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0화. 취령장(聚靈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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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함께 다니시겠다는 뜻입니까?”
한립은 정말 의외라는 얼굴로 턱을 쓸었다.
“한 형에게 짐이 된다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진법과 공간신통에는 나름 자신이 있습니다. 언젠가 도움을 드릴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또한 제가 지닌 천봉원음의 기운으로 수사가 고비를 넘기실 때 힘을 보태겠습니다. 수행을 회복할 때까지 안전만 보장해주시면요.”
빙봉의 냉랭한 얼굴이 조금 붉게 변했다.
“선자의 말씀은…….”
“오해는 마세요. 빙봉 일족에 전승되는 비술을 이용하면 쌍수 노정이 되지 않아도 체내의 천봉원음을 몸 밖으로 밀어내 다른 사람에게 내줄 수 있습니다. 물론 효과는 약간 떨어지겠지만요.”
“빙봉 일족에 그런 비술이 전해지다니 놀랍습니다. 제 곁에 머물며 수련하시는 것은 상관없지만 선자께서 나중에 후회하시는 일이 없도록 미리 해둘 말이 있습니다.”
한립이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우선 선자께서 제 곁에 남으신다고 해도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곧 도래할 마겁은 합체기 수사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우니까요. 다음으로 제게는 남들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이 있습니다. 앞으로의 생활이나 수련에 관해 반드시 제 뜻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이런 구속이 싫으시다면 언제든 떠나셔도 좋고요. 마지막으로 외부인이 있는 자리에서는 수사를 제 시첩이나 시녀로 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선자의 명성에 해가 되겠지요.”
“마겁에 대해 자세히는 몰라도 인족과 요족의 대재앙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형 곁에 머물지 않는다고 해도 화를 면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한 형 곁에 머물기로 했다면 한 형의 안배를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요! 게다가 지금 수사의 신분이면 시첩이나 하녀로라도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결단기, 원영기 여 수사들이 넘쳐날 텐데 제가 어찌 그것을 마다하겠습니까.”
빙봉이 빙긋 미소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을 했다.
“봉 선자께서 결정을 내리셨다니 저도 이 일을 수락하겠습니다. 이 단약들을 가져가 복용하고 만보대회가 끝나기 전까지 밀실에서 수련에 매진하시지요. 동부로 돌아가는 대로 정식으로 수련할 곳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한립은 저물탁에서 각양각색의 약병들을 꺼내 빙봉에게 던져주었다. 여인은 일일이 약병 안을 확인하고는 희색을 드러냈다.
“이렇게 많은 법력 증진용 단약을 주시다니 머지않아 수행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다.”
“하하, 다른 건 몰라도 결단기와 원영기에 필요한 단약은 충분하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언제든 말씀해주시면 더 내어드리지요! 수사의 수행이 높아질수록 천봉원음의 기운도 강해질 테니 제게도 득이 되겠지요. 마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전에 천봉원음의 힘을 빌렸으면 합니다.”
“한 형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립과 빙봉이 마주 웃었다. 그러자 청아하고 수려한 여인의 얼굴이 마치 꽃이 만발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의 시선을 느낀 빙봉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한 형께서 허락하셨으니 저는 바로 단약을 복용하고 수련을 시작하겠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법력을 회복해 짐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저도 대회에서 얻은 다른 보물을 살펴보아야 하니 선자께서는 이곳에서 수련하시면 됩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곳을 나와 또 다른 밀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에빙봉은 우두커니 제자리에서 그가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는 붉은 단약을 삼키고 그 자리에 앉아 수련을 시작했다.
한립은 그곳에서 머지않은 밀실에 앉아 투명한 황금색 단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명성이 자자한 단약답게 보통이 아니구나. 경전에 쓰인 것처럼 수련의 고비를 넘길 때 탁월한 효과를 발휘해줘야 할 텐데.”
그는 단약을 약병에 담아두고 또 다른 물건을 꺼냈다. 금색 두루마리와 금색 보따리였다. 두루마리는 핏빛 수사와 거래한 물건 중 하나였고, 보따리에는 제천라와 같이 교환한 흑역의 두 번째 보물이 들어있었다.
그는 금색 두루마리를 허공에 띄우고 먼저 금색 보따리를 풀었다.
우웅!
보따리 안에서 무언가 진동하며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푸른빛은 손가락 길이의 나무 방망이 스무 개로 변해 영성을 지닌 것처럼 밀실을 날아다녔다.
그 모습에 한립은 수결을 맺으면서 주술을 외웠다.
휘휙!
파공음과 함께 그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실들이 뻗어나가 푸른 그물처럼 밀실을 뒤덮었다. 그러자 푸른 나무 방망이들은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꿈틀거렸다.
이에 한립은 푸른 그물을 모아 나무 방망이들을 손바닥으로 끌어들였다. 방망이는 비취색 표면에 오묘한 은색 주술문자들이 가득했는데 농염한 영기가 느껴졌다.
“과연 말로만 듣던 취령장(聚靈樁)이야. 영안의 나무를 써서 이것을 스무 개나 넘게 만들어 두다니! 한 벌로 제련해 완성하면 천지영기를 빨아들이는 속도가 두 배로 늘어나겠지.”
그는 손끝으로 푸른 실에 묶인 작은 나무방망이를 매만지다 고개를 저으며 다시 보따리 속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금색 보따리를 단단히 봉인해 저물탁 안에 넣고 이번에는 허공에 떠 있는 금색 두루마리를 불러왔다.
손에 들고 살피니 약간의 탄성과 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남색빛을 번득이며 두루마리를 살펴보다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두루마리는 원래 동그란 모양이었던 것처럼 틈새가 보이지 않았고 명청령안으로도 금빛을 투과해 안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한립이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강대한 의식을 방출했다.
‘이런!’
그러나 의식이 두루마리를 감싼 순간, 그는 그것을 멀리 던져버려야 했다. 두루마리에서 강력한 흡입력이 발생해 그의 의식 일부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재빨리 반응을 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그의 원신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립은 깜짝 놀라 멀찍이 떨어진 금색 두루마리를 응시했다.
‘쉽지는 않겠구나.’
손을 뻗자 푸른 검실들이 나타나 두루마리를 베었다.
챙!
금색 두루마리는 금빛을 반짝이며 검실들을 모두 막아냈고 베인 자국조차 남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합체기 수행을 지닌 그가 부리는 청죽봉운검은 영계에서 잘라내지 못할 물건이 거의 없었다.
이로써 두루마리가 진귀한 보물이라는 것이 증명되었고, 핏빛 수사가 아까워하며 거래한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의식으로 침투하는 것도 안 되고 외부의 힘으로 부수는 것도 안 되니 강제로 봉인을 깨는 방법은 안 통할 듯했다.
게다가 두루마리 위에 떠오른 금은색 문자는 정말 금전문이었다. 방금의 일격으로 두루마리 속에 숨겨져 있던 문자가 떠오른 것이다.
금전문은 은과문과 달리 인요족을 통틀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가 손에 꼽혔다.
대부분이 금전문을 익히고도 그것을 비밀로 했기에 분명 인요족 중 누군가는 금전문을 알고 있을 테지만 찾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핏빛 수사는 금전문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제까지 두루마리의 봉인을 풀지 못할 리 없었다.
한립도 광한계에서 이 선가문자를 익힐 기회가 없었으면 어찌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가 금색 문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 금전문이 사라졌다.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연달아 튕겨 푸른 검기를 방출하자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금색 문자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의 손에서 푸른빛이 끝없이 밀려나와 금색 두루마리를 감쌌다.
파아앗.
두루마리가 바르르 떨리며 금빛이 터져 나오고 금전문 전체가 떠올랐다. 영안 신통을 발휘해 금전문을 한식경 가량 연구한 끝에 한립은 푸른빛을 멈추었고, 금색 문자들은 분분히 흩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두루마리에 떠오른 금전문을 외운 후였다. 그가 착각한 것이 아니라면 금전문에는 어떤 진법을 펼치는 법이 담겨 있었다. 그리 크지는 않았으나 영계에서 보았던 어떤 진법보다 현묘했다.
광한계에서 얻은 부적들을 연구해오지 않았다면 이마저도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금전문을 아는 것과 금전문으로 쓰인 진법금제를 이해하는 것은 천지차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진법을 제대로 깨우치려면 수십 년은 마음먹고 연구해야 할 텐데 두루마리 봉인이 아무리 흥미로워도 당장은 그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한립이 작게 한숨을 쉬고 금색 두루마리를 저물탁에 넣었다.
다음으로 꺼낸 것은 반 척 길이의 구불구불한 검붉은 괴목이었다. 핏빛 안개가 스며 나오는 괴목은 바로 경매회에서 낙찰받은 읍령혈목이었다.
그는 저물탁 안에서 보조 재료들을 수북하게 쌓아놓고 입에서 은색 화염을 불어 혈목을 감쌌다.
치직!
핏빛 안개와 은색 화염이 교전하며 나지막하게 폭음이 들려왔다. 다양한 보조 재료들이 휙휙 은색 화염 속으로 날아 들어갔고 눈에서 남색빛을 일으킨 한립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는 밀실에 틀어박혀 수련에 집중했고, 이레가 흐른 후에야 겨우 밀실을 빠져나와 한밤중에 기령자와 해대소를 구선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데려다주었다.
그들을 몰래 천연성으로 떠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홀로 구선산으로 돌아온 그에게 만골진인이 은밀히 찾아왔다.
한립은 그와 대청에서 무언가를 상의하다 만골진인을 따라 동부를 나섰고, 비슷한 시기에 구선산 영선궁에서 홀로 머무는 합체기 수사들이 소리 없이 종적을 감췄다가 나타났다.
그들은 반나절이 지나 전부 모습을 드러냈지만 머리가 있는 자라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것이다.
만보대회 기간 동안 한립은 빈번히 시장으로 나가 마음에 드는 재료들을 사들였고, 남는 시간에는 합체기 수사들과 교류하거나 소형 교환회에 참석해 작은 수확을 얻었다.
그리고 대아가 며칠에 한 번씩 그를 찾아와 즐겁게 떠들어대다 돌아갔다. 남궁완과 비슷한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한립의 마음이 묘해졌다.
만보대회가 끝나갈 무렵 현무패황과 천원성황은 다시 여러 인족 수사들을 끌어들이려 시도했고 그 후한 조건에 두 명의 수사가 각각 패황과 성황의 세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한립은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고 만보대회가 끝나기 며칠 전 홀연히 구선산을 떠났다. 그와 동시에 빙수지체를 지닌 백과아도 종적을 감추었다.
드디어 만보대회가 끝나고 구선산에 모여들었던 인요족 수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한 달이 지난 후에는 구선산도 이전의 조용한 모습을 되찾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 4년이 지나갔다.
천원경 구석의 외진 산봉우리에 한 무리의 수사들이 날아들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양했지만 전부 옷섶에 푸른 실로 ‘곡(谷)’ 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러나 일행 중에는 여인의 비율이 높았고 다들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의 백 명에 달하는 수사들이 산봉우리에 내려섰다.
그중 일부는 간단한 방어용 진법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나머지는 깨끗한 바위나 나무그루터기를 찾아 가부좌를 틀고 휴식을 취했다.
무리의 우두머리인 황발(黃髮) 노인과 남색 궁장 차림의 젊은 부인은 연허 후기를 대성한 수사들이었다. 그들은 산 정상에 서서 전음을 주고받았다.
“효풍 가주, 이곳이 그 선배님과 만나기로 한 망구봉(望龜峰)입니다. 대충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황발 노인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소 장로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분이 약속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오늘 이곳에서 만나자고 먼저 연락을 주셨는걸요.”
하얀 피부의 부인이 담담히 답했다.
“부디 그래야 할 텐데요. 태상장로님께서 만황세계에서 부상을 당하셔서 갑자기 백년간 폐관수련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까. 곡 가의 유일한 합체기 수사께서 일을 당한 탓에 삼천 년에 한 번뿐인 진령대전을 놓칠 뻔했어요! 가주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셔서 미리 합체기 선배님에게 도움을 구해놓으셨으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진령대전은 진령세가 자제들이 잠령동(潛靈洞)에 들어갈 인원수와 그 밖의 이권을 배분하는 중요한 행사입니다. 지난 번 태상장로님께서 좋은 성적을 내주시어 이번에는 외부 수사와 함께 순위를 더욱 높이려 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전의 순위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일 것입니다.”
황발 노인의 탄식에 부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가주께서 도움을 구한 한 선배님은 합체기에 이른지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자질이 뛰어나도 만년 이상 명성을 날린 태상장로님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게다가 태상장로님께서는 진령의 피를 지니셨기에 일단 진혈을 발동하면 더욱 상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합체기 수사 없이 진령대전에 참석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아니었다면 곡 가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진령세가 중 다섯 손가락에 드는 세가들은 전부 합체기 수사들을 보유하고 있으니까요.”
이 말에 황발 노인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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