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8화. 마계행(魔界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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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을 숨기고 마계에 진입하면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높아지겠네요. 하지만 오래 머물다 보면 언제 고 들키고 말 겁니다. 마계에 다녀 오는데는 얼마나 걸릴 거라 보십니까?"
엽 수사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건 정말 답해드리기 곤란한 질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세령지와 정령련은 마계의 중심에 위치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도 오고가는데 수십 년은 걸릴 것입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더 걸릴 수도 있고요. 마겁이 폭발하자마자 움직 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최대한 서둘러야겠지요."
천추 성녀가 난감한 얼굴로 답했다.
"수십 년이라면 너무 긴 감이 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돌아가 천천히 고민해보고 답을 드려야 할것 같군요."
엽 수사가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물론 돌아가셔서 생각해보셔도 됩니다. 허나 선자의 천봉혈통이 지닌 신통 중 공간을 찢는 신통은 마계에서 큰 도움이 될 테니 부디 좋은 선택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돌아가 심사숙고해 보겠습니다."
농가 노조의 의미심장한 말에 엽 수사가 간단히 답했다.
"그런 보물이 마계에 있다니 산수인 저야 마계에 다녀오는 것이 큰부담은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몇 백 년은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있고 꽤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라 시간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침음하던 한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그때 가서 답을 주셔도 됩니다. 시간을 낼 수 없다면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저 미리 당부 하건데 노부와 성녀가 마계에 다녀오기 전에 이 일에 대해서는 함구해주셔야 합니다.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소수 이니 정보가 새어나가면 저도 가만 있지 않을 테니까요. 세령지를 찾으러 마계로 갔는데 마족이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일이 얼마나 험난해지겠습니까."
엽 수사와 달리 농가 노조는 한립의 말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농가 노조의 경고에 한립은 개의치 않고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엽 수사는 기분 나쁘다는 듯 눈썹을 끌어올렸다.
"농 형, 우리를 뭘로 보는 것입니까? 공연히 남에게 해를 끼쳐서 득이 될 것도 없는데요."
"허허, 저도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찌 되었든 함께 위험을 감수할 결심이 서시면 마겁이 도래 하기 전에 노부에게 답을 주셔야 할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분들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다른 수사 분들을 찾아봐야 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엽 수사가 대답했고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상의를 마친 그들은 편전에 남아 있지 않고 분분히 자리를 떠났다. 휘 수사도 세 수사를 배웅하러 편전을 떠나자 대전 안에는 천추 성녀와 농가 노조만 남았다.
줄곧 미소를 띠고 있던 황포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고 농가 노조는 수사들이 나간 방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엽가 수사가 꼭 필요하다는 것인지요. 공간을 찢는 신통이라면 비슷한 능력을 지닌 성령급 수사를 포섭해 두었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성녀와는 1, 2년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데 어찌 믿지 못하겠습니까. 그저 이번 일은 관련 신통을 지닌 수사가 많을수록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엽 가의 비술과 신통은 우리 농가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으니 그녀를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천추 성녀의 물음에 농가 노조가 무표정하게 답했다.
"그럼 엽 선자는 그렇다고 치고, 한 수사는 겨우 합체 초기이던데 데려갈 필요가 있을까요? 인족에서 중기 수사를 찾기 어려우면 돌아가 영족에서 실력이 뛰어난 수사를 구해볼 수도 있습니다."
"허허,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까. 마계에 들어갈 수사들의 수는 서로 똑같이 맞추기로 약속한 것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또한 한가 녀석이 합체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을 사실이나 직접 겨뤄본 결과 실력이 휘 장로 이 상이었습니다.
저나 성녀 같은 후기 수사와 맞붙어도 쉽게 지진 않을 거란 소립니다. 거기다 그 자가 응결한 법상금 신이 고마족의 최정상 공법과 비슷 했으니 응당 진마기를 다룰 줄도 알 테고요. 그런 자를 데려간다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인물을 찾아봐야겠지만요."
"기령족 성녀로서 어찌 약조한 바를 쉽게 어기겠습니까. 농 형께서 충분히 고려하여 결정한 일이라니 더는 가타부타하지 않겠습니다. 영 족을 대표해 귀족과 협약을 마쳤으니 내일 바로 영족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수사께서는 농 가와 저희 기령족 사이의 합작에 신경써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합작은 농 가와 기령족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니 저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고 돌아가셔도 됩니다. 이제 마겁이 폭발한 후에나 다시 만날 수 있겠군요."
농가 노조가 무뚝뚝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같은 시각, 한립은 거처로 돌아와 침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대승기에 이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는 인족 전체에 대승기 수사가 막간리 한 명 뿐인 것만 봐도 알수 있었다.
여러가지 기연을 얻은 한립도 대승기에 이를 가능성이 그리 높다고 자신하지 못했고, 사실 세령지와 정령련이 무척 탐이 났다. 남모를 고충이 없다면 농가 노조의 제안을 지체 없이 수락했을 것이다.
그 고충이란 바로 원살 성조와의 원한이었다. 고마 성조와 마찰을 빚은 그는 마계를 멀리 피해 다녀도 부족한데 어찌 스스로 그 안에 뛰어들 수 있겠는가!
그의 행적이 노출되는 날에는 원살 성조가 직접 그들을 찾아 나설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제안을 거절하기에는 세령지와 정령련이 너무 탐이 났다.
대승기에 오를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데 이번 일을 거절해 영영 대승기에 이르지 못하면 후회막심할 것이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한립은 고민 중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겁이 폭발하기 전 합체 후기 최고봉에 이를 수만 있다면 강력한 신통으로 원살 성조와 겨루어도 목숨을 보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른 수사들은 합체 초기에서 수 백 년 만에 합체 후기에 이르는 일이 불가능하겠으나 연신술과 수많은 영약을 지닌 그는 사정이 달랐다. 게다가 그는 청원자와의 거래도 앞두고 있었다.
필요한 재료를 모두 구했으니 당시 심연의 사대요왕도 오매불망하던 명하신유를 얻어 합체 후기에 이를 확률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농가 노조 등이 움직이기 전에 합체 후기에만 이를 수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마계를 다녀올 생각도 있다.
한립은 마음을 정하고 소매 속에서 열댓 개의 깃발을 뿜어 방안에 무형의 금제를 펼쳤다. 그는 눈을 감고 침상에서 좌선을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 인사를 하러 온 효풍 선자와 소 장로는 누각이 텅 빈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이 쓴웃음을 짓고 있을 때 한립과 소녀는 푸른 비차를 타고 허공을 질주하고 있었다.
그는 마차 중간에 앉아 낡은 서책을 읽고 있었고, 백과아는 마차 앞에 서서 진법 원반을 들고 비차를 조종했다.
몇 년 동안 대량의 영약을 복용하며 수련한 소녀는 이미 축기기에 이르러 있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 했지만 법기의 보조를 받아 비차를 조종하기에는 충분했다.
반 시진정도 날아갔을 때 백과아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스승님, 이쪽은 천연성 방향이 아닌데 이제 어디로 가는 거예요? 사형들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닌가요."
책에 심취해 있는 한립을 보고 소녀가 입을 비죽였다.
몇 년 동안 그를 따라다니며 스승이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대충 알게 되었고, 그간한립이 몇 번이나 한독을 제거해주어 고통이 많이 줄어 훨씬 편하게 그를 대했다.
"녀석, 벌써 사형들이 보고 싶은 게로구나! 과아 네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도사 사형인지 아니면 해 사형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무슨 소리세요, 스승님! 사형들이랑 모이면 재밌잖아요.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요."
백과아가 한립의 놀림에 얼굴이 붉어져 조잘조잘 변명을 했다. 아직 나이는 어렸지만 영계의 수사들은 비교적 조숙한 편이라 남녀 간의 일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하, 스승이 농을 한 게다. 지난 번에 천연성에 갔을 때 공법과 단 약을 충분히 남겨두고 왔으니 수십 년 정도 돌아가지 않아도 네 사형들의 수련에 지장은 없을 게야. 네 빙봉사고(師姑)가 동부에 남아 수련상의 어려움도 지도해줄 테니 걱정할 것도 없겠지.
너는 한독 때문에 한동안은 내 곁을 떠나지 못하고 아직 수행이 낮아 단약의 힘으로 충분히 법력을 늘릴 수 있으니 시간이 난 김에 삼황칠요지를 두루두루 둘러보자꾸나."
"빙봉사고의 실력이면 충분히 사형들을 지도해 주실 수 있지요. 그런데 스승님은 어째서 곳곳을 돌아 다니시는 거예요? 몇 년 전에도 저를 데리고 현천경을 돌아보셨잖아요. 따로 찾는 물건이라도 있으세요?"
주저하던 백과아가 그간 궁금해하던 바를 물었다.
"물건이 아니라 사람을 찾고 있다. 그 사람이 비승해서 영계에 와있다면 언젠가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한립이 탄식하며 쓸쓸히 중얼거렸다.
"찾으시는 분이 스승님의 가족인가 봐요."
"그걸 어찌 알았더냐?"
"할머니께서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하실 때도 스승님과 비슷한 표정을 하셨거든요. 설마 사모님을 찾고 계신 거예요?"
백과아가 멋쩍게 배시시 웃고는 관심을 보였다.
"내 일에 대해서는 궁금해 말거라.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은 사람을 찾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경험을 쌓으려는 것도 있다. 합체기에 이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수행과 마음을 닦을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제 갈 곳은 천령경인데 영황이 죽고 난 후 꽤 어수선해졌다고 한다."
"천령경이면 몇 년 후에 영황을 뽑는 대회가 열리는 곳이잖아요. 스승님이 나가셔서 영황 자리를 차지하세요! 스승님의 실력이면 충분 할 거예요."
한립의 담담한 설명에 백과아가 빙그레 웃었다.
"하하, 내 수행에 무슨 영황 자리를 바라겠느냐. 나는 경전을 좀 더 봐야겠으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비 차나 잘 조종하거라."
한립은 말을 마치고 서책에 집중 했다. 이에 백과아는 아직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감히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법기에 영력을 주입해 비차의 속도를 높였다.
비차가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하늘 저 끝으로 사라졌다. 그 후 1, 20 년간 한립이 삼황 곳곳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곤 했다. 그리고 또 20년이 지나서는 요족의 땅에서 그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러나 양족은 별로 교류가 없었기에 한립의 거취에 대해 주의 깊게 살피던 존재들도 그 소식의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다시 수십 년이 지나 그에 대한 소식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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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만보대회로부터 2백년이 흘렀다. 그간 인요족에는 굵직굵직한 일들이 있었다.
인족의 영황 자리는 100년 전 돌연 등장한 정체모를 여수사가 차지 했다. 그녀는 합체 중기의 수행으로 비무에서 연달아 11명이나 꺾었는데 대결 상대중에 합체 후기 노괴가 세 명이나 되었다.
그 일로 인요양족이 한동안 떠들썩했다. 그 덕에 새로운 영황은 신속하게 이전 영황의 세력을 규합했고 혼란에 빠졌던 천령경도 질서를 되찾았다.
또 다른 사건은 인요족의 성지인 '성도'에서 돌연 주변의 적대 종족 과 휴전을 하고 천년맹약(千年盟 約)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천년 동안은 서로 침략하지 않고 반드시 동맹으로 공격과 방어를 함께 하겠다는 조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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