았는데……. 대승기인 강 수사에 이제는 이 녀석 같은 합체기 후배까지 배출했습니다. 설마 인족에 숨겨진 무언가라도 있는 것입니까?”
“허령 형, 농담도 잘하십니다. 인족은 그저 평범한 종족에 불과합니다. 저야 이제는 순수한 인족도 아니고, 한 수사의 수련 속도가 놀랍기는 하지만 그게 특별히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종족이나 한두 명씩 기재(奇才)가 태어나기도 하니까요. 허령 형께서 한자리에서 저희 둘을 만나서 그렇지 어디 귀 종족에 비할 수나 있겠습니까.”
청원자가 또 억지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부유족에 수많은 수사가 있어도 이 나이에 합체기에 이른 경우는 처음 봐서 말입니다. 어떠냐? 우리 부유족에 들어올 생각이 있느냐? 본 족의 객경장로가 되면 앞으로 수련에 필요한 재료들은 따로 걱정할 필요 없다.”
노인이 청원자를 향해 코웃음을 치고 한립을 쳐다보았다. 그 말에 청원자가 안색이 변해 서둘러 입술을 달싹이려다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예상 밖의 제안에 한립도 재빨리 머리를 굴려 완곡히 거절했다.
“과분한 제안 감사드립니다. 다만 인족이 큰 재난을 앞두고 있어 얼마 안 되는 실력이지만 바로 돌아가 어려움을 함께 이겨내고자 합니다.”
“재난! 뭔 놈의 재난? 말장난으로 노부를 가지고 노는 것이더냐.”
히죽거리던 노인이 대번에 얼굴을 굳히고 소리쳤다. 동시에 쿵! 하고 무형의 압력이 날아들어 한립을 호되게 내리눌렀다.
“결코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상대의 성격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고작 두어 마디에 공격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한립은 서둘러 변명하고 체내에서 빛을 일으켜 압력에 대항하려 했다.
압도적인 힘이 어깨를 짓눌러 금빛 보호막이 압축되며 미친 듯이 깜빡거렸다. 동시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뼈와 근육에서 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육체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그가 이 정도라면 평범한 합체기 수사는 피를 토했을 것이다.
“호오,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그것을 본 노인이 굳은 얼굴을 풀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몸집을 키웠다. 노인의 몸집이 커지자 한립을 내리누르는 압력도 상승했다.
펑!
한립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버텼지만 그가 앉아 있던 나무의자는 힘없이 터져나갔다.
“허령 형,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미간을 찌푸린 청원자가 소매 속에서 금빛을 털어냈다.
쾅!
거대한 압력 두 줄기가 한립 앞에서 충돌해 동시에 힘을 잃었다. 어깨가 가벼워진 한립은 한시름을 놓으면서도 허령의 무서운 실력에 기함했다.
청원자와 금염후가 노인을 경계하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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