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9화. 백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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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겁에 대한 소식이 중, 저계 수사들과 특수한 신분의 범인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그러나 저계 수사나 범인들은 채 2, 3백 년을 살지 못했기에 마겁이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큰 소란이 일지는 않았다.
큰 세력을 갖춘 집단만이 마겁에 대비하기 시작했는데 작은 성에 거주하는 범인들은 지난 2백 년간 큰 성이나 거대 세력으로 이주 당했다. 평범한 범인들은 마겁에 대해 알지 못했고 고위층 인물들은 이주 이유를 대충 얼버무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족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범인들 앞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수사들이 무리를 지어 거대성에 나타났고 대놓고 각종 방어용 진법을 설치하거나 연체사들을 조직해 전문적으로 마족을 상대하기 위한 훈련을 시켰던 것이다.
지금 훈련을 받는 연체사들은 마겁 폭발 전에 수명을 다하겠지만 지금부터 훈련을 시작해 차차 규모를 키워가야 마겁에서 한몫할 수 있을 것이다.
영계의 범인들은 그 수가 어마어마해서 잘만 훈련시키면 연체사들도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이 될 것이다. 최상급 연체사의 경우 수사처럼 귀했지만 그래도 마겁에서 지역을 방어할 훌륭한 역량을 지녔다.
역대 마겁에서도 연체사들이 중저계 고마들을 상대하는데 큰 도움이 되어 왔다.
거대 세력들이 창고에 쌓아두던 ‘영구(靈具)’들이 쏟아져 나왔고 연기사들은 위력적인 영구를 대량생산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중저계 법기와 중저계 수사들을 위한 단약들도 제련해야 했기에 각 세력이 비축해 둔 연기 재료가 급속히 줄어들어갔다.
시장의 재료 가격은 폭등했고 이전과 비교해 몇 배나 비싸진 것도 있었다. 평소 아주 흔하게 구할 수 있던 물건도 구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인족의 삼경뿐 아니라 요족의 칠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100년 동안 서서히 진행되어 엄청난 혼란을 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범인과 수사들의 일상생활에 조금씩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다른 곳보다 배는 높은 천연성 성벽 위를 하얀 빛줄기가 지나갔다. 희미한 하얀 빛줄기 속에는 호리호리한 인영이 들어있었고 몇 번 번득이다 성벽 위 병사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저게 누굽니까! 간도 크지. 결단기 수사가 감히 성문도 지나지 않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냥 성벽을 넘어가다니요!”
흑갑 거한이 움찔해 노호성을 터트렸다. 당장이라도 검은 빛줄기로 변해 추격할 기세였다.
“잠깐만 기다리시게! 백 선자는 신분 확인 없이 바로 천연성에 들어갈 수 있는 인물일세.”
옆에 있던 다른 병사가 민첩하게 그를 붙들었다.
“예? 겨우 결단기 수사가 그런 특권을 누린다고요?”
“백 선자의 사부가 합체기 수사인데 수백 년 만에 화신기에서 합체기에 이르고, 합체 초기의 수행으로 후기의 실력을 발휘한다는 바로 그분일세. 그녀 또한 천부적인 자질로 겨우 백여 년 만에 축기기에서 결단기에 이르렀고! 아우님은 천연성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못해 모르겠지만 말이야.”
“수백 년 만에 화신기에서 합체기에 이른 선배님이라면 예전에 농 가 노조와도 엇비슷하게 겨루었다는 한 선배님이 아니십니까!”
“호 형제도 한 선배님의 얘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긴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셔서 그렇지. 그 분을 모르는 수사는 거의 없겠지요. 심지어 장로회에서도 그 분의 기명 제자를 검문 없이 통과시키라는 명이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또 다른 병사가 끼어들어 가볍게 웃었다.
“방금 지나간 여인이 한 선배님의 기명 제자였군요. 그런데 백 선자가 천연성에 빈번하게 드나드나 봅니다.”
“그리 자주는 아니고 1, 2년에 한 번 정도일세. 어떨 때는 7, 8년에 한번 다녀갈 때도 있고. 듣자니 올 때마다 시장에 들려 재료들을 사간다고 하더군. 그럴 만도 하지. 요즘 어딜 가나 재료가 부족해서 그나마 천연성이나 되어야 물건을 구할 수 있으니까.”
처음 거한을 말렸던 병사가 대답해주었다.
“그렇군요! 한 선배님의 기명제자가 천연성 인근에 머물면 한 선배님께서도 주변에 계실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백 선자에게 한 선배님의 행방을 캐물을 만큼 담이 크진 못하니까요. 이제 다들 다른 이야기나 하시죠! 합체기 선배님에 대해서는 적게 떠들수록 좋습니다. 그러지 말고 지난번 시장에서 발견했다는 자금철(紫金鐵) 이야기나 해주시지요, 호 형.”
또 다른 병사가 허허 웃음을 흘리고 분별 있게 화제를 돌렸다.
“아, 그 일이라면 시장에서 우연히 들어간 작은 상점에서…….”
병사들이 화제를 돌려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시야에서 사라졌던 하얀 둔광이 천연성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었다.
* * *
몇 시진 후, 하얀 둔광은 인요족 거래장이 있는 대전 앞에 내려섰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은색 비단 장포 소녀는 열 예닐곱 살쯤 되어보였고 동그란 얼굴에 새까만 눈이 퍽 귀엽고 예뻤다.
그녀는 대전 앞 병사에게 영석을 지불하고는 신분을 감춰주는 법기를 지니고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 안에는 이미 백 명이 넘는 수사들이 거래하고 있었다. 새까만 눈을 반짝인 소녀는 대청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요족 수사가 조용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있었다.
은색 장포 소녀가 다가오자 검은 기운 속에서 새하얀 손이 나와 반절짜리 옥패를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소녀도 즉시 옥패의 나머지 절반을 꺼내 들었다.
“수사께서는…….”
조금 긴장을 풀기는 했지만 소녀는 상대를 떠보는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하하, 또 네가 왔구나. 사부께서는 폐관수련 중이시더냐?”
은색 장포 소녀가 말을 맺기도 전에 검은 기운 속에서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선배님! 어찌 직접 나오셨습니까? 스승님께서는 아직 출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번 네 사부가 부탁한 재료가 워낙 진귀해서 내가 직접 갖고 온 것이다. 그나저나 대단도 하시지. 그 짧은 시간 안에 너를 결단 중기 수사로 키워내셨구나!”
“전부 스승님이 아낌없이 단약을 내려주신 덕분입니다.”
그녀는 한립의 기명제자 백과아로 2백 년 만에 병약한 어린 아이에서 결단 중기의 여수사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검은 기운 속 여인은 한립과 대량의 거래를 약속한 천호족 진소인이었다.
백과아가 그간 천연성을 드나든 것은 한립과 진소인의 거래를 돕기 위해서였다.
“한 선배님이 무슨 방법을 쓰신 것인지 놀랍구나. 이대로 가면 화신기와 연허기에 이르는 것도 어렵지 않겠어. 자, 이제 약조대로 거래해볼까?”
“예, 선배님!”
진소인이 소매 속에서 보라색 목갑을 꺼내자 백아과가 생긋 웃고는 남색 고리를 꺼내 바쳤다.
* * *
한 시진 후, 대전을 나선 백과아는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날아오른 다음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두 달 후, 영기가 농염한 어느 산맥에 그녀의 둔광이 나타나 거대한 산봉우리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하하! 사매, 빨리도 다녀왔네. 일이 잘 풀렸나봐?”
백과아가 산중턱의 푸른 석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문 안쪽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노란 장포를 걸친 유생이 걸어 나왔다.
수려한 외모를 지닌 사내는 한립이 2백 년 전 천연성으로 쫓아 보낸 해대소였다. 해대소는 그사이 결단기 수사가 되어 있었다.
“사형! 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해대소를 본 백과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허허, 이 몸이야 며칠 전 천연성에서 고된 임무를 하나 마치고 돌아왔지. 임무를 수행하다 죽을 뻔했다고. 겨우 반년 휴식을 얻어 스승님을 뵈러 온 것이야.”
“그럼 스승님을 뵈었어요?”
“스승님은 못 뵙고 제2원영에게서 단약을 받아왔다. 2년 후에는 나도 결단 중기를 노려봐야 하니까. 말하다 보니 부끄럽구만. 사형이 되어서 사매에 비해서도 법력이 못 미치고 말이야.”
거들먹거리던 해대소가 반쯤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하하, 사형은 법체쌍수를 하는 중이라 본 실력은 지금도 저보다 훨씬 높잖아요! 게다가 스승님께서도 법체쌍수의 몸이시니 해 사형만이 진정으로 스승님의 의발을 전승할 수 있죠. 제가 사형을 부러워해야 할 일이라고요. 또 법력으로만 따지면 제가 기령자 사형에게 비할 수나 있나요? 2백 년 만에 결단기 최고봉에 이르러 원영 응결을 준비 중이잖아요.”
백과아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법력이 높으면 뭘 하나. 천연성에서는 누구에게도 나와 스승님의 관계를 알릴 수 없고 평범한 연체사 노릇을 해야 하는걸! 기령자 사제도 마찬가지라 스승님을 뵈려면 남몰래 조용히 다녀야 한다고. 사매처럼 제자의 신분으로 위풍당당하게 천연성을 오가지 못하고 말이야.”
“저는 스승님을 도와 천연성에 자주 오가야 하니까 그런 거죠. 말이 나와서 말인데, 기령자 사형이 계승한 공법과 수련 자질은 스승님도 칭찬할 정도였었죠. 앞으로 수도의 길에서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눈을 깜빡인 백과아가 웃으며 말했다.
“분명 그렇겠지.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100년 전 인족으로 돌아와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신 뒤 줄곧 폐관수련 중이시네. 평소 우리의 수련도 제2원영과 빙 사고께 맡기시고……. 스승님의 수련은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어!”
스승님을 언급하며 해대소가 근심을 드러냈다.
“걱정 마세요. 스승님께서는 100년 정도 인요족에서 어떤 분의 소식을 찾아다니다 합체 중기에 이르기 위해 잠시 돌아온 것이니까요. 제 짐작대로라면 중기에 이르지 않고는 출관하시지 않으실 것 같아요.”
“합체 중기? 스승님의 신통이 대단한 건 알지만 최소 천 년은 수련에 매진해야 성공하실 수 있을 텐데. 설마 천년 동안 폐관수련을 하시기라도 한단 말이야?”
“다른 합체기 선배님들이 어떻게 수련하시는지 모르지만 우리 스승님은 이미 합체 후기에 맞먹는 수사시잖아요. 분명 빠르게 수행을 높일 수 있는 비법이 있으시겠죠. 천년까지는 아니지만 마겁이 폭발하기 전에는 출관하실 거예요.”
“그건 그렇구나. 스승님도 마겁 때문에 하루빨리 중기로 진입하려 마음먹으신 것일 테고.”
백과아의 의견에 해대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백과아도 한립이 합체 중기에 이를 수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럴만한 것이 한립은 공법과 신통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련이 막혔을 때마다 말 몇 마디나 진귀한 단약 몇 알로 바로 해결해주고는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그들은 한립에 대한 신뢰도가 매우 높아졌고 거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존재로 인식했다.
해대소는 백과아와 길게 떠들지 않고 곧 남색 빛줄기로 날아올라 동부를 떠났다. 그리고 백과아는 푸른 석문 뒤의 통로를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삼엄한 금제를 겹겹이 지나가자 어느 순간 눈앞이 밝아졌고 널따란 풀밭이 펼쳐졌다. 허공에 하얀 구름이 떠다니고 꽃들이 만개한 곳으로 영기가 무척 농염했다.
초원의 중심에 좌우로 작은 동산이 하나씩 솟아 있었는데 하나는 새까맣고 하나는 청록색이었다. 두 산 중심에 위치한 백옥 누각은 총 3층으로 오색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좌우의 동산에는 두 명의 한립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한 명은 큰 키에 녹색 피부를 가졌고 몸에서 보라색 기운을 뿜어냈고, 다른 한 명은 금빛 찬란했지만 검은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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