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3화. 다시 지연(地淵)으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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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립은 주저 없이 백의 소녀를 따라 성성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천붕족 장로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한립은 조금 전 푸른 곤붕으로 변해 엄청난 기세를 내뿜었기에 성성 안의 많은 수사들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나 그저 천붕족 장로들이 직접 성 밖으로 나선 것을 보고 멀리서 지켜만 보았다.
게다가 대장로 금열이 진작 인근에 금제를 펼쳐 소리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기에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거대 붕새가 청년으로 변해 대장로와 이야기를 나누다 같이 성으로 들어가는 것은 똑똑히 보았다.
그들은 신기다하는 눈빛으로 한립과 장로들이 이동하는 것을 구경하다 흩어졌다.
한립은 금열을 따라 성성 중심의 거대 전당으로 들어가 대청 안에 자리를 잡았다. 대장로의 분부에 묘령의 시녀들이 차와 과실을 내와 상을 차렸고 금열은 한립을 귀빈 대하듯 정중하게 대접했다.
그는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수사, 차는 어떠십니까? 매년 아주 소량만 생산되는 성성 특유의 ‘향녀차(香女茶)’로 동이 트기 전 원음을 지닌 소녀들이 채취해야 최상의 향을 낼 수 있습니다.”
“향이 그윽합니다. 확실히 보기 드문 좋은 차군요.”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따로 찻잎을 챙겨 드리겠습니다.”
짝! 짝!
한립의 답에 금열이 손뼉을 쳐서 곁의 시녀를 불러들였다.
“다원(茶園)으로 가서 가장 좋은 찻잎으로 가져 오거라.”
“예, 대장로님!”
시녀가 놀란 눈빛으로 서둘러 대청을 나섰다. 한립은 조금 의외였지만 표정 변화 없이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때 주위의 장로들도 금열의 태도에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다른 장로들은 한 수사를 처음 보시지요? 제가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천붕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준 인족(人族) 수사라고 하면 한 수사가 누군지 떠오르실 겁니다.”
금열은 의아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장로들을 향해 말했다.
“예, 뭐라고요?”
“지연에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어찌 그 자가!”
천붕족 장로들이 화들짝 놀라 수군거렸다.
“지연에서 운 좋게 탈출해 천붕족으로 돌아오지 않고 바로 인족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저를 탓하시지는 않겠지요.”
한립은 아무렇지 않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럴 리가요! 한 수사가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백벽과 뇌란이 무사히 성주가 되어 천붕족이 안정을 되찾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약조한 일을 마친 수사가 자유롭게 떠난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몇 백 년 만에 성계에 진입한 것은 직접 보지 않았으면 믿기 어려웠을 겁니다. 지연의 사대요왕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수사와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 그에 대해 해줄 말씀은 없으십니까?”
“저도 천붕족에 진입해서야 사대요왕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허나 그 일은 저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당시 일을 상세히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사대요왕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했으면 영원히 지연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수행이 이렇게 빨리 늘 수 있었던 것은 만황세계에서 기연을 얻은 덕입니다. 금 수사께서도 수행이 크게 늘지 않으셨습니까?”
금열이 예전 일을 캐묻자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가 당시 사정을 털어놓자 금열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말하기 편치 않으시다면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붕새로 변신해 성성을 찾아온 연유가 따로 있을 테지요. 그저 신통을 자랑하러 여기까지 오신 것은 아닐 것 아닙니까.”
그녀의 말투가 서늘해졌고 다른 장로들의 시선도 날카로워졌다.
“금 수사께서 보시기에 제 천붕 변신술이 어떤 것 같습니까?”
“수사의 변신술은 상당한 경지였습니다. 천붕족도 아닌 외부인이 곤붕진혈을 그 정도까지 연화시켰다는 것이 놀랍군요.”
“하하, 정말 그렇게 간단한 문제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 수사,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씀을 하세요. 저는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금열의 서늘한 눈빛에 한립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상대의 말에는 답하지 않고 하얀 옥간을 꺼내 던졌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일단 옥간의 내용을 확인하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옥간을 받은 금열은 썩 좋지 않은 표정으로 그것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엇! 이것은…….”
여인의 표정이 대번에 달라졌고 한립을 제외한 대청 안 수사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금열은 너무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옥간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옥간을 살피는 동안 한립은 차를 즐겼고 그렇게 한식경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제야 금열은 길게 숨을 토해내며 옥간에서 의식을 불러들였고 복잡한 표정으로 한립을 응시했다.
“이건 어디서 난 공법입니까? 스스로 만들어냈다고 말하지는 않을 테지요. 이건 천붕인이 수련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공법이 분명합니다.”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하지만 누가 공법을 만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천붕족에 이 공법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 가가 가장 중요할 겁니다.”
“공법 법결 절반을 그냥 구경하라고 보여준 것은 아닐 겁니다. 이제 천붕족을 다시 찾은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요.”
한립의 여유로운 표정에 금열은 영기의 압력을 폭발적으로 일으켜 위협했다.
“하하,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단 워낙 중요한 일이라 수사와 단독으로 상의하고 싶군요.”
금열의 모습에 한립이 웃음을 터트리다 일순 정색하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다른 장로들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한 수사와 상의를 끝마치는 대로 다시 들어오시지요.”
“예, 물러나 있겠습니다.”
“저희는 대청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장로들은 무슨 일인지 몰라 답답했지만 금열의 명을 거스르지 않고 대청을 떠났다. 이제 대청 안에는 한립과 백의 여인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금열이 한결 온화한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한립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소매를 펄럭여 도처로 열댓 개의 오색 깃발을 날려 보냈다. 허공에서 깃발들이 사라지고 오색 보호막이 펼쳐져 한립과 여인을 엄밀히 보호했다.
“제가 있는 곳을 장로들이 염탐이라도 할까 이러십니까?”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라 그런 것이니 기분 나빠하지 마시지요.”
“수사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공법의 나머지 절반도 수사의 손에 있는 것이 확실합니까?”
“하하, 그건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완전한 공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거래를 제안할 생각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럼 됐습니다. 수사가 말한 거래의 내용이 무엇인지요.”
그 말에 금열의 표정이 훨씬 밝아졌다.
“지연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천붕족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대신 이 특수한 곤붕진혈 연화법을 보수로 내어드리지요.”
이번에는 한립도 시간을 끌지 않고 원하는 바를 말했다.
“지연에 들어가고 싶다고요?”
“금 수사에게도 어려운 일입니까? 비령족이 이미 지연을 점령했으니 수사께서 저를 들여보내 주시는 것은 간단한 일일 텐데요.”
“백 년 전이었으면 간단한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성가시게 되어서 말입니다.”
금열이 옥간을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백 년 전에 누군가 지연 마지막 층에서 진귀한 광맥을 발견했습니다. 매장량이 상당한 곳이라 누군가 몰래 채굴을 할까봐 지연은 지금 반쯤 금지(禁地)나 다름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연의 마지막 층은 그곳을 지키는 병사가 아니면 각 종족의 장로들도 진입이 제한되어 있으니까요.”
의아한 얼굴의 한립을 보고 금열이 머뭇거리다 상황을 설명했다.
“마지막 층까지는 갈 필요 없습니다. 제가 가고자 하는 곳은 지연 3층입니다.”
“아, 마지막 층이 아니라면 협상의 여지는 있습니다! 일단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제게 지연에 들어가려는 진짜 이유를 알려주셔야 합니다. 지연에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다면 겨우 공법 구결을 얻기 위해 외부인을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비령족 전체의 안위 역시 고려해야 하는 제 입장을 이해해 주십시오.”
“수사가 우려하는 바는 알겠습니다! 제가 지연 3층으로 가려는 이유는 어떤 선배님과의 약속 때문입니다. 선배님이 알려준 장소로 가야 그 분이 있는 또 다른 공간으로 넘어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비령족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며 결코 비령족에 해가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공간! 이미 성계 중기에 이른 한 수사께서 ‘선배님’이라 칭한다는 것은…….”
한립의 대답에 금열의 안색이 달라졌다.
“금 수사의 추측대로입니다. 인족과 인연이 있는 그 선배님 덕에 당초 사대요왕의 손에서 벗어나 달아날 수 있었고, 이번에 이곳으로 돌아온 것도 그분의 부탁 때문입니다. 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선배님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 걱정입니다.”
한립은 눈을 빛내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저를 위협하는 것입니까!”
“위협이라니요. 그저 아주 오랜 세월 은거해온 선배님께 이번 일은 아주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금 수사께서도 공연히 비령족에 강력한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흥, 지금 수사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찌 증명한단 말입니까?”
“직접 저를 지연 3층까지 데려다 주시면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언제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 저를 제압하면 될 것이고요! 후기를 대성한 수사의 수행에 겨우 중기 존재인 저를 막는 것은 큰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으시면 다른 장로들을 대동해도 상관없습니다.”
“좋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안심이 되지는 않습니다. 예전에도 수행에 비해 신통이 대단했는데 이제는 성계 중기 수사가 되었으니까요. 제 힘으로 수사를 제압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군요.”
금열이 고민하다 경계심을 드러냈다.
“금 수사, 제가 내드릴 공법에 천붕족의 미래가 달렸습니다. 앞으로 천붕 변신술의 위력을 훨씬 높일 수도 있는 공법이고요. 약간의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그런 공법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한립은 조소하는 기색을 담아 말했다. 그 말에 금열이 얼굴을 찡그렸고 눈빛에 한기가 감돌았다.
“혹시 딴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홀로 이곳에 왔을 때는 그만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겠습니까? 공법의 나머지 절반은 따로 복제해둔 옥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제 기억 속에만 있습니다.
수사께서 다른 방법을 써서 공법을 차지하려 든다면 아예 구결을 없애 버리고 이곳을 떠날 겁니다. 천붕족의 힘으로 저를 붙들어 둘 수 있을지는 알아서 판단하시고요.”
한립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도 많으십니다. 본 족의 은인인 수사께 어찌 딴 마음을 품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지연 3층으로 수사를 모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온당하게 일을 처리하기 위해 얼마간 기다려 주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면 성성에 머무는 것이 어떠십니까?”
“대장로, 현명한 결정이십니다. 저는 며칠 간 짬을 내 수련할 비술이 있으니 성성에 폐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보름 후에 다시 찾아뵙지요. 그때까지 준비를 마쳐 주실 거라 기대하겠습니다.”
한립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붙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여봐라, 찻잎을 들여 오거라!”
금열이 고개를 돌리고 대청 밖을 향해 소리쳤다. 잠시 후, 시녀가 다급히 들어와 노란 가죽 주머니를 한립에게 바쳤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한립은 굳이 거절하지 않고 금색 기운으로 가죽 주머니를 감싸 챙겼다. 이어 금열에게 포권을 하고 대청을 빠져나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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