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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83화 (840/2,000)

1083화. 속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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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또 다른 세가의 합체기 수사 두 명이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려 그 할망구는 오지 않았지만 한 가 녀석도 그리 만만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움직여도 될까요? 원래 노 가 수사들과 그 할망구를 겨냥해 세운 계획인데요.”

풍채 좋은 사내가 걱정스레 물었다.

“계획대로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 가 녀석은 우리와 아무 원한이 없지만 곡 가를 대표해 나왔으니 어쩔 수 없이 손을 봐줘야겠지! 우리 둘 다 합체 초기에 이른지 수 만 년이 되었으니 협공하지 않아도 저 정도 상대는 힘을 빼놓을 수 있을 게야. 나머지는 노 가에서 알아서 할 테고.”

청동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괴인이 담담히 답했다.

“형님 말씀이 맞긴 합니다. 천려 할망구도 우리가 협공하면 적수가 되지 않을 테니 저 녀석은 더욱 쉽겠지요.”

풍채 좋은 사내가 상대의 말에 동의했다.

* * *

“이번에 천려 선자가 진령대전에 불참했으니 우리 노 가에게는 절호의 기회이다. 대전에서 다른 가문을 만나면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곡 가와 맞닥뜨리면 전력을 다한다.”

뒤쪽 줄의 어느 세가에서 누군가 음산하게 소리쳤다.

“예, 노조!”

이런 비슷한 일들이 다른 가문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여유롭게 손가락 크기의 금색 호리병박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실체가 없는 것처럼 깜빡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호리병박이었다.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수십의 진령세가 수사들은 얌전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파앗!

두 시진이 훌쩍 지나, 드디어 만령대 상공에 우윳빛 진법이 나타나 빙글빙글 돌며 크기를 키웠다.

우웅!

진법 가운데에서 다채로운 빛깔의 주술문자들이 흘러나오자 그 아래 만령대도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것에 호응하듯 골짜기 전체가 울리고 수백 개의 거대 빛기둥이 치솟아 오색빛을 내뿜었다.

콰르릉 콰쾅!

빛의 진법에 영항을 받아 골짜기 상공에 광풍이 몰아치고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천둥소리가 울리고 굵은 자금색 뇌전들이 거대 구렁이처럼 먹구름을 돌아다녔다.

“헉, 천겁 벼락입니다.”

진령대전에 처음 와봤는지 어느 진령세가 제자가 겁에 질려 소리쳤다.

“못난 것! 무슨 소란이냐. 저건 만령(万靈) 대인께서 출현하시려는 징조이다. 제전의식(祭奠儀式)을 이제 시작해도 될 것 같은데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두 눈을 감고 있던 농 가 노조가 눈을 번쩍 떴다.

“관례대로 의식은 농 형께서 주관하시면 되겠습니다.”

봉 가의 풍채 좋은 사내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농 형께서 여기에서 수행이 가장 높으니까요!”

다른 몇몇 가문의 수사들도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이견이 없으시다니 우선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농 가 노조가 차분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이때 골짜기 상공의 자금색 뇌전들이 복잡하게 얽혀 그물 모양을 만들어냈고, 골짜기 절벽으로 뿜어져 나온 거대 빛기둥들은 기이하게 거대한 우리를 형성했다.

잠시 후, 각 가문에서 손바닥만 한 옥병을 들고 한 명씩 만령대 위로 날아올랐다. 농 가 가주도 금빛을 반짝이고 몸을 날려 만령대 보호막 속으로 들어가 수결을 맺었다.

그가 뿜어낸 금빛이 청석 지면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쿠릉!

다음 순간 만령대 위 하얀빛의 진법 옆으로 고풍스런 돌 대야가 떠올랐다. 평평한 대야에는 검은색 문양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고 날아오른 세가 제자들은 한 명씩 그 안에 옥병을 쏟아부었다.

다양한 빛깔의 액체가 흘러나와 기이한 향을 풍겼다. 어떤 것은 악취가 진동했고, 또 어떤 것은 향기가 나거나 물처럼 아무 향이 없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대야에 모인 액체들은 따로따로 응결해 서로 섞이지 않았다.

농 가 노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거세지는 빛의 진법을 살피다 고공의 자금색 그물을 올려다보았고, 만령대 밖 합체기 수사들도 진지한 얼굴로 빛의 진법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거대 진법에서 흘러나온 주술문자들이 합쳐져 거대한 빛구슬로 변하더니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쾅!

폭음이 울리고 놀랍게도 머리 여덟 개가 달린 괴수가 나타났다. 사자의 몸에 교룡의 머리를 지닌 괴수는 아주 흐릿해 허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평범한 연허 초기 수사의 기운을 지닌 괴수는 16개의 눈으로 음산하게 만령대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만령 대인의 강림을 경하드립니다. 저희 51개 진령세가가 올리는 진혈 제물을 받아주시지요!”

농 가 노조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만령이라 불린 괴수의 머리 중 하나가 농 가 노조를 힐끗 보곤 대답 없이 돌 대야로 표표히 날아갔다.

여덟 개 입이 쩍 벌어지자 대야 속의 액체가 여덟 줄기로 날아올라 괴수의 입안으로 사라져갔다. 잠시 후 제물을 남김없이 해치운 괴수의 몸이 눈에 띄게 선명해졌다.

괴수의 몸에서 발산되는 기운이 연허 초기에서 중기로 또 후기로 미친 듯이 치솟았다…….

결국 괴수의 기운은 합체 후기 최고봉, 아니 그 이상으로 높아졌다. 대승기 경지에 한발을 걸쳐 놓은 듯했다. 이에 무표정하던 한립의 얼굴이 미미하게 달라졌다.

잠시 후 팔두(八頭) 괴수는 세가의 자제들은 물론 합체기 수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돌연 허공을 박차고 날아올라 입에서 푸른 뇌전을 뿜어 허공의 자금색 뇌전 그물을 공격한 것이다.

이에 팔두 괴수 가까이에 있던 농 가 노조만이 입 꼬리를 꿈틀했을 뿐 평정을 유지했다.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리고 푸른 뇌전과 자금색 뇌전이 허공에서 교전했다. 그러나 뇌전의 빛이 사라지고도 자금색 뇌전 그물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것을 본 팔두 괴수가 천천히 여덟 개의 입을 다물고 농 가 노조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희 인족 수사들은 참으로 신중하구나! 오랜 세월 수없이 강림했건만 어뢰만봉대진(御雷万封大陣)은 항상 완벽했다. 오래오래 살고 싶으면 앞으로도 이래야 할 텐데 말이야. 한 번이라도 진법을 소홀히 해서 내 봉인에 문제가 생기면…….”

노쇠한 목소리가 음산한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시 않으셔도 됩니다, 만령 대인. 진령세가 제자들이 겨우 봉인 진법하나 제대로 펼치지 못해 의식에 문제가 생긴다면 대인께 체내의 진령의 피를 모조리 빼앗긴다 해도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보다 진령세가 선조와 대인의 약조대로 공물을 바쳤으니 저희를 위해 잠령령(潛靈令)을 만들어 주실 차례입니다.”

농 가 노조가 살짝 허리를 굽히고는 당당히 말했다.

눈앞의 괴수는 이계의 진령급 존재였지만 이곳에 강림한 것은 분신에 불과했다. 진령세가 선조가 정성을 다해 고안한 봉인 진법까지 있으니 합체 후기의 그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흥, 너희에게 받은 것이 있으니 나도 할 일은 할 것이다.”

냉소한 괴수가 여덟 머리로 중얼중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러자 각양각색의 주술문자들이 만령대 위로 빼곡하게 떠올라 엄청난 기세를 드러냈다.

농 가 노조도 긴장한 얼굴로 금색 보호막을 불러내 주변을 둘러싼 주술문자가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괴수의 포효소리가 울리고 만령대 위 허공이 왜곡되면서 주술문자들이 응결해 수많은 영패를 만들어냈다.

“999개의 잠령령이다. 다음번에 본 대인을 불러내려면 반드시 3천년 후여야 할 것이야.”

만령령들이 만령대 지면 위로 후드득 떨어지고 괴수가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괴수는 진법 속으로 뛰어올라 빛 속으로 사라졌다.

우웅!

빙글빙글 돌던 빛의 진법은 둔중한 폭음을 내며 갈라져 주술문자로 흩어졌다.

“잠령령을 회수하라! 순위전을 마치고 잠령령의 귀속을 정하겠다.”

눈을 가늘게 뜨고 진법이 사라진 곳을 주시하던 농 가 노조가 한참 만에 분부를 내렸다. 이에 어디선가 금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몰려와 은색 쟁반에 영패들을 가득가득 쌓아 제단 아래 탁자에 올려두었다.

“만령 대인께서 떠나셨으니 다음으로 세가의 진령 선조님들을 위한 제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농 가 노조가 제단 밖 수사들을 둘러보았다.

크고 작은 세가에서 다양한 제기 및 과실 그리고 향촉을 들고나와 제단을 꾸몄고 세가 가주와 장로들을 시작으로 모든 진령세가 자제들이 돌아가며 만령대에 올라 선조에게 예를 올렸다.

몇몇 전통 깊은 가문에서는 영계에서는 진작 사라진 제사의식을 행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제례는 거의 반나절동안 행해졌고 제례를 마친 이들은 진령대전의 꽃이자 이권을 배분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을 위해 조용히 물러났다.

“전통에 따라 진령대전에 참석한 모든 가문은 순위가 높은 다른 가문에 도전할 권리와 순위가 낮은 가문의 도전을 받아줄 의무가 있습니다. 기회는 단 한 번씩 이고, 순위가 5단계 이상 차이나는 가문에는 도전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다수의 가문이 한 가문에 도전하기를 원하면 순위가 더 높은 가문이 우선권을 갖습니다. 오대세가는 규정에 따라 이전 순위에 상관없이 번갈아가며 대결해 새롭게 순위를 정하게 됩니다. 제비뽑기를 하실 임 수사를 비롯해 오대세가를 대표하는 분들은 나서시지요.”

농 가 가주가 다시 만령대 위에 올라 설명했다.

“하하, 제비뽑기는 해서 무엇 합니까? 농 가와 대결하게 되면 질 것이 뻔한데요. 저는 엽 선자께 제가 요즘 수련 중인 신통에 대해 가르침을 구하고 싶은 마음뿐이군요.”

사내들로만 이뤄진 오대세가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녹색 장포를 입고 산발 머리에 은색 고리를 얹은 사내였는데 얼굴은 여인처럼 고왔다.

임 가 대장로인 그는 엽 가의 태상장로와 불화가 있는 듯 보였다.

“임 수사께서 본 선자와 겨뤄보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받아들일 것입니다.”

엽 가의 털옷 소녀가 웃음을 흘리자 산발 청년은 코웃음을 치고 대꾸하지 않았다.

짝!

곡 가를 대표한 효풍 선자와 봉 가의 두 합체기 사내가 별말이 없자 농 가 노조가 손뼉을 쳤다.

금갑 병사가 양 손으로 노란 죽통이 든 쟁반을 들고 만령대 위로 올랐다. 죽통 안에는 핏빛의 기다란 죽첨(竹籤) 다섯 개가 꽂혀 있었는데 아랫부분은 영기의 빛으로 덮여있어 의식으로 살필 수 없었다.

“대결에 참가할 수사께서 뽑아주시면 됩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번 대결은 합체기 수사들 간에 이루어지고, 1호와 3호, 2호와 4호가 대결을 하고 5호를 뽑으신 분은 부전승으로 승자와 다시 제비뽑기를 하게 됩니다.”

“농 형께서 먼저 뽑지 않으시니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봉 가의 풍채 좋은 사내가 제단에 오르지 않고 멀리서 손을 뻗었다. 핏빛 댓조각 하나가 죽통에서 뽑혀 나와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3호입니다.”

다음으로 엽 가의 깃털 옷을 입은 소녀가 피식 웃고 역시 죽통을 향해 손을 들었다.

휙!

은색 실이 뻗어나가 핏빛 댓조각 중 하나를 뽑았다.

“5호네요.”

깃털 옷 소녀가 슬쩍 댓조각에 적힌 숫자를 확인하고 미소 지었다. 이번 대결은 부전승이었다.

“한 선배님, 제가 대신 뽑아도 되겠습니까?”

한립 곁에 앉은 효풍 선자가 공손히 물었다.

“수고스럽지만 그래주게.”

한립이 아무 상관없다는 얼굴을 하자 효풍 선자가 소매 속에서 하얀빛을 뿜어 핏빛 댓조각을 끌어왔다.

“4호입니다.”

그녀가 조용히 알려주는 말에 한립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임 가의 산발 사내가 마지막 남은 두 개 중에 1호를 가져갔고 당연히 마지막 남은 2호는 농 가 노조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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