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087화 (844/2,000)
  • 1087화. 세령지와 정령련

    *

    "영족(靈族)의 성녀 아닙니까! 농 수사, 무슨 일을 꾸미는 겝니까?"

    임 수사가 소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포(黃砲) 소녀는 만보 대회에서 무대에 나섰던 기령족 성녀였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천추 성녀는 중대한 일을 상의하기 위해 이곳에 자리한 것이니까요."

    농가 노조가 설명했지만 편전에 모인 수사들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저 미리 알고 있던 휘 수사만이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들 저를 좀 더 편하게 대해주셔도 됩니다. 기령족이기는 하지만 인족의 '삼천 진인'께서 지니고 있던 보물이 제 본 모습이니까요! 진 인이 명을 다하시고 요행이 의식을 갖게 되어 기령족의 일원이 되었답니다."

    "삼천 진인이라면 상고시대에 천연성을 설립하신 대승기 존재가 아닙니까!"

    엽 수사가 움찔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분이 맞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영족의 연맹 사자로 제가 이곳에 올 수 있있겠습니까."

    "우리 인족이 언제부터 귀족과 연맹을 맺었단 말입니까? 우리는 그런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빙긋 웃는 천추 성녀를 향해 임수사가 의문을 제기했다.

    "이번 연맹은 인족 성도와 천원성황, 현무패왕 및 몇몇 대승기 수사 분들의 주관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사정이 있어 공표는 1년 후에나 하겠지만요. 그때가 되면 모두 사실 이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성녀께서 만보대회에 얼굴을 비춰 영족과 인족의 연맹이 조만간 이뤄질 거라 예상하긴 했습니다. 다만 농 형, 성녀를 만령곡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은 너무 경솔한 행동이 아닙니까? 이곳은 진령세가의 대전을 행하는 곳입니다."

    엽 수사가 여전히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엽 선자, 그런 우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추 수사는 진령대 전이 끝나고 만령곡으로 진입했고 오늘 밤 상의를 마치는 대로 떠날 테니까요."

    "그렇다면 저도 이의가 없습니다. 이제 농 형께서 상의하고 싶다는 일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군요."

    엽 수사가 한숨을 쉬고는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고, 그 말에 임 수사도 자리에 앉았다.

    "사실 그리 복잡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마겁이 도래한 후 고마계와 영계가 겹쳐졌을 때 노부와 함께 마계에 다녀오자는 제안을 드리려는 것이니까요."

    "마계에 들어가자고요?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죽고 싶으면 혼자 죽으러 가면 될 일이지 우리는 왜 부른 것입니까."

    임 수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따졌다. 그러나 엽 수사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고민스러운 얼굴을 했고, 한립은 의아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임 형,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노부가 이런 제안을 했을 때는 최소한 무사히 돌아을 확률이 7, 8할은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제 목숨을 걸고 농을 하지는 않습니다."

    "마계 성조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들인데 무슨 준비를 해가든 일단 마주치면 목숨을 보전하기는 어려 울 겁니다. 게다가 마계에는 다른 고계 고마들도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인계에서는 진법의 힘을 빌려 대적한다지만 적진에 들어가 어쩔 생각이십니까?"

    임 수사가 눈을 부릅뜨고 농가 노조를 보았다.

    "만일 우리의 기운을 잠시 평범한 고마와 똑같이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합체기 고마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다면요."

    "그런 방법이 있다고요? 능 형께서 잘못아신 것 아닙니까? 고계 고마들은 각종 불가사의한 신통에 능한데 어찌 그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겠는지요."

    엽 수사가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그 말에 농가 노조가 웃음을 흘리고 천추성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천추 수사께서 수고스럽지만 직접 보여주시지요."

    "수고라니요. 당연히 보여드려야죠."

    황포 소녀가 우아하게 미소를 짓고는 검은 구슬을 꺼내 입안에 집어넣었다. 구슬을 삼킨 천추성녀의 몸에 검은 기운이 피어올라 그녀를 뒤덮었다.

    검은 기운은 살아있는 촉수처럼 허공을 돌아다니며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진마기 (眞魔氣)!"

    동공을 수축한 한립이 작게 중얼 거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편전에 모인 이들은 모두 들었다. 이에 임 수사와 엽 수사는 순간 안색이 변했고 농가 노조가 의미심장하게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눈에 진마기를 알아보신 것을 보니, 한 수사께서 모종의 마도 공법을 수련하신 것이 맞는군요. 오늘 낮에 본 법상금신이 마계의 어떤 고마진신(古魔眞身)과 퍽 흡사 해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차였습니다."

    "농 형의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한립은 담담히 미소를 지으며 답 했다. 이때 마기 속 천추 성녀가 기합을 넣었다. 그러자 진마기가 빠르게 검은 물줄기로 변해 그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검은 기운이 사라진 황포 소녀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보는 다른 수사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천추 성녀는 외관은 물론이고 기운까지 이전과 똑같아서 술법이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가볍게 미소를 지은 황포 소녀의 기운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전신에서 강렬한 마기를 발산한 그녀의 얼굴에 새까만 문양이 떠오르고 미간 사이에 새까만 구슬이 나타났다.

    미간에 박힌 새까만 구슬은 분명 소녀가 처음 삼킨 바로 그 구슬이었다. 한립은 거침없이 의식으로 황포 소녀를 훑고는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몸은 물론 체내의 법력까지 정순한 진마기로 가득 차 인계에서 보았던 고마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과연 기묘합니다. 겉보기에는 고마와 다를 바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 눈은 속이더라도 정말 고마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는……."

    침음하던 엽 수사가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위마주(僞魔珠)'는 죽은 고마의 마핵으로 제련한 것이라 구슬을 삼키면 진마기를 발산하게 되어 평범한 고계 고마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또한 위마주의 효과를 시험하기 위해 제가 직접 지난번 마겁 때 포획한 고마들과 몇 개월을 생활해 보았습니다. 구금된 고 마들은 전혀 제 정체를 모르더군요. 물론 성조나 특수한 신통을 익힌 마족은 주의해야겠지만 방대한 마계 땅에서 그런 존재를 마주칠 확률은 아주 희박할 것입니다."

    황포 소녀가 설명이 끝나자 한립 과 임 수사 그리고 엽 수사는 모두 생각에 잠겨 말이 없었다.

    "……이 방법이 통한다고 해도 마계에 침입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입니다. 이제 마계로 가야 하는 이유도 말씀해주시지요. 농 형의 말대로 대승기에 이를 기회라면 아무리 위험천만해도 고려해야 할 테니까요."

    엽 수사가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대승기라는 말에 탐탁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던 임 수사도 움찔했다.

    "대승기에 이를 기회가 아니라면 저와 성녀가 왜 그런 위험을 무릅 쓰려 하겠습니까! 혹시 세령지(洗 靈池)와 정령련(淨靈速)에 대해서 들어보셨는지요?"

    "세령지와 정령련이요?"

    임 수사와 한립은 아리송한 얼굴을 했지만 엽 수사는 농가 노조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허허, 보아하니 엽 선자께서는 들어보셨나 봅니다. 하긴 막 선배님 의기명 제자셨으니 들어보셨겠지요."

    농가 노조 옆에 앉은 휘 수사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휘 형은 무슨 연유로 스승님을 언급하는 것입니까?"

    "감히 막 선배님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막 선배님께서 마계로 잠입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세령지와 정령련에 대해서도 알고 계실 거라 여긴 것입니다."

    순간 엽 수사의 얼굴이 싸늘해지자 휘 장로가 차분히 해명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스승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저희 엽 가의 선조께서 마겁 때 고계 고마를 격살하고 그 혼백을 통해 알아 낸 정보입니다. 굉장히 모호한 정보라 두 물건이 마족에게는 별 쓸모가 없고 우리 영계의 각종족에게는 불가사의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하하, 제가 괜한 소리를 했습니다."

    휘 장로는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넘어갔지만 정말 그녀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세 분이 세령지와 정령련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더라도, '화선지(化 仙池)'와 '칠규일기련(七務─氣達)'에 대해서는 잘 아실 거라고 생각 합니다."

    천추 성녀가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뭐라고요? 설마 그것들이 동일한 존재란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화선지는 전선계의 것이라, 막 비승 한 수사만이 그 연못에서 속세의 기운을 씻어내고 선인의 몸을 지닐수 있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철규 일기련은 화선지에 자생하는 영근과 지능을 개선해 주는 천지영물이고요. 백치도 그것을 먹으면 철규 (七務) 즉 눈, 코, 입, 귀가 트여 더없이 영민해진다는 전설이 있지 않습니까."

    임 수사가 고개를 저으며 믿지 못했다. 한립도 화선지와 철규일기련에 대해서 들어 보았기에 천추성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하며 진위를 알아내려 했다.

    "화선지와 철규일기련은 진선계에서도 오랜 세월이 걸리는 귀한 보물입니다. 당연히 제가 말씀드린 것과 동일한 존재일 수는 없지요. 하지만 환골탈태와 지능이 크게 높아지는 효과 등은 충분히 낼 수 있습니다. 세령지와 정령련이 진화해 형성되는 것이 화선지와 칠교일기련이기 때문입니다."

    황포 소녀가 이마 앞에 드리운 푸른 천을 치워내고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영계에서 없는 것이 어찌 마기로 뒤덮인 마계에서 만들어진단 말입니까? 게다가 수사께서는 어찌 그 존재를 알게 되신 것이고요."

    한립이 입 꼬리를 꿈틀하며 다른 수사들보다 먼저 질문을 던졌다.

    "그건……. 저희 영족의 영왕(靈王) 대인께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분도 마계 깊은 곳까지 잠입하셨다 두 보물의 존재를 알게 되셨고요. 당시 사정이 있어 연못에는 들어가지 못하시고 막 선배님과 마찬가지로 중상을 입고 본 족으로 돌아오셔야 했습니다.

    다만 어떻게 이런 천지보물이 마계에서 자라난 것인지는 하늘만이 알 일입니다. 제 추측으로는 마계 전역의 마기가 오랜 시간 동안 밀어낸 영기가 한곳에 모여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저하던 황포 소녀가 영족의 비사(秘事)를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세령지에 대한 소식은 성녀께서 농 수사께 전한 것이겠군요. 농 형께서 의심 없이 믿으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한립이 생각을 정리하고 농가 노조를 향해 물었다. 엽 수사와 임 수사도 그 말을 듣고 농가 노조를 쳐다보았다.

    "노부는 따로 이 소식의 진위를 판단할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요. 엽 선자께서도 세령지가 마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으시다니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아시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저와 성녀, 휘 형 그리고 영족의 성령(聖靈)급 수사 몇 명은 마계에 다녀올 작정입니다. 허허, 원래는 엽 선자와 임 형에게만 제안을 드리려 했으나 오늘 한 수사가 함께 자리하게 된 것은 갑작스런 결정이기는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저와 같이 마계에 한 번 다녀오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농가 노조가 결연하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한립을 포함한 수사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바로 답을 하지는 못했다.

    "농 형께서는 마겁이 폭발하고 언제쯤 마계로 진입하실 계획이신지 알고 싶습니다. 이번 마겁은 이전에 비해 더욱 흉흉할 거라 예상되는데, 시기를 잘못 골라 인족을 떠나면 우리가 속한 가문들은 마겁에서 큰 화를 당할지도 모릅니다."

    엽 수사가 한참 고민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그건 노부도 고민하던 바입니다. 그래서 마계에 진입할 시기는 마겁이 폭발하고 수십 년 후로 정했고요. 그때가 되면 마겁도 대치 상태에 들어갈 겁니다. 우리가 마계에 진입하기에 적기이지요. 게다가 한 수사는 산수시니 걱정할 일이 없고 엽 가와 임 가도 합체기 수사가 두 분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흥, 아주 다른 가문 소식에 정통하십니다. 좋습니다. 임 가가 마겁에서 위험에 처할 일만 없다면 저는 따라나서지요."

    뜻밖에도 임 수사가 가장 먼저 제안을 수락했다. 세령지와 정령련의 유혹이 커서 거절하지 못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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