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2화. 비령족으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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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조 내부가 혼란스러워 푸른 둔광 속 인물을 제대로 살필 수 없었지만 푸른빛이 은조 속 뇌전과 우박에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에 비령인 원영기 남녀가 시선을 마주치더니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휘이익!
둘 사람의 휘파람 소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굉음을 뚫고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높낮이가 일정하게 바뀌는 이 휘파람 소리는 비령족 특유의 구조 신호였다.
은조 속 인물이 귀머거리가 아니라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 비령인들의 존재를 알아챌 것이다. 과연 은조 속 푸른 둔광이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마자 멈칫했다.
“너희는 비령족 중 어느 일족이며,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이더냐?”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보호막 안까지 또렷하게 울렸다.
“저희는 오광족(五光族), 백옥족(白玉族) 그리고 천붕족(天鵬族) 제자들입니다. 경험을 쌓기 위해 제자들을 데리고 나왔다가 천년에 한번 있는 은조를 마주친 것입니다. 제발 저희를 좀 살려주십시오, 선배님!”
원영기 사내가 반색하며 큰 소리로 답했다. 그러나 낯선 사내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고, 비령인들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뇌전과 우박을 동반한 바닷물 소용돌이가 코앞이었다.
콰르릉!
뇌성이 울리고 드디어 보호막이 소용돌이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귀가 터질 것 같은 굉음과 함께 두꺼운 보호막이 위태롭게 반짝거렸다.
대경실색한 비령인들은 원영기 남녀의 분부에 따라 깃발에 미친 듯이 법력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우웅!
흩어지던 보호막이 다시금 두꺼워졌다. 하지만 보호막이 깨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바로 그때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천붕족 녀석들도 있다니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구나. 내 너희를 이곳에서 내보내 주마!”
콰콰쾅!
비령인들이 기뻐하며 전음으로 대답하려는데 머리 위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굵은 은색 뇌전들이 나타나 서로 엉키더니 거대한 뇌전 진법을 형성했다.
진법 중앙에는 푸른 장포를 입고 등에 수정 날개가 달린 사내가 떠있었다.
사내는 냉랭히 아래쪽을 훑고는 수결을 맺어 등 뒤의 날개를 펄럭이더니 은색 뇌전을 이용해 간신히 버티고 있던 비령인들의 보호막을 종잇장처럼 찢어냈다.
이에 비령인들이 기겁하며 얼굴에 핏기가 가신 순간 뇌전의 빛이 그들을 감쌌고 천둥소리 속에서 천지(天地)가 뒤바뀌었다.
뇌전으로 만들어진 진법인 ‘뇌진(雷陣)’이 은조에 갇혀 있던 그들을 은조가 아직 도달하지 않은 해수면 위로 전송시켜 준 것이다. 죽다 살아난 비령인들은 놀란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환호했다.
“선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천붕족의 장로이신지요?”
원영기 사내는 푸른 장포 사내의 수행을 전혀 짐작할 수 없자 공손히 예를 올리며 물었다. 다른 비령인들도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분분히 예를 올렸다.
“천붕족? 하하, 물론 아니다. 그저 천붕족과는 오래전 인연이 있었기에 구해준 것이다.”
청년의 모습을 한 푸른 장포의 사내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는 80년이 걸려 이제야 비령족 영역에 도착한 한립이었다.
합체 후기 수사에 맞먹는 신통을 지녔기에 딱히 생명이 위험할 만한 일은 없었지만 대륙을 지나며 성가신 일들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특히 그조차 경계할 만한 몇몇 위험한 지역들을 돌아오느라 십여 년을 더 허비했다.
“그렇다 해도 선배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갚지 않을 수 없지요. 성함을 알려주시면 본 족으로 돌아가는 대로 장로들께 고해 사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은 낮아도 신분이 높은지 원영기 여인이 공경스런 태도로 말했다. 등 뒤의 날개가 오색으로 빛나는 것이 오광족 같았다.
“별일 아니니 사례는 되었다. 그저 만황세계에서 수련하다 돌아와 이곳 상황을 모르니 최근 몇 백 년 간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거라.”
“저희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답해드리겠습니다. 그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 비령족을 가장 떠들썩하게 만든 것은 지연의 요왕들이 갑자기 사라진 사건입니다. 결국 지연은 저희 비령족이 연합해 점령하게 되었고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오광족 여인이 성실하게 답했다.
“지연을 점령했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예, 선배님. 몇 백 년 전 성자들이 시련을 치르러 심연에…….”
오광족 여인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푸른 둔광을 일으켜 비령족 무리를 떠나 사라졌다.
“헌 사매, 그렇게 많은 내부 사정을 발설해도 되는 걸까요?”
한립이 사라지자 원영기 사내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면 형,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광족 여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다름이 아니라 저 선배님께서는 이름도 밝히지 않으셨고 얼굴이 아주 낯설지 않았습니까. 비령족 선배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주저하던 사내가 주변 수사들이 깜짝 놀랄 말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곳 해역에 나타났고 등에 날개가 돋은 선배님이 비령족이 아니라니요?”
여인이 답하기 전 무리 중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맞습니다. 스스로 천붕족과 인연이 있다고 하셨고 두 날개와 뇌전 신통 모두 천붕족 특유의 신통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비령족에 잠입하려는 첩자였다면 떠나기 전에 우리 모두를 죽여 입막음을 했을 겁니다. 면 형 너무 걱정이 많으신 것 아닙니까?”
오광족 여인도 걱정하는 기색 없이 가볍게 웃어 넘겼다.
“제가 괜한 생각을 했나봅니다.”
아직도 생각이 많아보였지만 원영기 사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방금 말한 것들은 비령족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일들이고 기밀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마음 푹 놓으시고, 어서 이곳 해역을 벗어나지요. 은조에 다시 따라잡히면 그때는 정말 죽은 목숨입니다.”
“맞습니다. 이곳은 위험하니 어서 벗어나야 합니다.”
“헌 사저의 말씀이 옳습니다. 방금 그 분의 수행에 정보를 알아내려고 마음먹었으면 어떻게든 알아냈을 겁니다. 일단은 목숨을 보전해야 하니 이동부터 하시지요.”
오광족 여인의 말에 다른 수사들이 분분히 동조했다. 아직도 은조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 * *
한립은 어두운 얼굴로 비령족 영역으로 가고 있었다. 비령족 무리에서 들은 내용 중 다수는 그와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두 가지는 주의를 기울일 만 했다.
첫 번째 소식은 지연의 사대 요왕이 그와 같이 명하의 땅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지연으로 돌아가지 못했는지 비령족 각 세력이 지연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당시 시련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간 백벽과 뇌란이 나란히 천붕족 성주의 신분을 얻어 천붕족이 멸족의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소식이었다.
명하의 땅에는 청원자가 버티고 있었고 부유족과도 관계가 깊었으니 사대요왕이 그 안에 갇혀 돌아오지 않은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그가 다시 명하의 땅에 들어가기가 조금 곤란하다는 것이다.
청원자가 그를 맞이하기로 약속한 곳은 지연 심처였다. 그곳에 이르지 못하면 사대요왕이 준 역성반을 지니고도 명하의 땅으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당시 사대요왕도 오랜 세월 준비 끝에 힘을 합쳐 겨우 명하의 땅에 들어간 것이니 말이다.
두 번째 소식이 중요한 이유는 이번에 지연에 들어가려면 어쩔 수 없이 천붕족의 힘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임시 천붕족 성자가 되어 천붕족 경칩결을 수행했지만 대장로의 강압으로 지연에 들어갔다가 사대요왕의 손에 떨어졌으니 서로간의 은원을 확실히 판가름하기 어려워졌다.
파앗.
한립은 계획을 정리하고 남색 옥간과 하얀 원반을 꺼내 양손에 들었다. 옥간을 이마에 대고 무언가를 기록한 그는 하얀 원반을 들고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그는 결국 어떤 결정을 내리고 두 물건을 회수한 다음 둔광의 속도를 높여 허공을 갈랐다.
다섯 달 후, 천붕족 성성(聖城) 밖에서 눈부신 푸른빛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푸른 빛줄기가 성성을 맴돌며 울부짖는 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다.
성성의 고계 존재들이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몇몇 높다란 건축물에서 수사들이 튀어나와 번득이며 사라졌다.
성성 밖 허공에 나타난 수사들은 푸른빛의 정체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푸른빛은 아주 익숙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 신봉하는 진령 천붕의 기운이었다.
게다가 천붕의 기운이 정순하기가 대장로가 천붕으로 변신했을 때나 가능한 수준이었다.
고계 수사들은 저도 몰래 고개를 들어 금색 날개가 달린 백의 소녀를 쳐다보았다. 천붕족 대장로 ‘금열’이었다.
합체기를 대성한 그녀는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내고 수결을 맺어 눈동자를 금빛으로 물들였다. 모종의 영목 신통을 발동한 그녀의 눈에 푸른빛 속 존재가 또렷하게 보였다.
“저건…….”
금열은 흠칫 놀라 중얼거렸다.
“대장로님, 무엇이 보이십니까?”
곁에 떠있던 합체 초기 붉은 수염 노인이 재빨리 물었다.
“서 장로께서도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금열에 말에 서 장로와 다른 고계 수사들은 더 이상 캐묻기 어려웠다. 그들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푸른빛이 바람처럼 날아들어 둔광을 거두고 거대한 푸른 새의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 같은 깃털과 날카로운 발톱을 지닌 거대 새는 전설속의 진령 곤붕과 꼭 닮아 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눈앞에 나타난 거대 붕새에 서 장로와 다른 장로들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
그들이 입을 열기 전에 거대 새가 날개를 펄럭이며 길게 울부짖었다. 푸른 주술문자가 새의 표면에 흐르고 푸른 붕새는 동산 만하게 커져 금색 눈을 번득였다.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고 뇌전이 번득여 합체 초기의 천붕족 장로 몇이 놀라 뒷걸음질 쳤다. 금열은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지만 두 눈에 기이하게도 희색이 스쳤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천붕 변신술을 익힌 것으로 보아 천붕인일 텐데 본 모습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금열이 거대 새를 향해 차분히 말을 걸었다. 평소와 달리 목이 잠긴 것이 놀란 모양이었다.
“몇 백 년 만에 보는데도 금 수사께서는 여전히 건강해 보이십니다. 축하할 만한 일이군요.”
거대 붕새가 고개를 돌려 금열을 직시했다. 그리 크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붕새의 목소리에 천붕족 장로들의 귀가 웅웅 울렸다.
“이 목소리는……!”
미간을 좁힌 금열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하하, 이제 저를 알아보셨나 봅니다.”
거대 붕새가 허공에서 빙글 돌아 푸른빛 속에서 날개 달린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당신은!”
“마, 말도 안 돼!”
이번에는 서 장로와 또 다른 미부인이 놀라 소리쳤다.
“두 분도 계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푸른 장포 청년, 그러니까 막 천붕 변신술을 푼 한립이 붉은 수염노인과 미부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서 형, 아는 분입니까? 저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
나머지 천붕족 장로들이 그것을 보고 연달아 질문을 쏟아냈다. 서 장로와 미 부인은 질문에 답할 여력도 없이 경악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한립이 성성에 나타났을 때 다른 장로들은 천붕족의 중요 거점에 가있느라 이 이족인 ‘천붕족 성자’를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한립은 지연 요물의 손에 죽었다고 알려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가 다시 나타나 엄청난 천붕 변신술을 선보이고 성계의 수행을 드러냈으니 서 장로와 미부인 입장에서는 충격 받을 만했다.
“정말 한 수사였습니다. 당시 지연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짧은 세월동안 성계에 이른 것을 보니, 지연에서 특별한 기연을 얻으셨나 봅니다.”
금열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아주 평온하게 물었다.
“지연에서 뜻밖의 일을 많이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의 경지에 이른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도리어 사대요왕의 손에 목숨을 잃을 뻔했지요.”
한립이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가요? 어찌 되었든 수사가 성계에 이른 것은 마땅히 축하드릴 일입니다. 이전의 일도 아직 감사를 드리지 못했으니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수사께서 이리 떠들썩하게 나타난 연유도 저희와 인사나 주고받고자 함은 아닐 텐데요.”
“대장로의 말씀대로입니다. 금 수사와 상의할 것이 있어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럼 가시지요.”
금열이 미소를 머금고 그를 안으로 청했다. 다른 장로들은 의혹이 가득했지만 오랜 세월 대장로직을 맡고 있는 금열을 믿었기에 가타부타 의견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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