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0화. 만독혼원신(万毒混元身)
*
백과아가 초원에 들어서자마자 검은 기운 ‘한립’이 천천히 눈을 떴다.
“사부님을 뵙습니다. 분부하신 대로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소녀가 공손히 금색 인영에게 예를 올리고 보라색 목갑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고생했다. 어디 쓸 만한 물건인지 확인을 해봐야겠구나.”
금색 인영이 인자하게 답하고는 손짓으로 보라색 목갑을 불러들였다. 뚜껑을 열자 목갑 안에 괴이한 비린내가 나는 어두운 녹색 요단이 담겨 있었다.
그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갑을 닫고 백과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내가 필요로 하던 물건이 맞다. 과아, 네가 그동안 일을 잘해 주었다. 이제 요족에서 구해야할 재료도 모두 모았으니 제2원영을 회수하고 진법을 발동해 이곳을 완전히 봉인할 생각이다.
너희의 목숨이 위험하거나 마겁 폭발이 앞당겨지지 않는 한 절대 폐관수련을 방해해서는 안 될 것이야. 너희가 필요한 단약과 영석은 네 빙 사고에게 맡겨두었다. 하하, 내 출관할 때는 너와 네 사형들의 수행이 진일보해 있었으면 좋겠구나!”
“스승님 이번에 폐관에 들어가시면 얼마나 걸릴 지요?”
놀란 백과아가 서둘러 물었다.
“글쎄다. 수십 년 만에 끝날 수도 있겠고 2, 3백 년이 걸릴 수도 있겠지!”
“스승님께서도 수행이 크게 올라 하루빨리 출관하시기를 바라고 있겠습니다.”
백과아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하하하, 네 바람대로 그리 되었으면 좋겠구나!”
큰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금색 인영 쪽이 아니라 오색 보호막에 둘러싸인 백옥 누각 쪽이었다. 두 산봉우리 위에 앉은 인영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결을 맺고 신형이 모호해졌다.
우웅!
다음 순간 두 동산이 진동하더니 각각의 동산 아래에서 거대한 빛의 진법이 나타나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푸른 초원 전체가 오색 보호막으로 뒤덮이고 공간이 왜곡되어 암담하게 변했다.
미리 초원을 벗어난 백과아는 오색 운해(雲海)로 뒤덮인 후원을 바라보고 할 말을 잃었다.
오색 운해 속, 한립은 누각 1층에 자리를 잡고 허공에 떠있는 거대한 금색 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솥 아래에는 은색 화염이 활활 타올라 기이한 냄새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기이한 향기는 맵고 독한 기운이 풍기면서도 중독성이 있었다. 한립이 손바닥을 뒤집어 백과아가 가져온 보라색 목갑을 꺼내들었다.
“이 한담마주(寒潭魔蛛) 요단의 독이면 만독혼원신(万毒混元身)의 마지막 부분을 수련할 수 있겠지. 경칩결의 변신술과 동시에 사용하면 금강불괴(金剛不壞) 못지않을 것이야. 전설 속의 진령과 비슷한 육체의 강도를 낼 수 있을 지도.”
그가 약간 흥분한 기색을 드러내고는 중얼거렸다. 목갑이 열리고 안에서 요단들이 튀어나가 솥으로 날아들었다.
화르륵!
요단들은 솥 안으로 들어가자 크기가 줄어들어 나중에는 액체처럼 변했고 한립은 은색 불길을 키워 솥을 아예 감싸버렸다.
솥 안의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백여 가지의 극독을 넣어 끓인 액체는 그가 흑역교역회에서 얻은 연체술과 관련이 있었다.
연신술 제2성을 수련하려면 우선 육체의 강도를 끌어올려야 했는데 제천라 자체는 그에게 계륵이었지만 덤으로 따라온 연체술은 생각보다 도움이 되었다.
만보대회가 끝나고 인요족 구역을 유람하며 연구를 해본 결과 ‘만독혼원신’이란 이름의 이종족 연체술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이한 비술이었다.
총 7성으로 이루어진 비술은 각 성을 수련할 때마다 육체가 강화되었고, 마지막 7성을 대성하면 고계 요족에 맞먹는 육체를 지님과 동시에 만독불침(万毒不侵)을 이룰 수 있었다.
유일하게 성가신 점은 육체를 직접 특수 제작한 독액에 담가야한다는 것과 더 높은 단계를 수련할 때마다 독액의 독성도 높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온전히 외부의 물질로 육체의 강도를 키우는 이런 비술은 극히 위험했다. 법결에 따르면 만독혼원신을 수련하는 자 중 열에 아홉은 독이 발작해 죽거나 몸이 견디지 못해 붕괴한다고 했다.
그것도 인족보다 원래 몸이 튼튼한 이종족 기준이었으니 평범한 인족이 이것을 익히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단점들이 한립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각종 영약과 영과를 복용하고 범성진마공까지 익혀 이미 인족 중에서는 따를 자가 거의 없는 단단함 몸을 보유하고 있었고 독에 대해서도 상당한 내성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채류앵에게서 얻은 정월액도 지니고 있었다.
일정 간격을 두고 피부에 정월액을 발라 흡수시켜온 덕에 온몸이 더욱 견고해졌고 만독혼원신이 발작할 위험도 크게 줄었다.
그리고 그간 한잔씩 홍라선주를 마셔온 덕에 확실히 체질도 개선되었다. 물론 마실 때마다 눈에 띄는 효과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주 미세하게 지속적으로 몸이 좋아졌다.
장기간 복용하면 분명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양족 유람을 마치고 동부로 돌아와 각종 기이한 독을 모으기 시작했다.
만독혼원신의 전반부는 평범한 극독으로도 효과가 있었지만 마지막 세 단계는 인족 구역에서 적당한 독을 찾기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진소인의 힘을 빌려 요족 쪽에서 구할 수 없을까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백 년이 넘는 시간동안 만독혼원신을 수련해 6성에 이른 그는 이제 7성을 수련하는데 필요한 극독 재료를 손에 넣었다.
한담마주의 요단은 요족들도 구하기 매우 어려운 물건이라 진소인도 물건을 확보하는데 수십 년이 걸렸다. 물론 그동안 범성진마공과 다른 신통들도 쉬지 않고 수련을 계속해왔다.
신비한 병의 액체가 식독초에도 효과를 보여 광한계에서 가져온 다른 영약 종자들을 대량 생산해 합체기 수행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단약을 제련하기도 했다.
‘단약들의 제련법과 보조 재료를 구하는 것도 꽤 고생스러웠지.’
그 중 어느 하나라도 바깥에 내놓으면 합체기 노괴들도 천금을 주고서라도 구하려 들 것이다. 그만큼 합체기 수사의 법력을 높여주는 단약은 몇 되지 않았고 구하기도 어려웠다.
다른 합체기 노괴들은 그런 단약을 고비를 넘길 때나 사용했겠지만 한립은 그것을 대량 생산해 한 움큼씩 집어 삼키며 수련을 했다. 다른 수사들이 알았으면 부러워 피를 토했을 것이다.
2백 년 동안 법력이 급증한 그는 만독혼원신을 대성하고 백년 만 더 폐관수련하면 합체 중기 고비를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다량의 단약과 강력한 육신과 의식을 지녔기에 중기 고비를 넘을 자신이 있었다.
파앗.
한립은 다시 한 번 계획을 점검하고 가부좌를 튼 채로 서서히 떠올라 솥 위로 향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솥 안으로 들어가 오색 독액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담갔다.
솥 아래에서 은색 화염이 맑게 울며 커다란 불새로 변해 날아올라 화염을 분출했다. 찰나의 순간 솥 안의 온도가 더욱 높아졌다.
오색 독안개가 뿌옇게 일어 밀실을 가득 메웠고 솥 안에서는 뼈가 다시 맞춰지고 근육이 파열되는 소리만이 오래도록 들려왔다.
* * *
한립이 폐관수련을 시작한 이래 수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후원의 봉인은 단 한 번도 풀리지 않았다.
백과아와 다른 제자들이 가끔 들려 금제가 멀쩡한지 확인하는 때를 제외하면 동부 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기령자는 몇 년 후 원영을 응결해 천연성의 고계 병사가 되었고, 수십 년 후에는 백과아도 결단 후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원영을 응결하기 위해 한립이 폐관수련 중인 운무 앞에 찾아와 인사를 올리고 홀로 인족 경내를 돌며 경험을 쌓기 위해 떠났다.
그녀가 떠난 후에는 결단 중기에 이른 해대소가 자주 동부를 찾아왔다. 그렇게 백여 년이 흐른 어느 날, 해대소가 투명한 통나무배를 타고 한립의 동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수십 리 밖에서 느닷없이 오색 돌풍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안색이 달라지며 발밑의 법기를 멈추고 아연한 기색으로 저 멀리 하늘을 응시했다.
거대한 오색 돌풍에는 희미하게 은색 뇌전들이 번뜩였는데 돌풍이 솟아 오른 곳은 바로 한립의 동부가 있는 곳이었다.
“혹시 스승님께서…….”
멀리서 천지원기가 요동치는 것을 감지한 그가 반색을 하며 중얼거렸다. 천기현상은 거의 반나절 동안 지속되다 사라졌고 하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것을 확인한 해대소는 서둘러 통나무배를 조종해 남색 빛줄기로 뻗어나갔다.
“스승님! 정말 스승님께서 출관하셨습니까? 조금 전 천기현상도 스승님께서 일으키신 거겠지요. 정말 감축 드립니다.”
해대소는 바삐 대청 안으로 들어가며 앉아 있는 사내와 여인을 발견했다. 그는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급히 예를 올렸다. 사내는 막 출관한 한립이고 곁의 여인은 동부에서 오랜 세월 수련에 매진해온 빙봉이었다.
“월천이구나! 조금 전 천기현상은 내가 합체 중기에 이르면서 일어난 것이 맞다. 빙 사고가 나서 주셔서 동부의 금제로 천지원기의 흐름을 억눌러 그 정도였지 안 그랬으면 남들의 이목을 끌 뻔 했구나.”
한립이 제자를 향해 잔잔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 형께서 미리 펼쳐 놓으신 진법의 힘으로 천지원기가 요동치는 것을 겨우 저지한 것뿐인 걸요. 겨우 화신기 수행을 지닌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빙봉이 반짝이는 눈을 깜빡였다.
“스승님께서 정말 중기 수사가 되셨습니다. 너무 잘 되었습니다. 이제 후기 수사들을 만나도 두려울 것이 없으시겠어요.”
해대소는 기분이 좋은지 입이 찢어질 듯 웃고 있었다.
“헛소리 말거라! 후기 수사들의 신통이 얼마나 대단한데 나와 비교하느냐. 그래도 네가 때를 잘 맞추어 돌아왔구나. 나는 곧 만황세계에 다녀올 계획이다. 돌아오려면 1, 2백년은 걸릴 테지. 그 전에 너희 사형매(師兄妹)들을 만나 이후의 수련에 대해 지도해주려 한다.
마겁이 도래하기 전에 최대한 경지를 높여야 할 테니까 말이야. 기령자는 원영을 응결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과아는 결단 후기라니 백년 내로 원영에 이를 수 있을 텐데, 네가 아직 결단 중기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구나.”
한립이 진지한 얼굴로 해대소를 훑었다.
“스승님 저는 법체쌍수이지 않습니까. 수련 진도가 약간 느린 것도 당연하지요. 저도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수련하고 있습니다.”
스승의 타박에 화들짝 놀란 해대소가 중얼거렸다.
“내가 어찌 법체쌍수의 어려움을 모르겠느냐. 허나 마겁이 폭발하면 고마들이 네 사정을 봐 줄 성 싶더냐? 강자만이 마겁의 위기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다.”
“예, 스승님. 앞으로 더더욱 수련에 매진해 수행을 높이겠습니다.”
한립이 슬쩍 눈에 힘을 주자 해대소는 더는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래. 만리부로 기령자와 과아도 조속히 돌아오라 이를 테니 너는 일단 천연성으로 돌아가지 말고 이곳에 머물며 내게 지도를 받거라. 당장은 네 빙 사고와 이야기를 나눠야겠으니 물러나 있고.”
“존명!”
해대소가 씩씩하게 대답하고 대청을 나섰다.
“봉 선자, 법력을 회복하고 수행이 진일보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한립은 제자가 나가자 고개를 돌려 빙봉을 향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모두 한 형 덕분이지요! 충분한 단약의 보조가 없었다면 이렇게 빨리 법력을 회복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것보다 한 형께서 겨우 2, 3백 년 만에 합체 중기에 이른 것이 더욱 놀라운 일이지요. 이런 속도라면 마겁 전에 후기에 이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습니다.”
빙봉이 싱긋 미소 지었다.
“하하, 역시 영민하십니다. 확실히 마겁 전에 합체 후기에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때가 되면 선자의 천봉원음의 힘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저도 그때까지 화신 후기를 대성해 원음지기의 효과를 높여 놓을 테니까요! 그런데 경전을 살펴보니 합체 후기에 이르는 어려움이 이전 고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한 형께서는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하, 인족에 합체기 수사가 백 명이 넘지만 후기에 이른 자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힙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확신을 갖고 있다 단연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지요.”
“다른 수사가 그렇게 말했다면 믿었을 테지만 한 형의 말은 못 믿겠는 걸요? 후기에 도전할 계획이라 말씀하시는 것부터 이미 3, 4할은 성공할 거라 예상한다는 뜻이니까요.”
빙봉이 능청스럽게 말하며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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