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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94화 (851/2,000)

1094화. 다시 지연(地淵)으로 (2)

*

얼마 후, 성성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 도착한 그는 동굴을 파고 밀실 입구에 강력한 은닉 진법을 펼쳤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금열과의 대화를 되새겼고 한참후에야 긴장을 풀었다.

오늘 그는 일부러 천붕으로 변신해 천붕족 고위층의 이목을 끌었다. 합체 중기의 그가 펼친 경칩결의 위력은 천붕족이 보통 사용하는 변신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그 차이를 알아본 금열이 그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가 감히 그런 짓을 벌인 이유는 천붕족 장로들이 단체로 달려들어도 달아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천붕족 대장로도 그것을 알았기에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를 취한 것이고.’

다만 그가 거래에 내놓은 법결은 경칩결이 아니라 곡 가에서 얻은 진혈 연화술과 경칩결의 곤붕 변화술 일부를 섞은 것이었다.

금열이 거래하겠다고 답했으니 지연에 들어가는 일은 십중팔구 성공이었다. 천붕족이 비령족 중 약소한 종족이라도 성계 후기를 대성한 대장로 금열이 비령족 영역에서 못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상대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능성 때문에 은근슬쩍 대승기 존재인 청원자를 언급해 놓았다.

한립은 천천히 눈을 감고 좌선에 들어갔다.

그 시각, 천붕족 성성 대전 안에서는 장로들이 금열과 비밀리에 논의를 하다 흩어졌다. 보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세 개의 둔광이 성성을 떠나 비령족 구역 깊숙이 날아갔다.

둔광의 정체는 한립과 금열 그리고 전신에서 뇌전을 반짝이는 묘령의 여인이었다. 맑은 눈빛에 깔끔한 인상을 지닌 묘령의 여인은 천붕족의 두 성주 중 한 명인 ‘뇌란’이었다.

“한 수사께서는 뇌 성주의 빙살(氷煞) 비술 수련을 위해 지연에 함께 들어가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명목상 호위의 신분으로 성주를 수련 장소까지 안내하는 것입니다. 별일은 없겠지만 지연에 들어가 검문을 받게 되면 조심해야 합니다. 비령족 고계 수사들이 지닌 비술의 위력은 다 다르니까요.”

출발한 지 일다경이 지나 금열이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신분을 감추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붕족 대승기 선배님을 마주치지 않는 한 보통의 비술로는 제 정체를 알아낼 수 없을 겁니다.”

한립이 자신 있게 답했다. 체내에 진짜 천붕진혈을 지니고 이미 한 몸과 다름없는 풍뢰시를 지녔으니 그가 들킬 일은 없었다.

“자신이 있다니 다행입니다. 뇌 성주, 지연에 이르면 수고해주게.”

금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은색 장삼을 입은 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예, 대장로님. 이전에도 빙살의 기운을 수련하기 위해 지연에 들어간 적이 있으니 수비병들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은삼 여인이 공손히 답하고 슬쩍 한립을 보았다. 그녀는 출발 전에야 한립이 성계 중기의 수사가 되어 돌아온 것을 알았다.

지연에 동행했을 때도 물론 동급 수사를 초월했었지만 겨우 몇 백 년 만에 성계 중기 수행에 이른 것이 너무 불가사의했다. 그러나 캐묻지 않고 후배로서 예전의 은혜에 감사를 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금열 일행은 매우 빠른 속도로 날아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 * *

몇 달이 흐르고 한립은 지연을 지키는 병사들과 거대한 성벽을 다시 마주했다. 금열은 한립과 뇌란을 데리고 성벽 아래의 성문으로 내려갔다. 열댓 명의 날개 달린 수비병들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둔광이 가시고 그들이 수비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한립은 이미 용모를 바꾸고 체내의 법력을 연허기 수준으로 억누른 상태였다.

“천붕족 선배님께서 이곳까지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지금은 각 종족이 돌아가며 지연을 수비하는 시기도 아닌데요.”

연허 중기 수비병이 금열에게 간단히 예를 올리고 물었다. 금열의 정확한 수행을 파악할 수 없자 성계 수사라고 생각해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는 한립이나 뇌란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랜 세월 지연 요수들과 싸워 동급 수사에 비해 강한 이곳 병사들은 평소 다른 동급 수사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금열은 그것을 알면서도 혼내지 않고 남색 옥패를 던져주었다. 부대의 대장으로 보이는 수비병이 옥패를 받아들고 안색이 달라져 두 손으로 옥패를 돌려주었다.

“천붕족 대장로 금 선배님이신지도 모르고 결례를 범했습니다.”

“각 종족이 체결한 약조에 따르면 대장로는 언제든 지연에 드나들 수 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금열이 옥패를 받아 넣으며 담담히 물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수비병이 재빨리 대답하고 성문을 막고선 대원들을 양쪽으로 물렸다. 이에 금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립과 뇌란을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갔다.

성문 안쪽에는 수백 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원주형 누각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지만 오가는 이들은 경비를 서는 수비병뿐이었다.

“이곳에서 묵어갈 것이 아니니 어서 가시지요!”

한립의 귓가에 금열의 전음이 울렸다. 그들은 다시 날아올라 성의 다른 끝으로 향했다.

한 시진 후, 세 사람은 거대 진법이 새겨져 있는 성벽 앞에 도착했다.

그 앞을 여러 수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띠는 것은 방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푸른 갑옷의 중년인이었다.

사내를 본 한립은 마음이 서늘해졌고, 금열의 동공도 순간 미세하게 수축했다. 중년 사내는 예전에 보았던 지연 수비병 통령 금봉이었다. 성계 후기를 대성한 금봉은 어쩐 일인지 직접 지연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금열은 여러 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티내지 않고 빙긋 웃었다.

“금 통령께서 이곳에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그녀의 목소리에 청갑 사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누군가 했더니 천붕족 금 선자께서 오셨습니다. 천붕족에서 수련에 매진하지 않고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그건 제가 묻고 싶군요. 언제부터 지연 입구를 금 통령이 친히 지키셨단 말입니까?”

“평소라면 그럴 일 없겠지만 얼마 전 사고가 발생해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사고요?”

담담한 사내의 말에 금열이 멈칫했다.

“한 달 전 쯤 지연의 광석 창고가 털렸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누군가 수 년 간 채굴해 놓은 진귀한 광석들을 모조리 훔쳐가고 창고를 지키던 병사들 태반을 죽였습니다! 도적의 신통이 보통이 아니라 집법대를 지연에 파견하고 이곳이 유일한 출구라 직접 지키고 있던 참입니다.”

“그런 일이 다 있었습니까? 기억하기로는 지연의 광맥은 진 장로가 머물며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설마 진 장로도 도적의 상대가 되지 못했단 말입니까?”

이번에는 금열도 깜짝 놀라 물었다.

“도적놈이 교활하게도 진 장로가 잠시 일이 있어 광맥을 비운 사이 그런 일을 벌였다고 합니다. 진 장로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창고가 비어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금 선자께서 무슨 용무인지 밝힐 차례입니다. 아무리 대장로들이 지연에 출입할 권리가 있다 해도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청갑 사내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금열의 답을 기다렸다.

“제가 일이 있어 지연을 찾은 것이 아니라 본 족 성주가 빙살의 기운을 빌려 수련해야 해서 부득이하게 지연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금열이 뇌란을 가리키고 빙긋 웃었다. 뇌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청갑 사내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뇌란이 금 선배님을 뵙습니다!”

“뇌란 성주. 흠, 이전에도 지연에서 수련한 선례가 있다는 것은 보고받았네. 금 장로께서 동행하시니 지연이 혼란스럽다 해도 위험에 처할 일은 없겠지. 그런데 저 자도 함께 지연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청갑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다 한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제 후배 중 하나인데 자질이 뛰어난 편입니다. 뇌란 성주의 호위로 함께 지연에 들어가려 합니다.”

“금 선자가 같이 가는데 호위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안 그래도 지연이 혼잡하니 저 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청갑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립을 살폈다. 그 말에 뇌란과 한립의 표정이 미미하게 달라졌으나 금열만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 현질은 단순한 호위가 아니라 성주와 특별한 관계인 데다 이번 수련에 꼭 필요해서요. 꼭 같이 지연에 들어갈 사정이 없었다면 제가 굳이 데려왔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호위가 뇌 성주의 수련에 꼭 필요하다니요?”

청갑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에 금열은 살짝 미소를 짓고는 청갑 사내만 들리도록 전음을 보냈다. 청갑 사내는 그녀의 전음에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기왕 그렇다면 저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금 통령은 묘한 눈빛으로 한립과 뇌란을 훑고 이렇게 말했다. 한립과 뇌란은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청갑 사내가 신호를 보내자 수비병들 중 몇 명이 보라색 목패를 꺼냈다. 목패가 빛을 발산하고 보라색 빛기둥이 성벽에 새겨진 진법으로 날아들었다.

우웅!

진동 소리와 함께 은색 진법이 사라지고 성벽에 은색 거대 문이 나타났다.

쿠쿵!

청갑 사내의 주술 소리에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수사!”

금열이 인사를 하고 한립과 뇌란을 데리고 빠르게 그 안으로 들어가 종적을 감추었다. 청갑 사내는 문 앞에 가만히 서서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무언가 찜찜한 얼굴이었다.

“괜한 생각이겠지. 느낌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호위라는 자는 확실히 문제가 없지 않았는가. 게다가 천붕족 대장로인 금열이 비령족에 해를 끼칠 리도 없고.”

그는 분부를 내려 거대 문을 봉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편 한립 일행은 드넓은 운해 속에서 괴상한 바람을 맞으며 지연 입구로 향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화신기 수행을 지녀 날아가느라 고생했지만 합체 중기에 이른 그에게 이 정도 장애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심지어 마지막에 새까만 바람을 맞닥뜨렸을 때도 푸른빛을 번득여 바람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 후 그들은 고깔 모양의 지연 입구에 도착했다. 검은 광풍이 부는 거대한 구덩이를 본 한립은 주저 없이 안으로 뛰어들었고 금열과 뇌란도 그 뒤를 따랐다.

지연 입구에 들어서자 도처에서 돌풍이 불어왔는데 이전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았다. 일다경을 추락해 지연 1층에 도착한 한립은 주위를 살피고 미간을 좁혔다.

그들은 회색 늪 위에 떠있었는데 그 위를 뒤덮은 녹색 안개에서 썩은 내가 났다. 처음 그가 지연 1층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금 수사, 이곳이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2층 입구와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아마 2층 입구와 그리 멀지 않은 독란습지(毒蘭濕地)일 겁니다. 반나절이면 갈 수 있겠지요. 조심할 것은 습지에 서식하는 독란화(毒蘭花)에 독봉(毒蜂) 떼가 기생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습지를 둘러본 금열이 확신에 차서 답했다. 비령족이 지연을 점령한지 꽤 세월이 지나 금열은 이곳 지형에 익숙했다.

“독봉이요?”

그 말에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고 방향을 정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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