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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95화 (852/2,000)
  • 1095화. 거대 구덩이와 전송

    *

    반나절 후, 그들은 어느 산맥 중심의 기이하게 생긴 봉우리에 도착했다. 회백색 산은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았고 산중턱에서 암석이 크게 갈라져 커다란 ‘인(人)’ 자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곳이 금열이 지닌 지도상의 2층 입구였다.

    습지에서 독봉 떼를 만나 소탕한 것을 제외하면 오는 동안 어떤 지연 요물도 마주치지 않았다. 1층의 저계 요물들은 비령족에 의해 거의 정리가 끝난 듯했다.

    저계 요물들은 별 쓸모가 없어 남겨둘 가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산봉우리 아래쪽으로 내려가던 한립의 표정이 순간 달라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뒤따르던 금열 역시 둔광을 멈추고 소리쳤다.

    “누가 숨어 있는 것이냐? 당장 나오거라!”

    “대장로님과 뇌 성주셨습니다! 명진이 대장로님을 뵙습니다!”

    입구 주변의 허공이 왜곡되며 날개 달린 사내가 괴이하게 나타나 금열에게 예를 올렸다. 천붕족 기운을 가진 사내는 연한 남색 갑옷을 입은 연허 후기 병사였다.

    그 옆으로 다섯 명이 더 나타나 금열을 향해 예를 올리고 물러섰다. 전부 연허기 이상의 수행을 지닌 병사들이었다.

    “명진 현질이었구만. 광석 도적을 잡으려 매복하고 있는 겐가?”

    “대장로님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저희는 명을 받아 이곳 입구를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대장로님과 뇌란 성주께서는 어찌 이곳까지 오셨는지요?”

    천붕인 사내 하나가 신속하게 답하고 물었다.

    “그 일은 금 통령을 통해 들었네. 나와 뇌란 성주는 따로 볼 일이 있으니 그만 가봐야겠군.”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 대장로님과 성주의 길을 막을 수 없지요. 혹시 아래층에서 광석 도적을 찾으신다면 붙잡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1, 2층은 집법대가 완전히 봉쇄한 상태라 도적은 분명 아래층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하하, 수상한 자를 발견하면 당연히 그럴 것이네. 나는 이만 가볼 테니 수고들 하게.”

    천붕족 사내의 말에 금열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립과 뇌란을 이끌고 입구로 날아갔다.

    “명 형, 천붕족 대장로님께서 듣던 대로 수행이 심오하십니다! 금 장로께서 버티고 계시니 천붕인들은 든든하겠어요. 그런데 같이 온 사내는 어째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금열 등이 사라지자 회색 날개 비령인이 명진 수사에게 말을 붙였다.

    “금 장로님은 확실히 천붕족의 큰 복입니다. 게다가 새롭게 선출된 성주께서 두 분이나 있으니 앞으로 우리 일족을 넘볼 종족은 없겠지요. 저도 대장로님과 뇌 성주를 따라간 청년을 처음 보지만 그게 이상한 일입니까? 천붕족이 약소해도 족인들이 몇 명인데 낯선 수사 한둘이 있다한들 그게 무슨 대수라고요. 설마 이상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명진이 달갑지 않은 눈길로 동료를 돌아보았다.

    “그럴 리가요! 그저 물어난 본 것입니다. 하하, 금 장로님과 천붕족 성주께서 신분을 보장하는 인물이라면 믿고말고요.”

    “됐으니 이제 다시 임무에 집중하시지요. 언제 도적이 나타날지 모르니 매복을 계속해야 합니다.”

    머리에 하얀 뿔이 달린 여인이 입을 열었다. 천붕족 사내는 뭐라 대꾸하려 하다가 말을 삼켰고 다른 수사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각, 한립과 두 여인은 거무튀튀한 안개에 휩싸여 아래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출구 하나를 지키려고 영사급 수사 여섯이 몸을 숨기고 있다니, 광석 도적의 실력이 상당한 가 봅니다. 성계 수사든지 아니면 그와 엇비슷한 수준이라는 뜻이겠지요.”

    금열은 둔광 속에서 비꼬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금 수사의 어투로 미루어 보아 사라진 광석에 별 관심이 없으신 듯합니다.”

    “관심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광석을 비령족이 나눠 갖는다지만 대부분은 몇몇 종족들이 가져가고 천붕족에 떨어지는 것은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보아하니 천붕족이 멸족의 위기는 넘겼지만 아직까지도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는 못하나 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사의 제안을 이리 쉽게 수락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수사가 약속한 공법만 있다면 수만 년 내로 천붕족이 세력을 더 키울 수 있을 겁니다. 한 수사, 미리 당부하지만 약조를 어기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전송 장소에 도착하는 대로 나머지 공법을 내드릴 테니 안심하십시오. 약조를 어긴다면 대장로의 처분에 따르지요.”

    금열의 말에 한립은 담담히 미소를 머금었다. 주위의 검은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고 지연 2층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그들은 위치를 확인하고는 서쪽으로 삼일밤낮을 날아갔다.

    그간 중저계 요물들을 격살하고 여러 무리의 집법대 병사들을 마주쳤는데 가장 수행이 낮은 자가 화신급이었고 부대의 대장은 성계의 수사였다.

    그들 역시 천붕족 대장로인 금열의 길을 막지 않았고 몇 가지 간단한 확인만 하고 떠나갔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금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겨우 도적 한 명을 잡기 위해 이렇게 많은 수사가 동원된 것은 뭔가 이상했다.

    ‘광석 창고가 약탈당한 일에 다른 내막이라도 있는 건가?’

    오랜 세월 대장로직을 맡아온 그녀가 의혹을 키워가고 있을 때 세 사람은 3층으로 가는 입구인 은폐된 지하 하천을 발견했다.

    땅속 하천을 통해 몇 시진을 내려가자 그 끝에 지연 3층이 있었다.

    * * *

    사흘 후, 돌조각들이 가득한 황무지를 날아가던 한립 일행은 천지원기의 이상을 감지했다.

    콰르릉!

    저 멀리 하늘 끝에서 은색빛이 번득인 순간 굉음이 터지고 천지가 요동쳤다. 한립과 금열의 표정이 급변해 눈을 마주쳤다.

    “금 수사, 누군가 싸우는 것 같은데 가봐야 할까요?”

    “이렇게 소란스러운 데 가보지 않으면 나중에 집법대의 의심을 살 겁니다.”

    “그렇다면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이나 해봅시다.”

    한립은 괜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여인의 말도 일리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그들은 방향을 틀어 은백색 뇌전이 번득이는 곳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단숨에 엄청난 거리를 날아 둔광을 멈췄는데 그들 아래로 직경이 수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거대한 구덩이는 둘레가 새까맣게 타들어가 냄새가 진동했다.

    한립은 구덩이를 향해 손을 뻗어 휙! 하고 남색 단검 잔해를 끌어당겼다.

    “아까 본 천뢰에 수사들은 죽임을 당하고 본명 법보마저 부서진 듯싶습니다. 일격에 연허 화신급 수사들을 죽일 수 있는 뇌전이라니 엄청난 위력이군요.”

    금열이 아연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렇게 멀리서도 천뢰의 맹렬한 기운이 느껴졌지 않습니까. 보물에 살기(煞氣)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뇌전에 정통한 적인가 봅니다.”

    한립은 단검 조각을 다시 구덩이 속으로 던져 버렸다.

    “맞습니다. 죽은 자의 기운이 셋 이상입니다. 이곳에서 살육을 자행했다면 광석을 훔쳐간 도적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금열이 부서진 돌무더기 틈에서 다른 보물들을 찾아내고 비슷한 판단을 내렸다.

    “집법대 대원을 셋이나 죽였단 말씀이십니까!”

    듣고 있던 뇌란이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게 이상한 일인가? 그 정도 실력이 안 된다면 이곳에 들어와 허튼짓을 하지도 않았을 것일세. 한 수사, 어쨌든 현장에 흉수도 남아 있지 않고 집법대도 도착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제가 가야 할 곳은 이곳에서 며칠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두르시죠.”

    한립은 반갑게 그 말에 동의했고, 셋은 둔광을 일으켜 날아갔다.

    * * *

    이레 후 새까만 산맥 위.

    한립은 한 손에 하얀 원반을 들고 수십 자루의 금색 비검으로 새까맣게 몰려드는 거대 까마귀 떼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열은 금색 거울로 요수들을 가루로 만들었고, 뇌란은 깃털에서 은색 뇌전 그물을 뿜어 스스로를 보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뇌전 그물에 충돌한 까마귀 요수가 재로 변해 흩어지는 것으로 보아 퍽 위력적인 보호막인 듯했다.

    까아아악!

    반 시진이 지나자 까마귀 떼는 처량한 울음소리를 내며 흩어져 달아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뒤를 쫓지 않고 보물과 공법을 거둬들였다.

    이어진 여정 동안 한립은 수시로 원반을 확인하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어느 순간, 하얀 원반이 웅! 하고 길게 울며 하얀빛을 퍼트렸다.

    “여깁니다!”

    반색한 한립이 둔광을 멈추었다. 그 말에 금열과 뇌란도 희색을 드러냈다.

    “수사가 말한 곳이 맞습니까? 공간 파동이 느껴지지 않는데 이곳에 공간접점이 있단 말입니까.”

    금열이 사방을 둘러보고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 선배님이 알려주신 위치가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직접 여기까지 모셔 왔으니 이제 공법의 후반부를 내주시지요.”

    “저도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은 아닙니다. 자, 나머지 반절이니 잘 확인해 보십시오!”

    한립의 손에서 노란 옥간이 날아갔다. 금열이 그것을 끌어당겨 내용을 확인하는 동안 그는 오색 깃발을 분출했다.

    퍼퍼펑!

    깃발들이 오색빛기둥으로 변해 하늘로 치솟았다. 한립이 한 손으로 수결을 맺고 열댓 개의 법결을 빛기둥으로 쏘아 보내자 오색빛의 진법이 형성되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그는 주술을 외우며 극품 영석 백 개와 하얀 원반을 꺼내 빛의 진법으로 던졌다. 뇌란은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며 금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금열의 얼굴엔 아주 만족스런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공법이 가짜는 아닌가 보구나.’

    뇌란이 한시름 놓고 있을 때, 한립이 기합을 넣고 허공의 원반을 가리켰다. 원반은 오색빛의 진법 중앙에 꼭 맞아 하나가 되었다.

    “금 수사, 공법은 마음에 드십니까?”

    “과연 공법의 후반부가 전부 담겨 있습니다. 본 족 수사들을 대신해 감사 올립니다.”

    공법에 푹 빠져 있다 겨우 정신을 차린 금열이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하하, 서로 득이 되는 거래를 했을 뿐인데 감사라니요. 금 수사께서 만족하신다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 수사의 여정이 순조롭기를 바라겠습니다!”

    “저도 수사의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군요. 뇌 성주도 이후 수행이 크게 늘어 성계에 이르기를 바라겠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선배님!”

    여인은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허리 숙여 깊이 예를 올렸다. 이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빛의 진법으로 뛰어올랐다.

    우웅!

    주술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며 빛의 진법을 중심에서 하얀빛이 터져 나왔다.

    하얀빛이 은하수처럼 빛의 진법을 휘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금열의 표정이 순간 달라졌다.

    “누구냐? 썩 나오지 못할까!”

    그녀의 소매 속에서 무형의 압력이 날아갔다!

    쿠쾅!

    무형의 압력에 허공에서 은색 뇌전이 폭발했다. 그때 은색 뇌전 뱀 한 마리가 튀어나가 빛의 진법 속으로 뛰어들었다.

    콰르릉.

    그 순간 빛의 진법에서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빛의 진법에서 거대한 하얀 빛기둥이 솟아올라 고공에 검은 구멍을 만들어내고 사라졌다.

    그러자 빛의 진법은 빛을 잃었고 중앙의 하얀 원반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대장로님, 누가 한 선배님을 따라간 것일까요?”

    “독특한 뇌전 공법으로 내 공격을 막아내고 달아났으니 광석 도적이겠지.”

    금열이 난색을 표하며 상대의 정체를 짐작했다.

    “예, 도적이라고요? 이미 다른 공간으로 달아났는데 어찌해야 할지…….”

    “한 수사의 실력이 나 못지않은데 걱정할 것이 무엇인가! 아마 멀쩡하게 달아나지는 못하겠지. 들키지 않고 며칠간 우리를 따라 온 것으로 보아 고명한 은신술을 가진 자로구만. 그러니 수많은 집법사들을 따돌리고 아직까지 지연에 남아 있었겠지. 그나저나…….”

    금열이 고개를 저으며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러십니까, 대장로님?”

    “그 자의 기운이 퍽 이상했네. 변이 요수의 기운이 섞여 있었는데 만황세계의 뇌운응(雷雲鷹)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달랐단 말이지.”

    “변이 요수의 기운이라면 그 자가 키우는 영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도적의 기운과 하나로 융합된 느낌이랄까. 흠, 어찌 되었든 목적은 달성했으니 되었네. 바로 이곳을 떠나 빙살의 땅으로 가세. 수련을 구실 삼아 들어왔는데 바로 떠나면 의심을 살 테니까.”

    “예, 대장로님!”

    그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 두 개의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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