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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91화 (848/2,000)

1091화. 영계에 드리우는 전운

*

“하하, 봉 선자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한립은 순간 움찔했지만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런데 지금 인족을 오래 떠나계시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마겁 폭발 전 인요족과 인근 종족들이 맹약을 맺었지만 만황세계는 여전히 혼란스러울 텐데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번 원행이 워낙 중요해 반드시 다녀와야만 합니다.”

“한 형께서 그리 말씀하실 때는 이유가 있겠지요. 그저 이제 막 중기에 이르셨으니 경지를 안정시킨 다음 떠나는 것도 늦지 않을 겁니다.”

“봉 선자의 조언 감사드립니다. 안 그래도 2, 3년 후에 출발할 예정이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제자들을 선자께 맡기겠습니다.”

“하하, 그 아이들은 제게도 극진하니 한 형의 부탁이 아니라도 지도할 맛이 납니다.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빙봉이 걱정스런 표정을 지우고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아, 혹시 제가 동부를 비운 사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이것을 들고 곡 가나 천연성의 금월선사를…….”

한립은 계속해서 빙봉에게 알려주어야 할 사항들을 이야기해 나갔다.

* * *

두 달 후, 천연성에서 소식을 들은 기령자가 헐레벌떡 한립의 동부로 돌아왔고, 다시 반년이 지나 백과아가 돌아왔다.

해대소를 포함한 세 사람은 한립의 지도를 받으며 그간 수련하며 모호했던 부분이나 난관을 해결해 나갔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합체 중기에 이렀다는 소식을 외부에 알리지 않도록 했기에 다른 수사들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3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고 동부에서 푸른 장포를 걸친 한립이 걸어 나왔다. 그리고 빙봉과 세 명의 기명제자가 그 뒤를 따랐다.

“봉 선자께서는 멀리 배웅하실 것 없습니다. 너희 셋은 부지런히 수련하고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선자께 가르침을 청하거라.”

한립은 빙봉을 향해 포권을 하고,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 스승님! 열심히 수련하고 있겠습니다.”

“한 형, 조심히 다녀오시지요!”

제자들과 빙봉의 인사에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허공을 갈랐다. 푸른빛이 몇 번 번득이자 한립은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자꾸나! 너희 사부께서 무사히 돌아오셔야 할 텐데……. 너희는 일단 동부를 떠나지 말고 스승님께 전수 받은 바를 완전히 깨우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빙봉은 시선을 거두고 해대소 등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동부로 들어가자 푸른 석문이 굳게 닫혔다.

* * *

푸른 둔광 속 한립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돌연 소매 속에서 금빛이 날아올라 그의 손에 들렸다.

웽!

금빛이 가시고 나타난 것은 흉흉하게 생긴 주먹 크기의 딱정벌레였다. 금빛으로 뒤덮인 영충은 서금충 성체와 똑같이 생겼지만 다채로운 빛깔의 문양이 달랐다.

신중히 영충을 관찰하던 그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파앗.

영충이 두 날개를 펼치고 파닥거리자 표면의 오색 문양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포면의 문양이 꿈틀거리자 영충이 점차 투명하게 변해 나중에는 보일 듯 말 듯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손을 털자 하늘로 날아오른 영충은 번뜩이며 허공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이에 한립은 다시 손끝에서 오색 광채를 번뜩이며 영충을 잡아챘다.

“성체 서금충이 하나둘 변이를 시작하다니 칠재단이 대단하기는 하구나. 비행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신형을 은닉하는 신통까지 생기고 말이야.”

한립은 퍽 흡족한 얼굴이었다. 흉악하게 생긴 서금충은 그가 대량의 비홍어 요단으로 제련한 칠재단을 먹고 다시 변이한 새로운 변이 서금충이었다.

은닉 신통을 지닌 것은 물론이고 포악함이나 껍데기의 강도도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한 번에 만 마리 이상 이런 영충들을 부릴 수 있다면 합체 후기 수사라 해도 바람처럼 달아날 것이다.

‘합체 중기에 이르렀는데도 그렇게 많은 서금충을 부리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구나. 합체 후기에 이르고 연신술 2성을 수련하면 가능해질 것이다’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비장의 무기를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합체 후기에 이르러야 했다. 그는 서금충을 회수하고는 둔광을 일으켜 천연성 방향으로 쾌속으로 날아갔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 위를 거대 매가 이끄는 청동 전차가 유유히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한립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표정이 달라지며 맨 손으로 허공을 가르자 전차 아래에 공간 파동이 일며 거대한 푸른 검기가 모래사막을 베어냈다.

굉음이 울리고 모래가 튀며 사막위로 초대형 애벌레가 나타나 꿈틀거렸다. 애벌레는 온 몸이 산산조각 나 대량의 피를 분출했다. 그러나 전차는 멈추지 않고 그대로 애벌레를 지나쳐 날아갔다.

* * *

이름 모를 바다의 심해 속.

거대 궁전의 밀실 안에 핏빛 고치가 허공에 떠있었다. 고치에서 뻗어나간 핏빛 실들이 빼곡히 밀실 구석구석에 달라붙어 있어 틈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핏빛 고치는 반투명해서 검은 그림자가 안에서 수축했다 팽창하는 것이 보였다. 검은 그림자는 마치 팔딱거리는 심장처럼 아주 규칙적으로 고동쳤다.

* * *

풍원대륙의 어느 대협곡 위.

청아한 외모의 백의 여인과 못생긴 흑포 거한이 수만 명의 이종족에게 둘러싸여 허공에 떠있었다.

협곡 아래에는 사마귀 이종족의 시체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 잘려나간 사지가 사방으로 나뒹굴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반대로 흑포 거한은 상처 자국 하나 없었고 전신에서 매서운 살기를 풍겼는데 두 뺨에 검은 비늘이 돋아 있었고 열손가락이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또한 곁에 선 백의 여인은 거대한 분홍꽃을 밟고 서서 아주 한가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만 명의 이종족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쪽은 반대로 사마귀 이종족들이었다.

“다시 말하겠다. 너희 녹지족(綠肢族)의 성화(聖花)를 내놓으면 우리는 그 즉시 이곳을 떠날 것이다. 거부하겠다면 너희 종족 전부를 죽이고서라도 성화를 가져가야겠지.”

백의 여인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담담히 입을 열었다.

“저희 일족은 성화 덕에 지금까지 연명해 왔습니다. 선배님께서 아무리 대단한 분이라도 성화를 내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짙은 녹색 피부를 지닌 사내가 앞으로 나서 흑포 사내를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는 합체 중기 존재로 녹지족 수사들 중 가장 법력이 높은 수사 중 하나였다.

그 뒤로는 합체기 수사 세 명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흑포 거한과 백의 여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일족의 수장인 대장로가 백의 소녀의 괴이한 기운에 사로잡혀 흑포 거한이 동족들을 살육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녹지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벌써 천 명이나 넘는 사상자가 나왔다.

상대의 강력한 신통과 잔인한 손속에 녹지인 합체기 수사들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게다가 백의 여인은 대승기 이상의 존재였으니, 그들 종족 전체의 명운이 걸린 큰 재난이 도래한 것이다.

“그건 본 좌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성화를 내놓든지 오늘부로 영계에서 너희 일족의 이름이 지워지든지 선택 하거라.”

백의 여인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내용은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대승기 수사께서 작은 종족을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이시다니 부끄럽지도 안으십니까!”

녹지족 대장로가 울분에 차 소리쳤다.

“그런 말로 나를 자극하려 들 것 없다. 너희 종족의 성화는 내게 꼭 필요한 것이라 반드시 가져가야 하니까. 열을 셀 동안 성화를 내놓지 않으면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다.”

미소를 머금은 백의 여인이 수만 녹지인을 상대로 선언했다.

“하나, 둘…….”

백의 여인의 목소리가 유유히 울려 퍼졌다. 아주 듣기 좋은 목소리였는데 주위에 모여 있던 이종족의 귀에는 마귀의 비명처럼 섬뜩하게 들렸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성화를 내어드리겠습니다.”

창백하게 얼굴이 질린 녹지족 대장로가 무력하게 외쳤다.

“현명한 결정이다. 성화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너희 일족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까.”

백의 여인이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후의 일은 간단했다. 대장로의 분부 하에 이족인 몇 명이 협곡 깊은 곳에 있는 녹지족 금지로 향했고, 반 시진 후 그들은 녹색 옥함을 꺼내 백의 여인에게 내어주었다.

그런데 여인이 옥함을 열어보지도 않고 얼굴을 굳혔다. 그 순간 흑포 거한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녹지족 합체기 수사들은 심장이 철렁했다. 상대가 약조를 어기고 자신들을 몰살하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다행히 백의 여인은 흑포 거한에게 손짓하며 거대한 꽃을 조종해 날아가 버렸고, 흑포 거한도 검은 빛줄기로 변해 그곳을 떠났다.

녹지인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화는 잃었지만 약소 종족 전체가 떼죽음 당하는 것은 면했기 때문이다. 대장로는 명을 내려 협곡에 떨어진 동족들의 유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백의 여인과 흑포 거한은 아주 멀리 날아가 있었다.

“이 꽃도 성조께서 찾으시는 물건이 아닙니까?”

“아닐세. 내가 찾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영화였지. 이것도 굉장히 진귀한 천지영물이지만 내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네.”

흑포 거한의 물음에 백의 여인이 평온히 답했다.

“그럼 또 허탕을 친 것이로군요.”

“조바심을 낸다고 찾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닐세. 인근 종족을 거의 뒤져 보았으니 다른 곳으로 가봐야겠네. 풍원대륙이 뇌명대륙보다 크지는 않아도 거주하는 종족들의 수가 많아 일일이 살피려면 시간이 꽤 들 것이야.”

“예, 대인!”

흑포 대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겉으로는 아주 공손히 답했다.

* * *

80년 후, 쪽빛 바다 위로 비령인 무리가 미친 듯이 날갯짓을 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비령인 무리들 중 수행이 가장 높은 자가 원영기였고 대부분은 결단기 수사들이었다.

열댓 명의 수사들은 수행의 고하를 막론하고 수시로 뒤쪽을 힐끔거렸다.

콰르릉!

그때 바다 저 끝에서 은색 선이 나타나 바람 소리를 내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이에 비령인들은 입에서 피를 토해 비술을 펼치거나 각종 보물과 부적을 꺼내 속도를 더욱 높였다.

반 시진 후, 비령인들은 법력이 고갈되어 속도가 느려진데 반해 뒤쪽의 은색 실의 속도는 여전해 거리가 훨씬 좁혀졌다.

이제 육안으로도 은색 실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뜻밖에도 한 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소용돌이가 무서운 속도로 몰려오고 있었다.

무수히 많은 뇌전과 우박을 동시에 품은 소용돌이의 기세는 어마어마했다. 소용돌이에 따라잡히려 하자 비령인 수사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어렸다.

어린 남녀 비령인들은 바다로 훈련을 나왔는데 운이 나쁘게도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재해인 ‘은조(銀潮)’를 맞닥뜨린 것이다. 은조가 지척에 이른 이상 달아날 길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냥 손 놓고 죽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원영기 비령인의 쩌렁쩌렁한 명령에 수사들은 이를 악물고 허공에 멈춰 서서 신속하게 기괴한 진형을 갖추고 저물탁에서 거대한 깃발을 꺼내 휘저었다.

파아앗-

깃발에서 층층이 빛의 물결이 흘러나와 거대한 원형 보호막을 형성했다. 무리를 둘러싼 보호막은 꽤 강력해보였지만 그 안에 숨은 비령인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아무리 비범한 보호막이라도 은조에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찍이 바다로 나섰다가 이 자연재해로 죽어나간 비령인들이 적지 않았고 일단 은조에 휩쓸리면 화신기에 이르지 못한 수사들은 거의 죽는다고 봐야했다.

화신기 수사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마당에 이처럼 많은 수사들을 구하려면 최소한 연허 후기를 대성하거나 합체기에 이른 수사여야 했다. 그런데 망망대해에서 본 족의 합체기 수사를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무리를 이끄는 원영 후기 남녀가 다급히 상의를 했지만 대책을 찾지 못했다. 바다 소용돌이가 부쩍 가까워졌을 때 비령인 중 하나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저길 보시지요! 은조 안에 누군가 있습니다.”

일행의 말에 다른 비령인들이 서둘러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다. 출렁이는 은조 속에 과연 푸른빛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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