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6화. 금신의 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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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엽가 와 농 가의 대결이었다. 깃털 옷 소녀는 농가 노조의 적수가 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거리낌 없이 패배를 인정했다. 그리고 봉 가도 다른 세 세가에 도전 하지 않아 5대 세가의 순위는 이전 진령대전과 똑같은 상태로 마무리가 되었다.
곡 가가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기는 했으나 한립의 실력을 본 곡가 수사들은 앞으로의 도전도 크게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드디어 농가 노조가 다른 세가들에게 자유롭게 도전하라고 말했을 때 곡가 다음 순위였던 노 가에서 백의 유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노애가 노 가를 대표해 곡 가에 도전하려 합니다. 한 수사, 한 수 가르침을 주시지요!"
말을 마친 유생이 하얀빛에 휩싸여 보호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유생 앞으로 나섰다. 노애가 진지한 얼굴로 두 손을 펼치자 독경할 때 쓰는 검은 계척(戒 尺)과 금색 거대 붓이 나타났다.
검은 계척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수십 송이의 검은 꽃을 피워내 그를 보호하는 동안 금색 거대 붓은 허공에 거대 나비 요충들을 만들어 냈다.
유생의 기압 소리와 함께 모든 나비 요충들이 날개를 펄럭여 오색 분말을 퍼트렸다. 그러자 오색 분말로 이뤄진 거대한 오색 독구름이 한립을 덮쳐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생은 입을 벌려 연한 붉은색 죽간을 분출했다. 붉은 빛을 머금은 죽간에서 주술문자들이 반짝이며 날아올라 순식간에 불새로 변해 독구름의 뒤를 따랐다.
노애는 처음부터 남다른 공격들을 선보였다. 합체 중후기 수사들과 비등하게 겨룬 한립의 실력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공격은 한립에게는 하찮기 짝이 없었다.
한립은 맹렬히 쏟아지는 공격에도 실소하고는 수결을 맺어 등 뒤로 삼두육비의 금색 허상을 불러냈다. 허상의 여섯 개의 손이 각자 수결을 맺자 금빛이 주르륵 흐르며 실체화되었다.
한립과 똑같이 생긴 세 개의 얼굴이 전부 또렷했고 여섯 개의 팔뚝에는 금색 비늘이 돋아 있었다. 온 몸에 새겨진 주술문자가 보일 듯 말 듯 아른거리는 것도 아주 신비로웠다.
바로 한립의 범성진마법상 금신 (金身)이었다.
"법상금신!"
무대 아래의 농가 노조가 한 눈에 범성법상을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꽤나 놀란 얼굴이었다. 뿐만 아니라 엽 가와 임 가의 합체기 수사들도 금신의 내력을 아는지 크게 놀라고 있었다.
한립이 법상금신을 응결한 순간 독구름과 불새들이 당도해 그를 휩쓸었다. 이때 한립의 기합소리가 울리고 금신이 번뜩이며 앞으로 나서 독구름과 불새들을 향해 여섯 개의 팔을 뻗었다.
파파파팟!
여섯 개의 손바닥에서 금색 빛구 슬이 나타나 회전하다 하나로 합쳐져 금색 소용돌이로 변해 뻗어나갔다. 그리고 금신의 세 머리가 눈을 번쩍 뜨고는 동시에 주술을 외웠다.
이에 천둥소리가 울리고 희미하게 불경소리가 겹쳐지며 소용돌이가 크게 불어났다. 두 눈으로 보이는 금색 물결이 소용돌이 속에서 튀어나와 독구름과 불새들을 모조리 휘 감아 돌아갔다.
그러자 제단위를 가득 채웠던 백의 유생의 공격이 모조리 사라졌다. 노애가 놀라 금색 거대 붓을 빠르게 휘두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립이 먼저 의식으로 법상 금신을 조종해 여섯 개의 팔이 이미 유생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퍼퍼퍼퍼퍼픽!
금색 주먹 허상이 번득이며 사라졌다.
"이런!"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유생은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리고 금색 거대 붓을 동그랗게 휘둘러 금색 방패를 만들어냈다. 입에서 뿜어낸 붉은 죽간도 붉은 빛의 장막으로 변해 그를 둘러쌌고 검은 계척이 검은 빛줄기로 변해 그의 주위를 돌았다.
금색, 붉은색, 검은색 세 겹의 보호막이 완성되자마자 여섯 개의 금색 주먹 허상이 지척에서 나타났다.
처음에는 손바닥만 하던 허상이 어느새 머리통만하게 커져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앞서 도착한 세 개의 주먹 허상이 세 겹의 방어막을 허물어트렸다.
이에 노애는 혼비백산해 손바닥 사이에서 하얀 뼈 망치를 불러내 휘둘렀다. 그 순간 뒤에 있던 나머지금색 허상 세 개가 연달아 날아 들었다.
콰쾅!
뼈 망치와 첫 번째 주먹 허상이 충돌해 경천동지할 굉음이 터졌다. 금빛과 하얀빛이 교전하는 와중에 유생은 뼈 망치를 쥔 손이 터질 것 같아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쿠콰쾅.
두 번째 충돌음이 울리자 핏기가 사라진 유생은 뼈 망치를 날려 두 번째 주먹 허상을 막아 동시에 터져버렸다.
그러나 세 번째 주먹 허상이 날아 들었을 때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유생은 두 눈을 금빛으로 번득이며 전신에서 강력한 기운을 일으켜 맨몸으로 주먹 허상에 맞서야 했다.
퍽!
유생은 몸을 부르르 떨며 튕겨나가 보호막을 찢고 만령대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영기의 빛을 반짝이고 서둘러 몸을 추스른 노가 합체기 수사가 서둘러 자신의 몸을 점검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형의 뛰어난 실력에 저는 적수가 되지 않는군요. 한 수 배웠습니다."
뜻밖에도 노애가 포권을 하며 한립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앞선 주먹 허상들의 강력한 위력으로 보아 마지막 일격에 그가 중상을 입지 않은 것은 한립이 봐줬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서로 실력을 갈고 닦는 자리인데 당연히 서로 배려해야지요."
한립이 미소를 머금고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도 공연히 합체기 수사와 원수를 맺고 싶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무대 아래 진령세가 자제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한립도 똑같이 합체 초기 수사 인데 노애와 몇 수 겨루지도 않고 상대를 만령대 밖으로 격퇴시켰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진령세가 합체기 수사들의 눈빛도 이전과 달라졌다. 대부분 경계하거나 어려워했고 일부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려웠다. 한립은 당당하게 무대를 내려와 곡가 수사들 앞에 자리를 잡았다.
"스승님, 차 드세요!"
백과아가 언제 차를 우렸는지 공손히 찻잔을 건넸다. 한립이 슬쩍 보니 어린 소녀의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그녀는 한립이 합체기 수사라는 것만 알았지 얼마나 대단한 신통을 부리는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불가사의한 신통을 부리는 스승을 보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소녀뿐만 아니라 곁에 있는 효풍 선자와 소 장로도 한립의 실력에 놀라 희색이 가득했다. 이번 진령대전에서는 아무도 곡 가를 건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후 서로의 실력을 대강 알았기에 도전하는 세가의 수는 많지 않았다. 몇몇 세가들의 대결이 지나고 순위전은 막을 내렸다. 이제 정해진 순위에 따라 만령괴수가 만들어낸 영패와 수도 자원 등 이권을 나눠 갖는 일만 남았다.
한립은 그 후의 일에는 끼어들지 않았고 모든 일은 효풍 선자와 소장로 두 사람이 알아서 처리했다.
그는 조용히 물러나 앉아 만령대 위에 모인 가주들이 침을 튀겨가며 격렬히 논쟁하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평소 품위를 지키던 가주나 장로라도 가문의 이권이 걸린 일에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순위가 정해졌으니 다행이지 수십 명의 가주와 장로들을 모아놓고 그냥 이권을 배분했으면 사흘 밤낮은 더 걸렸을 것이다.
합체기 수사들은 이런 체면 떨어지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무대 아래에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 중 꽤 많은 이들이 신기하다는 듯 한립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악의가 담긴 시선은 없었기에 눈을 감고 모른 척했다.
"제2화신에 법상금신까지 신통이 대단하십니다. 허나 한 수사의 신통은 여기서 끝이 아니겠지요?"
그의 귓가에 농가 노조의 목소리가 울렸다.
"농 형의 신통도 겨우 반룡화가 전부는 아니지 않습니까."
한립이 조용히 눈을 뜨고 농가 노조를 힐끔 보고는 역시 전음으로 답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혹시 한 형이 성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잠시 뜸을 들이던 농가 노조가 한립이 멈칫할 질문을 던졌다.
'성도?'
한립은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리 물어보십니까?"
"말하고 싶지 않으시면 되었습니다. 그저 수사와 상의할 일이 있는데 오늘 저녁 만령전(万靈殿)에서 뵈면 어떨까요?"
농가 노조는 그렇게 답할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만령전은 골짜기 절벽에 세워진 전당 중 하나로 세가의 장로와가 주들이 모여 중대한 일을 상의하는 장소였다. 농가 노조가 전음을 보내 그를 그 모임에 초대했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사안은 아닐 것이다.
"무엇에 대해 상의하고자 하시는 지 말씀해주시면 결정을 내리기 쉬울 듯합니다."
한립은 바로 거절하지 않고 신중히 물었다.
"지금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는 없고, 마겁이 도래한 이후에 있을 대사(大事)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입니다. 한 형에게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심지어 대승기 경지에 이르는 것과도 연관이 있겠지요."
"대승기!"
"맞습니다. 다른 몇몇 수사들과는 이미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오늘 한 형의 신통을 보고 참석할 자격이 된다고 여겨 제안 드리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능 형의 말씀대로 만령전에서 뵙지요."
한립은 놀란 마음을 숨기고 결정을 내렸다.
"하하, 현명한 결정입니다."
농가 노조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전음을 보내오지 않았다. 이후 진령대전은 이권을 분배한 각 세가들이 관례대로 한차례 더 의식을 치르고 막을 내렸다.
효풍 선자는 조용한 곳을 찾아 진령에 관한 경전과 약속한 물건들을 한립에게 바쳤고 또 한 번 곡 가에 들어올 것을 부탁했다. 한립이 들어온다면 곡 가의 태상장로와 똑같은 대우를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립이 웃으며 거절하자 그녀는 나중에라도 곡 가에 한 번 들려줄 것을 청했다. 그와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한립도 거절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답했다.
진령대전을 마친 일부 세가들은 만령대를 떠나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대다수는 며칠 더 머물며 서로의 수련과 깨달음에 대해 교환하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세가를 떠나 먼 길을 온 자제들이 허탕을 치고 돌아가지 않게 해주려는 것이었다. 곡 가도 바로 만령대를 떠나지 않고 골짜기 내부의 한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한립도 작은 누각을 통째로 차지 하고는 잠시 휴식을 취하다 저녁이 되자 조용히 만령전으로 향했다. 대전 입구에서 누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농 가의 휘 장로였다.
"약속대로 와주셨군요. 능 형과 다른 수사분들은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흑포 사내는 이전과 달리 부드럽게 말을 붙였다.
"농 형께서 약조한 다른 분들이라면……."
"하하, 영민하신 분이니 짐작을 하시겠지요.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시지요!"
한립은 고개를 끄덕이고 휘 장로를 따라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전은 지키고 있는 병사가 한 명도 없었는데 일부러 물린 듯 보였다.
흑포 사내의 안내를 받아 대전에 은밀히 숨겨진 편전으로 들어선 한 립은 돌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을 발견했다.
무표정한 얼굴의 농가 노조와 엽 가의 깃털 옷 소녀 그리고 임 가의 은색 고리를 쓴 사내였다. 거기에 편전에 막 들어선 한립과 휘 수사 까지 총 다섯 명의 합체기 수사들이 모였다.
농가 노조가 흔치 않게 웃음을 머금고 한립을 불렀다.
"한 수사, 이쪽으로 와 앉으시지요."
그 말에 한립도 미소로 화답하고 차분히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휘 수사 역시 농가 노조 옆에 자리를 잡았다.
"농 노괴, 우리를 모아 놓은 이유가 무엇인지 어서 말해주시지요!"
"그리 서두를 것 있습니까, 임 수 사. 한 분을 더 소개해 드리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올 사람이 있단 말인가요? 농형 도대체 몇 사람이나 부른 것입니까. 설마 봉가 형제는 아니겠지요."
차분한 농가 노조의 말에 엽 수사가 눈을 깜빡이며 웃음을 흘렸다.
"봉가 형제는 협공하면 확실히 중급 수사에 맞먹는 실력을 내지만 제약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함께하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해 알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소개하려는 분은 이미 도착해 있습니다. 천추 수사, 이제 얼굴을 보고 인사를 나눌 때인 듯싶군요."
농가 노조가 아무도 없는 편전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 한립을 비롯한 모두가 놀라 같은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편전 구석에서 광채가 반짝이고 노란 거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울은 모호하게 형태가 흐릿 해져 노란 장포를 입은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한립이 그녀를 보고 동공을 수축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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