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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1079화 (836/2,000)

1079화. 빙봉

*

‘설마 이 많은 수사 중에 공격형 통천령보를 지닌 자가 없단 말인가!’

일다경이 가까워오자 핏빛 수사가 이를 악물고 허리춤에서 이상한 남색 자루를 꺼내들었다.

파앗!

남색 자루는 밝은 빛을 방출하고 남색 얼음 새장으로 변했다. 금은색 부적들이 여러 장 붙은 새장 안에는 새하얀 새가 앉아 무심하게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다.

“천봉의 피를 계승한 천지영수, 빙봉(氷鳳)입니다. 실제 결단기 정도의 기운을 지니고 있는데 부상을 당해 화형을 하지 못하지요. 수백 년 동안만 제대로 돌봐주면 원래의 수행을 회복할 겁니다. 이 빙봉은 화형 후 원음의 몸을 지닌 최상의 노정이 될 것이고요.

그녀의 천봉원음(天鳳元陰)을 흡수하면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수련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정명단보다는 못하겠지만 수련 고비를 넘길 확률도 높여줄 겁니다. 우연히 얻게 된 이 빙봉과 앞서 제시한 두 가지 물건으로 오직 공격형 통천령보 하나와 거래하겠습니다. 이미 전 재산을 내놓은 것이니 이번 기회를 놓치면 더 좋은 조건에 거래할 수는 없을 테지요.”

핏빛 수사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듯 소리쳤다. 대천겁에서 목숨을 구해줄 물건을 코앞에 두고 얻을 수 없으니 얼마나 화가 나고 답답하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수사, 만일 이 세 가지 보물로…….”

“안 됩니다. 분명히 말했다시피 무조건 만령방에 오른 공격형 통천령보여야 합니다.”

핏빛 수사가 검은 기운 수사에게 양해를 구하려는데 상대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 말에 핏빛 수사가 절망하고 있을 때 차분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거래하겠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누구신지 어서 무대로 올라와 주시지요!”

그는 목소리가 들려온 정자를 찾아 고개를 돌렸고 검은 기운 수사도 들뜬 기색이었다. 거래를 제안한 이는 한립이었다.

핏빛 수사가 새장에 담긴 빙봉을 꺼내든 순간 그의 표정이 더없이 신중해졌고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연 것이다. 푸른빛이 반짝이고 정자에서 푸른 빛줄기가 날아올라 무대로 떨어졌다.

“정말로 통천령보가 있으십니까?”

핏빛 수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확인을 했다. 이에 한립이 미소를 짓고는 얼음 새장 속 빙봉을 힐끗 보고 차분히 답했다.

“상당히 위력적인 공격형 통천령보가 있기는 합니다만 만령방에 이름을 올린 물건인지는 모르겠군요. 두 분께서 확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오, 어서 보여 주시지요!”

핏빛 수사가 희색을 드러내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고, 검은 기운 사내는 한쪽에서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았다.

한립은 시간을 끌지 않고 거대한 검은 칼날을 꺼냈다. 고풍스러운 양식에 만황시대의 거친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물건이었다. 그가 광한계에서 융족인을 죽이고 얻은 거대 칼날이었다.

‘아마 혼돈만령방에 이름이 올라 있을 터.’

“현광인(玄光刃)!”

핏빛 수사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검은 기운 수사가 소리를 높였다.

“아는 보물이십니까?”

핏빛 수사도 그 말을 듣고 반색하며 물었다.

“당연히 알지요! 거의 마지막이기는 해도 확실히 통천만령방에 올라있는 물건입니다. 공격형 통천령보를 원하면서 어떤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겠습니까. 진품인지는 자세히 감정을 해봐야겠지요.”

“그럼 그래야지요. 수사, 괜찮으시면…….”

검은 기운 수사의 말에 핏빛 수사가 한립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하려 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수사의 물건들도 직접 확인해 봐도 되겠지요?”

한립은 검은 기운 수사에게 검은 거대 칼날을 휙 던져주고 물었다.

“자, 마음껏 살펴보세요!”

한립이 시원시원하게 감정을 허락하자 핏빛 수사도 냉큼 약병과 두루마리 그리고 얼음 새장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세 수사가 거대 칼날과 검은 사발 등을 받아서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하, 바로 이겁니다! 제가 딱 필요로 하던 얼운이에요.”

핏빛 수사가 검정 사발의 감정을 마치고 한립과 검은 기운 수사에게 인사도 없이 자신의 정자로 돌아가 버렸다.

한립도 확인을 마치고 금색 두루마리와 약병을 챙기고 새장 안의 빙봉에게 눈길을 주었다. 새의 은색 눈동자에 처량한 빛이 스쳤다 금방 사라졌다.

한립은 영수환을 방출해 빙봉을 넣고는 검은 기운 사내에게 포권을 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한립은 의자에 기대앉아 평온한 얼굴로 두 눈을 감았지만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검은 기운 수사마저 무대를 내려가자 다음 수사가 올라왔고, 반나절 후 금면인의 선포로 흑역교역회가 막을 내렸다.

대부분의 수사들은 금면인이 초대한 연회에 참석했지만 한립은 연회 초대를 거절한 다른 합체기 노괴들과 함께 견인 사자를 따라 흑역 공간을 빠져나왔다.

* * *

흑역교역회로 꼬박 하루가 지났다.

이튿날 오전이 되어서야 거처로 돌아온 한립은 해대소와 기령자를 통해 그간 별일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심했다.

그는 기명제자들을 물리고 밀실로 들어가 영수환에서 얼음 새장을 불러냈다. 그러자 새하얀 새는 날개를 휘둘러 은색 기운을 흩날렸다. 명백히 경계어린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수사가……!”

한립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새가 뜻밖에도 사람의 말을 내뱉었다. 냉랭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봉 선자,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한립은 새장 속의 빙봉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빙봉은 그와 같이 공간접점에서 공간 폭풍에 휘말렸던 봉 선자였다. 인계에서 빙해의 주인으로 불리던 그녀가 화형도 못하는 영수의 모습으로 새장 안에 갇혀 지내고 있다는 것에 말문이 막혔다.

“진짜 한 형이 맞습니까? 그렇다는 말은 교역회에서 저를 교환해간 사람이 바로 수사란 말이겠고요. 벌써 연허기에 이른 것입니까?”

빙봉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지만 어쩔 수 없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제 수행에 대해서는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보다 흑역회에서 선자를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군요. 저와 선자가 인연이 있기는 한가 봅니다. 일단 선자를 꺼내드리겠습니다.”

한립은 얼음 새장의 금은색 부적을 향해 손끝에서 푸른빛을 뿜었다. 부적이 떨어져 흩날리며 새장이 열렸다.

“감사합니다, 한 수사!”

빙봉은 날개를 펼쳐 하얀빛으로 변해 새장을 빠져나왔다. 은빛을 반짝이며 반 장 크기로 커진 새는 얼음으로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화형을 할 힘이 없어 부끄럽게도 이런 모습으로 수사와 대화를 나누어야겠습니다.”

“아닙니다. 선자의 자질에 봉인만 제거하면 화형기 수행을 되찾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한립이 우아하게 선 빙봉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봉인을 알아채셨군요. 합체기 노괴가 걸어 놓은 금제라 그리 쉽게 제거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합체기 수행을 지닌 수사만 풀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그를 연허기 수사로 오해한 빙봉이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그래도 시도는 해보아야지요.”

한립은 옥처럼 하얗게 변한 손을 뻗어 빙봉의 한쪽 날개를 가리켰다. 그러자 오색화염이 뻗어나가 빙봉의 몸으로 미친 듯이 유입되었고, 봉 선자는 기이한 힘이 온몸의 경맥을 돌자 체내의 금제 봉인이 조금씩 깨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척 기쁘면서도 놀란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금제 봉인을 이렇게 쉽게 해결한다는 것은 상대가 합체기 존재라는 말이었는데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기연을 얻어 수백 년 만에 연허기에 이렀다는 것은 어찌어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합체기라니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금제를 제거하자 그녀는 체내의 한기가 단전으로 몰려드는 것을 감지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알 수 없었지만 한립의 강력한 진원의 힘에 반항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녀의 기운이 한층 강해졌고 별안간 경지가 상승했다.

펑!

눈부신 하얀빛이 터져 나와 빙봉을 휘감았다. 한립은 그제야 미소를 머금고 손을 거두었다. 하얀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은색 장삼을 입은 여인이 조용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인간의 형상을 갖춘 은색 장삼 여인이 한립을 향해 예를 올렸다.

“그리 예의 차리실 것 없습니다. 당시 선자와 힘을 모으지 않았다면 저도 결코 공간접점을 통과해 영계에 이를 수 없었겠지요. 게다가 상성이 맞는 진원의 힘을 불어넣어 잠시 화형의 힘을 되찾게 해드린 것이니 바로 폐관 수련을 해야 오래 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원의 힘으로 도와주신 덕에 많은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습니다. 수사의 신통과 법력으로 보아 이미 합체기 경지에 이른 것이겠지요! 이제 한 선배님이라 불러야겠습니다.”

은색 장삼 여인이 한립을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훑었다.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빙봉의 몸을 지닌 선자라면 합체기에 이르는 것도 시간문제일 테지요. 저와는 인계에서부터 인연이 있는 분이시니 편하게 동급 수사처럼 대해주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마음이 불편할 듯싶습니다.”

“한 형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무례인 줄 알면서도 따르겠습니다.”

“공간접점에서 헤어지고 봉 수사께서 어쩌다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된 것은 수사의 탓도 약간 있습니다.”

한립의 질문에 빙봉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걸어둔 금제가 발작한 것이겠군요.”

“예, 한 형의 금제가 어찌나 현묘하던지 백 년을 고생하고서야 겨우 해결했습니다. 그 일로 원기를 크게 상했는데 비열한 자들을 만나 비술을 이용해 겨우 달아났지요. 이런 일을 반복하다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어느 합체기 노괴가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벌써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형할 수 없는 저를 그 노괴는 영수로만 보았고 저는 이를 수락하지 않았기에 새장에 갇히고 만 것입니다.”

빙봉이 그간의 일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 합체기 노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화술에 정통해 항상 얼굴을 숨기고 다녔기 때문이죠. 그저 요족이 아닌 인족 마도 수사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인족에 이름이 알려진 합체기 마수라면 몇 명 되지 않을 텐데, 그 중 한 명이라는 소리겠습니다.”

“허나 사실 누군지는 상관없습니다. 제 목숨을 살려준 은혜가 있으니 영수로 삼으려 했던 일을 마음에 담아 둘 생각도 없고요.”

여인이 핏빛 수사를 언급하자 빙봉이 원망하는 기색 없이 답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합체기 수사라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유를 되찾으셨는데 앞으로 어찌할 요량이십니까? 요족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으십니까? 요족 중에 흑봉족이 천봉진혈을 계승한 봉황류의 천지요수라더군요. 봉 선자께서도 천봉혈맥을 지니셨으니 환영을 받지 않겠습니까?”

“흑봉족이요? 흥, 저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이 꼴로 만든 자가 바로 흑봉족의 직계자제입니다! 제가 흑봉족을 찾아간다면 호랑이 입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흑봉족이란 말에 여인의 표정이 급변하며 평정을 잃고 이를 갈았다.

“흑봉족 수사가 그런 것이라면 일이 성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럼 선자의 생각은…….”

“법력을 회복하기 전까지 잠시 한 형의 곁에 머물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인족과 요족이 유별하다지만 한 수사라면 저를 비호해주실 실력이 되지 않습니까. 낮은 수행에 빙봉의 몸을 하고 돌아다닌다면 조만 간 또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한립이 말끝을 흐리자 은삼 여인이 주저하다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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