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082화 (839/2,000)

1082화. 만령대(方靈臺)

*

금포 거한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하얀 장포 청년이 비꼬는 어투로 말했다.

"흥, 내가 어떤 얼굴을 하던 수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보다 당신의 하계 분신과 내 전주인의 관계가 썩 좋아 보이던데 본체가 영계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아나 모르겠군요."

"하하, 그 천란 분신이야 내가 만일을 대비해 만들어놓은 것인데 어찌 본체가 하는 일에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수사가 역령 대법을 익히고 대법의 위력이 예상대로 엄청나다면 앞으로 몇 번의 뇌겁을 걱정 없이 지날 수 있을 텐데 그까짓 천란 분신이야 무엇을 하든 내 알바 아니지."

"그럼 내 전 주인에 대해서도 신경 끄시지요. 진령의 몸이 되어 내 의식 속에 남아있는 본명 혈주(血況)를 제거하기 전까지는 아무 짓도 하지 말란 뜻입니다."

"합체기에 이른 한가 녀석을 난 들 어쩌겠는가. 하하, 능력 밖의 일 이라네."

하얀 장포 청년이 정색을 하고 경고하자, 금포 거한이 순간 안색이 변하며 냉소를 흘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수사의 신분에 못할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

"내 신분을 안단 말인가!"

금포 거한이 눈을 부릅뜨며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확신할 순 없지만 대충 짐작가는 바는 있습니다. 수사처럼 거대한 세력을 움직이고 이만한 신통을 부릴만한 이가 몇 명 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금궐옥서 내장도 평범한 수사가 지니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알고 있다니 됐구만! 내 정확한 신분은 알 것 없고, 육익 수사가 역령대법을 수행할 수 있게 도울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만 명심 하면 되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수사가 대법을 대성해 장래의 천겁을 이겨내게 도와주는 것뿐이니까."

백포 청년이 차갑게 웃으며 하는 말에 금포 거한의 표정도 조금 어두워졌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니 당연히 그리 할 겁니다. 연허 후기 최정상인 내가 현음정벽 속의 음기를 흡수했으니 이제 적당한 곳을 찾아 합체기 고비를 넘어야겠습니다. 역령대법이 효과가 신기할 정도라 합체기에 이르는 것은 문제가 없을 테지요. 그때가 되면 홀로 만 황세계로 가서 냉기 속성을 지니는 고대 짐승의 요핵을 삼켜 천 년 내로 합체 후기를 노려보겠습니다. 진령의 몸이 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 되겠지요."

"마겁만 아니었으면 수사를 따라 같이 만황세계를 다녀왔을 텐데 안타깝군. 그래도 강력한 역령대법을 익힌 육익 수사가 합체기에 이르면 만황세계를 돌아다니기에는 충분할 걸세!"

앞으로의 계획을 들은 금포 거한의 안색이 조금 풀렸다.

"풍원대륙이 이리 넓고 음한(陰 寒) 속성을 지닌 고대 짐승들이 부지기수이니 멍청하게 강력한 이족인을 건들지만 않으면 별일 없겠지요."

이 말을 끝으로 하얀 장포 청년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 * *

두 달 후.

금색 술잔을 들고 있는 한립 곁에 곡가 가주 효풍 선자가 앉아 있었고, 소 장로는 그 옆에 앉아 모든 일을 가주의 뜻에 따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곡 가의 화신기와 원영기 제자들이 상기된 얼굴로 늘어서 있었다.

곡가 수사들 앞에 놓여 있는 거대한 제단은 바위를 쌓아 만든 것으로 꽤나 오래되어 보였다. 둥그런 제단 가장자리에 색색의 커다란 진법 깃발들이 펄럭이며 층층이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곡가 수사들 말고 다른 무리들도 제단 주변에 모여 있었는데 2, 3백 명이 몰려온 곳도 있었고 겨우 열 댓 명이 전부인 곳도 있었다. 족히 4, 50가문은 넘게 모인 듯했다.

곡 가는 수적으로 중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른 네 가문과 함께 제단에서 가장 가까이 둘러앉아 있었고, 나머지 가문들은 그 뒤쪽에 위치했다. 그리고 수사들 뒤로 낭떠러지 같은 절벽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이곳은 거대한 산골짜기 안이었는데 한립이 이곳에 앉아 있는 이유는 눈앞의 제단이 삼경(三境)의 모든 진령세가들이 삼천 년에 한번 모이는 '만령대'였기 때문이다.

지난 진령대전에서 5위에 올랐던 곡 가는 만령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배정받아 많은 진령세가의 선망을 받았다. 전체 진령세가 중 5 위에 든다는 것은 명예를 떠나 막대한 이익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은 한립은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고도 자신을 바라보는 열댓 개의 시선과 의식을 감지했다.

곡 가의 태상장로 '천려선자'가 진령대전에 불참하고 한립이 임시 객경으로 대신 나타났으니 다른 세 가의 관심을 끌 만했다.

처음에는 한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수사들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중 몇몇은 명백 히 그를 도발하고 있었다. 곁에 앉은 효풍 선자도 그것을 발견하고 점점 얼굴이 굳어갔다.

한립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슬쩍 안색을 굳혔다. 그러자 그가 들고 있던 금색 술잔이 아무 조짐도 없이 가루가 되어 그의 손끝으로 흘러 들어갔고, 동시에 은색 화염이 피어올라 불쾌한 의식들을 모조리 튕겨냈다.

한림이 그제야 고개를 돌려 싸늘하게 자신을 주시하던 합체기 수사들을 훑었다. 그중 두 명은 곡가 와 마찬가지로 만령대에서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오대세가(玉:大世 家) 수사였고 나머지 셋은 중간쯤에 앉은 중등 세가의 수사들이었다.

합체 중기인 천려 선자 대신 합체 초기 수사가 나타났으니 중등 세가의 합체기 수사들이 호시탐탐 곡 가의 순위를 노리는 것은 당연했다.

나머지 오대세가 수사들 중 한 명은 효풍 선자가 특별히 언급했던 봉 가의 대장로였다. 합체 중기로 길쭉한 얼굴을 지닌 봉가 대장로는 녹색 장포를 입고 검은 지팡이를 짚은 채 음산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진령세가 중 네 번째에 이름을 올린 봉 가는 곡 가와 대대로 원한이 깊었다. 그런 봉 가의 대장로가 곡 가의 임시 객경에게 텃세를 부리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또 다른 이는 진령제일세가 농가의 수사였다. 한립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은 농가 노조가 아니라 그 옆에 딱 붙어 앉아 있는 합체 중기 흑포 사내였다.

그는 농 가에서 얼마 전 포섭한 태상객경장로로 최상급 마도 공법 청망결(靑苦決)을 익힌 '휘 수사'였다.

농가 노조는 농가 수사들을 데리고 가장 앞줄에 자리 잡고는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흑포 사내외에도 그를 원한이 사무친 눈으로 노려보는 자가 한 명 더 있었다.

'아…….'

한립은 상대를 살피고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농가 노조 뒤에 선 청년의 입 꼬리에 붉은 반점이 눈에 띄었다. 목 족(木族)으로 임무를 수행하러 갔을 때 음모를 꾸미다 한립 때문에 실패했던 '농동'이었다.

농가 소주(少主) 능동은 수백 년을 준비한 일이 한립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자 엽 가의 천봉진혈을 얻기는 커녕 자신이 지닌 진룡진혈 까지 대부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한립을 다시 보니 화를 참을 수 없는데다 그가 합체기에 이르렸다는 소식에 질투까지 더해져 그런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계략이 성공했다면 농가 소주인 그는 수백 년 전에 합체기에 올랐을 것이었다. 그는 한립이 쳐다보는데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노려 보았다.

'이것 봐라?'

그 모습에 한립은 웃음기를 지우고 눈동자에서 강렬한 남색빛을 번득였고 농동은 두 눈이 불타오르고 송곳으로 머리를 찌르는 듯한 극통을 느꼈다.

이에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 잡으며 비명을 지른 순간, 농가 노조가 눈을 번쩍 뜨고 손바닥으로 능동의 팔꿈치를 쳤다. 순간 금빛이 능동의 몸속으로 번득이며 사라졌다.

농동은 고통에서 벗어났지만 당황 해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곧 정신을 차린 그가 서둘러 농가 노조에게 예를 올렸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조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큰일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납게 한립을 노려보는데 이전과 달리 두려워 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이미 합체기에 이른 한 립과 자신의 실력이 천양지차라는 것을 실감해서였다.

"한 수사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다 짜고짜 후배에게 손을 쓰다니요?"

농가 노조는 농동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한림을 보았다. 능동이 비명을 지르고 농가 노조가 한립을 지목하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저를 보는 시선이 불손해 혼을 낸 것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되는 지요?"

한림이 남색빛을 거두고 냉담하게 답했다. 농가 노조의 체면을 고려치 않은 태도에 몇몇 수사들이 수 군거렸다.

"흠, 제 손자 녀석이 조금 자만하는 성격이기는 합니다. 혼이 날 때도 되었지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농가 노조는 한립의 말에 수긍하며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농동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 말을 거스를 수 없어 순종했고 오히려 농가 노조 옆에 앉은 흑포 사내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전음을 보냈다.

"농 형, 방금 그 말씀은……."

"구선산에서 저와 손속을 겨루었던 원숭이 요족 수사를 기억하십니까?"

농가 노조의 목소리가 흑포 사내의 귓가에 울렸다.

"기억합니다. 성도의 요수일 거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그랬지요! 허나 후에 조사 해보니 그 자가 연기기 꼬마 녀석을 구하기 위해 쳐들어온 것이라더군요. 그리고 그 꼬마가 바로 저 '한 수사'의 기명제자이고요."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농 형은 저 자가 성도와 관련돼 있다 여기시는군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원숭이 요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일 지도 모르지요. 중요한 것은 마겁을 앞두고 농 가가 괜한 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의 수행은 별 것 아니라도 이렇게 빨리 합체기에 이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고요."

"농 형의 말씀을 들으니 쉽게 적으로 돌릴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잠시 후 대전에서 맞서 싸우게 되면 편의를 봐줘야 한다는 뜻입니까?"

흑포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진령대전에서야 당연히 그럴 필요 없습니다. 만일 저 자와 대결하게 된다면 이참에 본 실력을 확인 해 보는 것도 좋을 테니까요."

"모두 능 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대전에서 저 자를 만나면 제게 맡겨 주시지요!"

흑포 수사는 낮게 웃음을 흘리고 더 이상 전음을 보내지 않았고, 농가 노조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한편 효풍 선자와 소 장로는 한립의 언행에 화들짝 놀랐다. 곡 가와 농 가의 사이가 원래 좋지는 않았지만한립이 모두 보는 앞에서 농가 노조를 대하는 태도가 그들이 걱정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농가 노조가 별 반응이 없자 그들은 기뻐하면서도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 * *

"영아! 예전에 너를 도와주었다던 한 수사가 배포도 남다르구나. 합체 초기 수사가 농 가의 노괴에게 면박을 다 주고 말이야. 그만한 실력이 되든지 아니면 등 뒤에 든든한 배경이 있다는 뜻이겠지. 쯧, 어쩐지 우리 영이가 꾀지 못한 이유가 있었어."

진령세가의 여 수사가 한림의 태도에 놀라며 속삭였다 농가 옆에 자리를 잡은 이 가문은 곡 가와 마찬가지로 여인의 비율이 높았다.

맨 앞에 앉은 소녀가 오색 깃털 옷을 입고 싱글벙글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그 뒤로 젊은 부인과 회색 머리의 노부인이 서있었다.

"할머님, 다 제 자질이 부족해 한 선배님의 눈에 들지 못한 것입니다."

젊은 부인 뒤에서 백의 소녀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져 대답했다. 한림과 만보대회에서 재회했던 엽영이었다. 깃털 옷을 입고 있는 소녀와 엽영은 혈연관계인지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래? 내 눈에는 우리 영이가 아주 귀엽기만한데 저 녀석의 눈이 뻔 게지. 우리 엽 가로 들어왔다면 막대한 혜택은 물론 내 가장 아끼는 손녀까지 내주었을 것을."

그 소리에 깃털 옷 소녀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맑고 듣기 좋은지 주변의 다른 수사들이 몰래 시선을 줄 정도였다.

비술을 사용해 말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음에도 엽영은 다른 수사들의 시선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머니, 애 좀 그만 놀리세요. 어찌 매번 그리 영이를 곤란하게 하세요."

곁에 있던 아름다운 부인이 참다 못해 끼어들었다.

"하하, 아까워서 그런다. 영이가 내 어릴 적 모습을 꽤 닮았는데 성격은 완전히 달라 저리 부끄러움을 타지 않더냐. 이렇게 고운데 하루 종일 목석처럼 우두커니 서있기만 해서야 인생이 너무 무료하지 않겠니."

깃털 옷 소녀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엽가 남녀 수사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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