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1081화 (838/2,000)

1081화. 황야

*

두 시진이 지났을 때 하늘 끝에서 푸른빛이 번득였다.

"오셨습니다. 시간을 딱 맞추셨군요."

그것을 본 젊은 부인이 반갑게 소리쳤고 황발 노인도 안력을 돋우어 푸른 빛줄기를 살폈다. 강렬한 푸른 빛줄기 속에 크고 작은 두 명의 인물이 들어있었다.

푸른 빛줄기가 산봉우리에 도착해 둔광을 거두자 푸른 장포 청년과 열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소녀가 나타났다.

푸른 둔광 속 청년은 한립이었고, 그 옆의 소녀는 빙수지체를 지닌 백과아였다. 한립의 기명제자로 들어간 그녀는 백 년 동안 그의 법력에 의지해 체내의 한독을 억제해야 했기에 어딜 가든 따라다녔다.

곡가 수사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청년과 소녀를 보고 경계의 눈길을 보냈다.

"오는 길에 성가신 일이 있어서 조금 늦었네. 효풍 수사를 오래 기다리게 했군."

한립이 하얀 피부의 부인을 보고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일찍 와서 기다린 것이고 선배님께서는 제시간에 와 주셨습니다. 곡가 전체를 대표해 인사 올립니다. 이쪽은 곡 가의 소장로로 이번에 저와 같이 진령대전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며 서둘러 황발 노인을 한립에게 소개 했다.

"오, 자네가 소 장로로군."

상대의 수행이 곡 가의 가주인 효풍 선자와 비슷한 것을 보고 한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해 전부터 한 선배님의 위명을 들어왔습니다. 이번에 곡 가를 위해 나서주신다니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황 장로는 아직도 한림의 실력이 걱정되었지만 겉으로는 아주 공경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의 정중한 태도에 수사들은 바로 그가 곡 가를 대표할 합체기 수사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너무 예의 차릴 것 없네. 곡가와 나는 서로 거래를 한 것뿐이니까. 그런데 귀 가문의 태상장로이 신천려 선자께서 보이지 않으시는 군? 먼저 가신 겐가?"

"그게 아니오라, 천려 태상장로님 께서는 이번 진령대전에 참석하지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약속했던 상황과 다르자 한립이 얼굴을 굳혔다.

"송구스럽습니다. 태상장로님께서 뜻밖에 사고를 당하셔서 부득이하게 참석하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황발 노인이 한립의 안색을 보고 다급히 해명하기 시작했다.

"만황에서 부상을 당해 요양을 하고 계시다고? 그럴 만도 하지. 우리와 같은 경지에 오른 수사들은 일단 원기를 상하면 쉽게 회복하기 힘드니까 말이야. 이렇게 되면 가문의 순위를 높여 달라던 조건도 수정이 필요하겠군 그래."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곤란하다는 얼굴을 했다.

"태상장로님께서 나서지 못하시는데 선배님께 곡 가의 순위를 높여 달라는 청을 드릴 수는 없지요. 그저 이전의 순위만 유지해주신다면 약조를 지킨 것으로 하겠습니다."

효풍 선자가 미리 생각해온 바를 말했다.

"흠, 그것도 쉽지 않을 걸세. 막 합체기에 이른 내가 감히 확답을 줄 수 있는 일은 아닌 듯 싶은데?"

"그저 최선만 다해주시면 됩니다. 갑작스럽게 상황이 변해 난처하게 해드렸으니 약속드린 것 외에 극품 영석 약간을 준비했습니다. 약소하지만 성의이니 받아주십시오."

효풍 선자가 고민하다 소매 속에서 저물탁을 꺼내 바쳤다. 한립은 의식으로 저물탁을 훑고는 놀랐다.

"이렇게 많은 극품영석을 내놓다니 이번 진령대전이 퍽 중요한가 보군! 내 임시지만 곡 가의 객경 장로로 진령대전에서 최선을 다해 보겠네."

한립이 저물탁을 받아 넣는 것을 보고 부인은 크게 안심했다.

"선배님이 도와주신다니 저희 곡 가의 복입니다. 이곳은 진령대전이 열리는 만령대(方靈臺)와 조금 떨어져 있어 한 달 정도 걸립니다. 바로 출발을 해도 되겠는지요? 가는 동안 구체적인 내용을 저와 소 장로가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한립과 합류한 곡가 수사들은 산 봉우리에서 둔광을 일으켜 어딘가로 날아갔다.

* * *

천마황원(天馬荒原)은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였다.

화신기 수사가 밤낮없이 날아도 한 달이 걸린다는 이곳은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곳이라 수사가 드나드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이날 천마황원 깊은 곳에는 열댓 명의 인족 수사가 등을 맞대고 동그랗게 진형을 갖추고 떠있었다. 보물로 보호막을 두른 수사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 중심에는 수행이 가장 높은 연허 중기 거한이 남색 구슬과 하얀 깃발을 들고 쉼 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휘잉!

돌연 노란 모래바람이 그들 중 한 사내의 얼굴로 불어왔다. 무의식중에 눈을 감은 사내의 보호막이 순식간에 뚫리고 새하얀 손이 번개처럼 날아들어 상대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러나 사내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가슴에서부터 하얀 성에가 퍼져나가 꽁꽁 얼어붙었다.

주위 수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각종 보물로 그 주변을 마구 갈랐지만 얼음덩어리가 된 사내가 산산 조각난 것 외에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때 금포 거한이 노호성을 터트리고 남색 구슬에서 빛기둥을 뿜어 냈다. 빛기둥이 쾌속으로 모래바람을 가르자 하얀 무언가가 모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금포 거한의 명에 수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보물과 여러 신통을 이용해 오색 빛깔의 공격을 퍼부었다.

쾅!

하얀 그림자는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이에 수사들이 환호성을 지르려는데 금포 거한이 안색을 굳히고 튕겨 나온 조각을 잡아챘다. 조각은 굉장히 차가웠고 그의 손에서 맑은 물로 녹아내렸다.

"빌어먹을! 괴물이 아직 살아 있잖아!"

거한이 대경실색해 손에 들고 있던 깃발을 휘둘러 전신을 보호하려 했지만 한발 늦은 것이 분명했다.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목덜미가 서늘해지더니 새하얀 송곳니 두 개가 날아들어 그의 목을 물어뜯어 버렸다.

그의 뒤에서 나타난 새하얀 거대 지네는 입에서 하얀 기운을 뿜어냈다.

좌륵!

주변수사 대여섯이 미처 막을 틈도 없이 들고 있던 보물과 함께 얼음덩이로 변했다. 그것을 본 나머지 수사들이 혼비백산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갔지만 새하얀 지네에게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지네가 날개를 팔락이며 여섯 개의 분신(分身)을 만들어내 그 뒤를 쫓았기 때문이다. 참혹한 비명이 들려올 때마다 수사들의 목이 분리 되거나 꽁꽁 얼어떨어졌다.

새하얀 지네는 분신들을 회수하고는 강렬한 하얀빛에 휩싸이더니 곧 금은색 문양을 새긴 하얀 장포의 청년으로 변했다. 그는 무표정하게 주위를 훑고는 금포 거한의 목을 가까이 불러들였다.

그 안에서 남색 소인(小人)이 하얀 기운에 휩싸여 강제로 끌려나왔는데 금포 거한과 똑같은 얼굴을하고 있었다. 바로 거한이 만 년 넘게 응결한 원영이었다.

품에 우윳빛 돌덩이 같은 것을 끌어안은 원영이 겁에 질려 소리를 질러 댔다.

"나, 나는 천원경에서 이름난 남수종(薛水宗) 종주요! 나를 죽이면 천원경 집법수사들의 추살을 받게 될 것이오! 이것들이 본 종의 보물이니 가져가시오. 남수종의 모든 보물을 모아 놓은 곳으로 안내할 수도 있소!"

하얀 장포 청년이 관심이 가는 듯한 표정을 짓자 원영은 더 필사적으로 사정했다.

"어째서 우리들을 갑자기 습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번에 운송하는 재료들과 관계가 있을 거 란 걸 아오. 그것들도 전부……!"

원영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하얀 장포 청년이 섬뜩하게 웃고는 한쪽 팔이 모호해졌다. 순식간에 늘어난 팔에서 하얀빛이 번득이고 원영을 보호하고 있는 빛의 장막을 깨트려 버렸다.

원영을 붙잡은 청년의 팔이 그것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자 인근 허공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잘했네. 죽어도 싼 놈이 아닌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이미 제 손을 떠난 물건을 가지고 흥정 하려 하다니."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서 기괴하게 머리를 두 갈래로 닿은 금색 장포 거한이 나타났다. 구불구불한 검은 수염이 가득 난 거한은 노란 눈동자를 번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얀 장포 청년은 냉랭히 그를 보고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획! 휙!

바닥에 떨어진 구슬과 하얀 깃발이 청년 앞으로 떠올랐다.

금포 거한은 청년이 그러든 말든 피식 웃으며 한 발을 내디뎠다. 단 한 걸음으로 수십 장을 뛰어넘은 그는 백발 청년 가까이로 다가왔다.

이때 청년이 낮게 무언가를 중얼 거리자 등 뒤로 투명한 날개 허상이 나타나 파닥였다. 날개에서 하얗게 무수히 많은 도광(刀光)이 일어나 구슬과 깃발에 쏟아졌다.

보물들은 위태롭게 영기의 빛을 깜빡거리다 하얀 칼날들의 맹공에 부서져나갔다. 이에 하얀 장포 청년이 희색을 드러내며 칼날을 거두고 허공에 수북하게 쌓인 잔해를 바라보았다.

그가 수결을 맺고 주문을 외며 입에서 금색 화염을 뿜어냈다. 화염 은 두 보물들의 잔해를 덮쳐 하나 로 녹여냈고 그대로 하얀 장포 청년의 입안으로 돌아갔다.

파앗!

청년의 몸에서 금빛이 반짝이고 수레바퀴만한 금빛 광채가 머리 위로 떠올랐다가 금색 주술문자로 변해 흩어졌다. 금포 거한도 그것을 보고 희색을 드러냈다.

"남수종이 무공은 그저 그런데 지니고 있는 보물은 나쁘지 않구만. 남극주(南極株), 백수번(白水播) 모두 극한의 기운을 품고 있는 보물이니까. 이번에 그들이 운송하는 재료 중에 백만 년에 한 번 형성된다는 현음정벽(玄陰晶壁)은 더욱이 진령의 몸을 응결하는데 필수 재료 이니 그냥 둘 수 없겠지."

순식간에 금빛을 완전히 거둬드린 하얀 장포 청년은 더욱 강력한 기운을 발산했다.

"그래서 현음정벽은 어디 있다는 것입니까? 구슬과 깃발 말고 한기를 내뿜는 보물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어디서 잘못된 정보를 듣고 온 것 아닙니까?"

드디어 하얀 장포 청년이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꽤 많은 영석을 들여 만통문(方通門)에서 구입한 정보인데 잘못될 리 있나! 감히 나를 속였다면 그들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이네. 물건이 특수한 방법으로 봉인되어 있어 감응되지 않는 것인데, 아직 육익 수사의 실력이 부족해 못 찾는 것 같으니 내 도와줌세."

금포 거한이 실실 웃으며 얼어붙은 수사들을 향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과과쾅!

얼음덩이 수사들이 지니고 있던 저물 법기들이 영기의 빛에 휩싸여 터져나갔다. 그중 어떤 물체가 날아들어 거한의 손에 들어왔다. 노란색 옥갑에 새빨간 부적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금포 거한은 물건을 대충 살피고 백포 청년에게 던져 주었다. 청년은 그것을 받지 않고 등 뒤의 날개 허상을 펄럭여 하얀빛을 날렸다.

서걱!

옥갑과 붉은 부적들이 순식간에 잘리고 안에서 주먹 크기의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남색빛이 반짝이고 매우 두꺼운 남색 수정 벽이 나타나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정벽을 본 청년의 냉랭한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입에서 하얀 한기를 뿜어 남색 수정벽을 허공에 얼려두고 몸을 떨었다. 모호해진 청년의 몸이 좌 우로 나뉘며 똑같이 생긴 사람이 열두 명이나 생겨났다.

전부 등 뒤로 희미한 금은색 문양이 그려진 투명한 날개 여섯 쌍이 달려 있었다. 12명의 청년들은 한 손으로 똑같은 수결을 맺어 몇 척 크기의 새하얀 지네로 변해 수정벽 속으로 파고들었다.

수정벽에서 하얀빛을 내뿜는 지네 주위로 남색 실들이 나타나 유입되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금포 거한의 얼굴에 긴장감이 어렸으나 열두 덩이의 하얀빛이 수정벽 속의 남색 실을 별 탈 없이 흡수하는 것을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운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자네가 복을 타고난 것인지 모르겠구나! 백룡진혈(白龍眞血)을 지니고 변이를 거처 금궐옥서 내장의 비술을 익히기에 제격인 몸으로, 때마침 역령진음대법(逆靈眞陰大 法)을 연구하고 있는 나를 만나다니.

더욱 신기한 것은 하계의 화신이 소식을 보내며 언급했던 '그 녀석'을 배반한 영충이라는 것 아니겠는 가! 정말 흥미로운 우연이란 말이지……. 육익 수사가 역령대법을 대성하고 진령의 몸을 응결한 다음 한가 녀석을 어떤 얼굴로 대면할 지도 궁금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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