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9화. 변화
*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저도 모르나 저를 이끄는 힘은 분명 진선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진선계에 대해 알고 있다고? 내게도 말해줄 수 있겠느냐!”
“주인님께서 알고 싶으시다면 간략하게나마 이야기를 해드리……. 이런, 늦었습니다!”
제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막 설명하려는데 고공의 하얀 안개가 갈라지고 눈부신 기운이 모여들어 집채만 한 눈을 만들어냈다.
파아앗!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지닌 거대 눈알은 요사스러운 빛을 반짝였다. 눈알이 데구루루 굴러 제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무서운 기운이 주변을 잠식했다. 한립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마비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한립은 엄청난 무력감에 시달리며 불현듯 어린 시절 처음 ‘문 대인’을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제혼도 눈알의 주시에 굵은 땀방울을 흘리다 한쪽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비웃는 듯한 기색이 스치며 불경 소리가 울려 퍼지고 굵은 핏빛 빛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제혼은 핏빛 빛기둥에 몸이 빨려 들어가 단숨에 고공으로 치솟았다.
한립은 제혼이 빛기둥 속에서 힘겹게 고개를 돌려 잠시 그를 쳐다보다 거대한 눈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불경 소리가 그치고 눈알도 감쪽같이 모습을 감추었다.
회색 안개가 다시 하늘을 뒤덮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한립은 그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는데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한참을 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립은 한숨을 쉬며 적막함에 고개를 숙였다.
난성해부터 그를 따라 영계에 온 제혼은 위기의 순간에 몇 번이나 그를 구해주었다. 이번에 영계를 떠나게 된 것이 제혼에게 복인지 화인지 몰라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제혼이 떠나기 전 평온했던 것으로 보아 진선계가 그리 위험한 곳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가 진선계로 비승해야 제혼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제혼이 너무 빨리 비승해서 진선계에 관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 점이다.
‘진선계에 대해 정보가 있다면 비승하기 더욱 수월했을 텐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고개를 들어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금빛이 놀라운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한립은 둔광 속 인물을 확인하고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금빛이 가시고 새하얀 피부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 소저,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정말 한 형이시군요!”
녹색 궁장 차림의 원요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의식으로 그녀를 훑은 한립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미 연허 후기의 경지에 이르다니 청원자 선배님께서 훌륭한 스승이기는 한가 봅니다.”
“요아는 이제 노부의 제자일 뿐 아니라 딸이라네. 오래전부터 이미 나를 의부(義父)로 모시고 있으니 앞으로 이 아이 걱정은 할 것 없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와 원요를 ‘요아’라고 살갑게 칭했다.
원요의 소매 속에서 푸른빛이 빠져나와 소인(小人)으로 변했다. 회색 장포를 입고 등에 검을 멘 소인은 얼굴이나 긴 수염이 청원자와 꼭 닮아 있었다.
“원영!”
“노부가 원영으로 돌아다니는 게 그렇게 신기한가? 아, 대승기 전에는 원영이 오랜 시간 몸 밖을 돌아다니지 못한다는 것을 깜빡했군. 노부는 대승기에 이른지 한참이라 원영이 형상을 갖추는 시기에 이르렀네. 본체와 비교해도 별로 부족함이 없지. 게다가 이건 노부의 3대 원영 화신 중 하나에 불과하고 말이야.”
청원자가 인자한 웃음을 흘렸다.
“선배님의 놀라운 신통에 탄복할 뿐입니다.”
“이게 뭐 대수라고. 그보다 자네야말로 몇 백 년 사이에 벌써 합체기에 이르렀군 그래. 수행을 쌓는 속도가 예전의 나보다 빨라!”
“과찬이십니다. 그간 여러 기연을 만난 덕분이지 수련 자질이야 선배님에 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과찬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그런데 이곳에서 누군가와 싸우지 않았는가? 남아 있는 기운이 괴상도 하구만.”
청원자가 주변을 살피고 미간을 좁혔다. 그 말에 찔리는 바가 있었지만 한립은 가볍게 답했다.
“이곳으로 전송되는 와중에 누군가 섞여 들어와 해결하였습니다. 원래 저와 원한이 있던 자였는데, 특수한 체질을 지닌 자라 이상한 기운을 남겼나 봅니다.”
“그랬구만. 이곳은 길게 이야기할 곳이 못되니 나를 따라 거처로 가세. 전송에 차질이 있었는지 내가 머무는 곳과 반나절이나 멀리 떨어졌더군. 비술을 시험해 볼 겸 나와 있지 않았으면 이렇게 빨리 와보지 못했을 걸세.”
청원자가 의미심장하게 한립과 시선을 마주치고 담담히 말했다. 푸른빛은 그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원요의 소매 속으로 돌아갔다. 이에 한립이 빙긋 웃으며 둔광을 일으켰고 원요가 밝은 얼굴로 그의 옆에서 날았다.
“한 형이 이곳으로 돌아오는데 몇 년은 더 걸릴 줄 알았습니다. 의부님께서 수집하라 하신 물건들이 워낙 진귀한 것들이었으니까요.”
“원 소저는 어찌 제가 선배님이 말한 물건들을 모아왔을 거라 확신하십니까? 다른 일이 있어 찾아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원요의 전음에 한립도 똑같이 전음으로 답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한 형의 성격은 다른 사람보다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충분한 이익이 없다면 절대 여기까지 올 분이 아니잖습니까. 이곳에서 한 형이 눈독드릴 만한 것은 명하신유뿐이고요.”
활짝 웃는 원요는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웠다.
“제 성격을 잘 파악하신 것이 맞군요.”
잠시 침묵하던 한립이 멋쩍게 웃으며 인정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목적을 이루시려면 아마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선배님께서 마음이 바뀌신 것입니까?”
“의부님이 어떤 분이신데 약속을 깨시겠습니까. 그저 의부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지요. 자세한 이야기는 거처로 돌아가면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큰일이 난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고요.”
원요의 말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에 잠겼다.
반나절 후, 세 사람은 거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요를 따라 동부로 들어간 한립은 익숙한 대청에 들어섰다. 푸른 소인이 기지개를 켜며 나타나 보통 사람과 똑같은 크기로 커져 상석에 앉았다.
“자네도 이제 합체기 수사가 되었으니 내 앞에서 그리 불편해할 것 없네. 여기에 앉지.”
“감사합니다.”
청원자가 자리를 권하자 한립이 예를 올리고 의자에 앉았다. 원요는 조용히 뒤로 물러나 청원자 뒤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동그란 얼굴의 백의 여인이 차를 내왔다.
“한 형을 뵙습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담한 체구에 귀여운 외모를 지닌 여인은 연려였다.
“연 선자 오랜만입니다. 예전의 모습 그대로시군요.”
“반귀(半鬼)의 몸인데 세월이 흐른다고 모습이 변할 리가요. 어머, 그런데 한 형의 경지가 이전과는 달라 보입니다. 구체적인 경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합체기이 이른 것인지요?”
연려가 자세히 그를 살피며 놀라 물었다.
“운이 좋아 합체 중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합체기, 거기다 중기라고요!”
“연려! 안부인사는 노부와 한 수사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누거라.”
청원자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예!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연려가 서둘러 원요 옆으로 가서 섰다.
“한 수사, 노부의 주 원영은 중요한 신통을 수련 중이라 폐관 수련중이라네. 직접 나오지 못한 것을 이해하게.”
“수련 중에 원영 화신의 몸으로라도 저를 만나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립의 겸손한 태도에 청원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준 법기로 명하의 땅에 돌아온 것은 충분한 재료를 모았기 때문이겠지? 대략 얼마나 되는가. 3분의 2만 되면 임무를 완성한 것으로 인정하겠네.”
“선배님께 아룁니다. 선배님이 주신 목록에 적힌 재료가 담긴 저물탁입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한립이 녹색 저물탁을 꺼내 두 손으로 노인에게 건넸다.
“허허, 젊은 친구답게 자신감이 충만하군. 어디 얼마나 모아 왔는지 보세.”
청원자가 재미있다는 얼굴로 저물탁을 받아 두 눈을 감고 안을 확인했다. 원요와 연려가 청원자의 표정을 살폈다. 직접 저물탁 안의 재료를 확인할 수는 없어도 표정만으로 그가 만족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강대한 의식을 지닌 청원자는 수많은 재료가 담긴 저물탁을 확인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태연하던 노인의 표정이 점차 놀라움으로 바뀌어갔다.
노인의 밝은 표정에 원요가 마음을 놓고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한립을 보았다. 청원자의 의녀인 그녀는 한립이 가져간 목록을 얼추 알고 있었다.
구하기 어렵고 무척 진귀한 것들이라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재료를 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좋구만! 아주 좋아! 몇 가지를 제외하고 전부 모아올 줄이야. 노부를 정말 놀라게 하는구만. 이렇게 되면 다음번 뇌겁을 무사히 넘길 가능성이 2할은 높아지겠어!”
청원자가 눈을 번쩍 뜨고는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것들로도 겨우 2할밖에 가능성을 높이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 말에 한립은 깜짝 놀랐다.
그가 모은 재료들은 하나같이 영계를 샅샅이 뒤져도 구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몇 가지는 광한계 금제 속 약재 밭에서 가져온 선계 영초였으니 영계에서는 일찍이 멸종되어서 절대 구할 수도 없었다.
“나 정도 경지에 이르면 평범한 방법으로는 뇌겁을 막아낼 수 없다네. 2할이라도 뇌겁을 무사히 넘길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기대 이상이지. 당초 노부가 재료들을 모아오면 명하신유를 보수로 주겠다고 약속했을 걸세. 아직도 명하신유를 원하는가? 수사가 동의한다면 다른 비슷한 가치를 지닌 물건을 내줄 수도 있네.”
청원자가 소중하게 저물탁을 품에 넣었다.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명하신유는 제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건입니다. 저는 꼭 명하신유를 받고 싶습니다.”
원요의 말로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한립은 지체 없이 답했다.
“흠, 그렇다면 어떻게 구할지 생각을 좀 해 봐야겠군.”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연유를 알아도 되겠습니까? 선배님께 명하신유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백 년만 일찍 왔거나 아니면 차라리 2, 3백 년 후에 왔으면 노부도 곤란하지 않았을 걸세. 내가 지니고 있던 명하신유는 누가 급히 빌려가서 몇 백 년이 지나야 새로운 명하신유를 구할 수 있네.”
“빌려갔다고요?”
“부유족 태상 장로가 급한 일로 빌려달라는 통에 그간의 정을 보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네.”
청원자의 말에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하, 그리 걱정할 것은 없네. 자네가 명하신유를 원한다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명하신유를 구할 곳이 있습니까?”
“물론이네. 명하신유가 진귀하기는 해도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일정 분량을 제공 받고는 하지. 절반은 부유족이 거둬 가지만 영계에 머무는 여러 실력자들이 나머지를 골고루 나누어 갖는다네.
다만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다들 성격이 괴상하고 나도 친분이 있는 수사가 별로 없어 문제지만. 직접 찾아가서 명하신유를 구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겠네. 일이 어찌 됐든 수사가 손해 보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니 안심하게.”
반색하는 한립을 보고 청원자가 미리 생각한 바를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