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8화. 다시 나타난 형수(刑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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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현천잔보로 돌연 기습하려던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겐 아직 수만 마리의 서금충과 팔뚝에 봉인된 현천의 검이 있었다. 상대가 죽기 살기로 덤비면 그도 둘 중 하나로 승부를 볼 생각이었다.
어 장궤는 뇌수와 융합해 대승 초기까지 법력을 끌어올렸지만 진정한 대승기 존재와 비교하면 한참 모자랐다.
게다가 그가 현천의 보물을 사용해 싸우기 시작하면 명하의 땅에 사는 청원자가 분명 알아채고 상황을 파악하려 나설 것이다. 그는 강력한 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기만하면 되었다.
한립이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본격적으로 상대와 결판을 내려는데 쌍두괴조의 두 머리가 섬뜩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과 조류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기이한 소리를 냈다.
콰릉
괴조의 날개가 펄럭이고 만 개가 넘는 오색 뇌전이 뻗어 나갔다. 마치 오색 뇌전의 바다에 빠진 것처럼 주변이 오색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수많은 전투경험이 있는 한립도 오색 뇌전의 바다 앞에서는 가슴이 서늘해져 칼날 조각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바로 그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
소매 속에서 원숭이가 울부짖으며 검은 영수환이 저절로 날아올라 오색 뇌전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콰르릉 콰쾅! 콰쾅!
수백 줄기의 뇌전이 내리꽂히자 검은 영수환이 터지고 그 안에서 검은 빛이 빠져나왔다.
쌍두괴조가 의아한 얼굴로 은색 손을 뻗었다. 뇌전 천여 줄기가 응결해 오색 거대 손을 만든 다음 검은 기운을 움켜쥐었다.
거대 손이 검은 기운을 으깨려는 순간 원숭이 울음소리가 들리고 핏빛이 튀어나와 오색 거대 손을 관통했다. 신기하게도 거대 손은 천적을 만난 것처럼 허물어져 사라졌다.
자유를 되찾은 검은 기운은 새까만 어린 원숭이로 변했다. 바로 제혼이었다!
제혼은 매우 흥분해 한립이 의식으로 재촉할 새도 없이 검은 기운을 흘리며 거대 원숭이로 변했다. 제혼은 핏빛으로 충혈된 눈을 번득이며 주먹으로 사납게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전신의 털이 바짝 서고 머리에 뿔이 난 제혼은 제3의 눈을 지닌 거대 악귀로 또 한 번 모습을 바꾸었다.
“혀, 형수!”
뜻밖에도 쌍두괴조 중 어 장궤 머리가 한눈에 형수를 알아보고 겁에 질려 소리쳤다. 괴수는 두꺼운 뇌전방패를 만들어 몸을 보호한 후 여덟 개의 날개를 펄럭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순간이동을 하며 괴조가 둔광을 펼쳐 달아나려는데 거대 악귀로 변한 제혼이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도록 포효했다. 괴조가 달아나자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거대 악귀가 몸을 팽창해 피부에 금은색 주술문자를 드리우고 제3의 눈에서 핏빛 빛기둥을 분출했다. 그러자 달아나던 쌍두괴조가 갑자기 핏빛 사슬에 걸려 몸을 가누지 못했다.
괴조를 칭칭 감은 핏빛 사슬에서 핏빛 뇌전이 방출되고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다.
휙!
핏빛 사슬에 묶인 괴조의 방대한 육체가 속절없이 끌려갔다. 두 머리가 겁에 질려 버둥거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변을 장악한 뇌전의 천지법칙도 핏빛 쇠사슬에는 무력하기만 했다.
제혼이 변한 거대 악귀가 키득거리자 괴조를 묶은 핏빛 쇠사슬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곧 제혼 바로 앞에 핏빛 쇠사슬에 묶인 쌍두괴조가 나타났다.
제혼은 털이 북슬북슬한 손으로 허공을 쥐자 거대 악귀 등에 솟아 있는 날카로운 뼈 가시 중 하나가 손에 들렸다. 상고 시대의 오묘한 주술이 울려 퍼지고 검은 등뼈 가시에 금색 주술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졌다.
웅!
등뼈 가시가 검은 뼈창으로 변해 진동했다.
휘익!
창끝에서 금빛이 반짝이더니 주술문자들이 허공에 퍼지고 소름 돋는 살기가 하늘을 찔렀다. 쌍두괴조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더욱 격렬하게 쇠사슬을 벗어나려 했지만 실패했다.
콰앙!
뼈창이 제혼의 손을 떠나 쌍두뇌조의 뇌수 머리를 관통했다. 뇌수 머리에 주먹 크기의 구멍이 뚫렸지만 피와 살이 튀는 대신 눈부신 오색 기운이 흩날렸다.
제혼이 그것을 보고 콧김을 흥! 하고 불어 오색 기운을 빨아들였다. 아직 어 장궤 머리는 멀쩡했지만 그것을 보고 혼비백산해 입에서 은색 단검을 뿜었다.
어 장궤는 은색 단검으로 스스로 머리를 잘라 자유를 되찾고는 핏빛으로 변해 몸을 탈출했다. 이에 남은 괴수의 몸이 오색 기운으로 변했다.
제혼은 그마저도 노란 빛으로 휘감아 뱃속에 집어넣고 기분 좋은 얼굴로 배를 쓰다듬었다.
핏빛 쇠사슬이 영기의 빛으로 돌아가고, 뼈창이 괴이하게 제혼의 등으로 돌아갔다. 등뼈 가시의 빛이 예전보다 어둑한 것이 이번 일격으로 적잖은 기운을 쓴 것 같았다.
한립은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달아나는 핏빛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금빛 칼날 조각과 서금충을 거두고 다시 금색 거원으로 변해 풀쩍 뛰어올랐다.
핏빛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원은 거침없이 주먹을 내질렀고, 무형의 괴력이 핏빛을 덮쳤다. 그러나 핏빛은 허공에서 급격히 방향을 틀어 주먹을 피하고 멀찍이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한 낯에 기운이 쇠한 어 장궤였다. 그는 이제 합체 초기의 경지에도 미치지 못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정 그렇다면 노부도 수만 년을 수련한 몸을 버리고서라도 끝까지 앙갚음을 하고 말 겁니다!”
어 장궤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핏빛 거대 공작으로 변했다. 피비린내를 풍기는 공작은 이전보다 몸집은 작았지만 기세가 상당했다.
흠칫 놀란 한립이 슬쩍 제혼을 보았다. 그러나 제혼은 괴조의 정핵(晶核)을 들고 싱글벙글 웃고 있을 뿐 어 장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의식으로 명을 내려 보아도 효과가 없었다.
이에 금색 거원이 표정을 굳히고 두 손에서 푸른색과 검은색 빛덩이를 불러냈다. 검은 산봉우리와 푸른 산봉우리가 털이 복슬복슬한 거원 손에 떠올랐다.
거원은 힘을 끌어올려 두 극산을 냅다 집어 던졌다.
웅!
날아오른 두 산은 몇 배로 커져 거산이 되어 핏빛 공작 위로 순간이동을 해 떨어졌다. 거산이 떨어지며 허공을 울리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고 무형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엄청난 기운을 감지한 핏빛 공작은 흠칫 놀라 날개를 힘차게 펄럭였다. 핏빛 소용돌이가 치솟아 두 극산을 막으려 했다.
핏빛으로 변한 오색신광은 피비린내가 진동했고 보물을 오염시키는 신통이 있었다. 어 장궤는 두 거산이 제아무리 대단한 보물이라도 오염될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두 극산의 제련법은 영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진선계에서 유래한 원합오극산 중 일부였다.
푸른 거산과 검은 거산의 힘에 거원의 괴력이 더해져 연달아 핏빛 소용돌이를 꿰뚫었다.
“악!”
대경실색해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던 핏빛 공작이 엄청난 크기의 두 거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둥지둥했다. 오색 공작은 결연한 얼굴로 입에서 두루마리를 분출했다.
그러자 두루마리 속에서 오색 누각 허상들이 튀어나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오색 누각 허상들은 두꺼운 보호막으로 응결해 핏빛 공작을 보호했다.
보호막 주변에 공간파동이 이는 것으로 보아 두루마리는 보기 드문 공간보물이 분명했다. 어 장궤는 본명보물인 두루마리가 자신을 살려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두 거산이 눈부신 빛을 뿜었다. 검은 산은 회색 기운을 파도처럼 흘려보냈고 푸른 산은 투명한 검기를 방출해 허공을 메웠다.
콰르릉!
회색 기운과 투명한 검기가 어우러져 오색 보호막과 충돌했다. 이에 보호막에 어린 누각 허상들은 터져나가고 두 거산의 엄청난 힘에 두루마리 법보는 조금도 버티지 못했다.
핏빛 공작은 검은 산봉우리 아래 깔려 전신이 바스러졌고 주변은 검붉은 피로 낭자했다. 그것을 확인한 한립은 미소를 짓다가 얼굴을 굳혔다.
검은 산봉우리가 부들부들 떨었던 것이다. 핏빛공작의 잔해가 하나로 뭉쳐져 구슬처럼 변하더니 점점 형상을 갖추려 했다.
그 모습에 눈빛이 싸늘해진 한립은 멀리서 검은 극산을 가리켰다. 산봉우리가 발산하는 회색 기운이 진해져 천만가닥의 회색실로 변해 핏빛 공작이 뭉쳐진 구슬을 꿰뚫었다.
아직 모습을 갖추지 못한 구슬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그럼에도 회색 실은 허공을 계속 갈랐고 살점들도 더는 뭉치지 못했다.
쉬익!
그 안에서 핏빛이 튀어나와 주먹 크기의 소형 공작을 감추고 달아나려 했다. 비술을 사용해 목숨을 건진 어 장궤의 원영이었다.
하지만 한립이 어찌 그가 달아나게 두겠는가! 거원이 입을 벌려 금색 뇌전을 뿜자 뇌전은 수십 장을 건너뛰어 원영에게 떨어졌다.
꽈광!
소형 공작이 비명을 지르고 재로 변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립은 서둘러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오색공작 잔해로 손을 뻗었다. 금색과 은색 저물탁이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의식으로 대충 안을 살펴 저물탁을 챙기고는 은색 화염을 날려 핏빛 잔해들을 지워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며 어 장궤와 뇌수의 흔적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은색 화염을 회수한 한립은 그 안에서 은은한 오색빛으로 빛나는 액체 덩어리를 찾아냈다.
“대충 걸러냈는데도 이렇게 정순한 진혈을 구하다니. 과연 평범한 오광족은 아니었구나! 오색공작의 직계 후손이라 해도 믿을 수 있겠어.”
한립은 핏빛 병을 불러내 주술을 외워 액체를 남김없이 담아 두었다. 그리고 극산까지 거둬들이고 푸른빛을 번뜩여 거대 악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제혼 앞에 나타났다.
제혼을 바라보는 한립은 마음이 꽤 심란했다. 변신하면 굉장한 위력을 내는 것은 알았지만 나타나자마자 대승기 쌍두괴조를 참살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제혼은 혼백이나 마물에만 상극이 아니었던 건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수환에서 쿨쿨 잠에 빠져 있던 제혼이 깨어나 기쁘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혼과의 의식 연계도 희미해져 있어 더 이상 제대로 통제하기도 무리였다. 걱정이 된 한립은 미간을 좁혔다.
뇌수의 정핵을 갖고 놀던 제혼이 그것을 보고 휙! 하고 입안에 털어 넣고는 고개를 돌려 한립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걱정되십니까?”
“내가 걱정할 게 무엇이더냐. 이제 완전히 지능을 갖춘 것인가?”
내심 흠칫 놀란 한립이 차분히 물었다.
“하하, 머릿속에 이전보다 많은 것들이 들어있기는 합니다! 주인님, 저를 속이려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전보다 관계는 약해졌어도 그 정도 감응 능력은 유지되고 있으니까요.”
뜻밖에도 제혼이 큰 입을 벌려 미소 지었다.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다는 것이지? 이제 저들이 말하는 형수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냐?”
제혼의 말에 한립이 애매한 얼굴로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잠에서 깨어나고 많은 기억들이 생겨났습니다. 제 존재는 남들이 말하는 ‘형수’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주인님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곧 이 세계를 떠나야 할 것 같거든요.”
제혼이 한숨을 내쉬며 한립이 깜짝 놀랄 말을 했다.
“이 세계를 떠나야 한다고? 설마 그 말은…….”
“주인님의 짐작대로입니다. 마금산맥에서 천외마군의 분혼을 잡아먹고 제 몸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다른 세계로부터 저를 부르는 힘이 느껴져 영수환에서 잠을 자며 그것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이성을 잃고 천뢰의 힘을 흡수하고는 이 세계가 저를 더욱 배척하고 있습니다. 아마 얼마 후면 말로만 듣던 진선계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진선계! 너를 소환하는 것이 진선계가 분명하더냐?”
제혼의 말에 한립은 더욱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고, 황당하면서도 의구심이 들었다.
그가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수행해온 목표가 바로 선계에 올라 영생을 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 도달하려면 까마득한 목표를 영수인 제혼이 먼저 이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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