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8화. 얼운(孼雲)과 정명단(淨明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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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양보해주시니 염치없지만 제가 먼저 나서겠습니다.”
축 수사는 담담히 호의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투실투실한 배를 내리쳐 입에서 광채 나는 하얀 병을 뿜어냈다.
“금조진화(金鳥眞火) 세 덩이입니다! 딱 만년 이상 된 금골지(金骨芝), 착맥초(錯脈草)와만 바꿀 생각입니다. 한 개당 한 덩이입니다.”
“금조진화! 어찌 저런 진령 화염을!”
“아깝지도 않단 말인가!”
이곳저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립도 아연한 얼굴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의 서령진화도 마금산맥에서 요조(妖鳥)가 지닌 약간의 금조진화를 흡수하고 위력이 크게 늘었다.
저 요족 수사가 정말 금조진화를 지니고 있고 그 양이 세 덩이나 된다면 그것으로 서령진화의 위력을 더욱 개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저 상대가 원하는 영약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축 수사가 손바닥으로 살짝 병을 내리쳤다.
휙! 휙! 휙!
하얀 화염 덩이 세 개가 병을 빠져나와 기이하게도 하얀색 까마귀 세 마리로 변했다. 축 수사 머리 위를 맴도는 까마귀들은 전신이 새하얗고 희미하게 은색 주술문자를 품고 있었다. 그 열기에 삽시간에 무대의 온도가 올라갔고 하얀 보호막이 진동했다.
“진짜 금조진화가 맞군요.”
“불 속성 신통을 수련한 수사가 얻는다면 실력이 크게 늘겠습니다.”
대청안의 수사들은 부러움과 욕심이 담긴 눈빛을 보내며 하얀 까마귀들을 살폈다. 의식이 제한되기는 했지만 연허기 이상의 수사들이 모인 터라 금조진화의 진위를 판별하는 것은 가능했다.
“희석된 금조진화가 아닌가!”
한립은 남색 빛을 번뜩여 까마귀를 이룬 금조진화의 정체를 확인하고 중얼거렸다. 워낙 조그맣게 말해 바로 뒤의 흑사시녀도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거래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그저 냉랭한 눈빛으로 무대를 주시했다.
다음으로 회포인은 연꽃 모양의 삼색(三色) 얼음 속성 보물을 내놓았다. 세 종류의 극한의 화염을 방출할 수 있어 얼음 속성 공법을 익힌 수사가 지니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거래 물품으로는 상극인 불 속성 보물을 원했다.
마지막으로 오색빛 여인은 커다란 핏빛 구슬을 선보였는데 놀랍게도 포악하기로 유명한 만황고대짐승 혈염응(血焰鷹)의 알이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합체급 신통을 지닌 혈염응 둥지에서 가져온 알이라며 영보급 보물과 교환을 원했다.
회포인과 여인에게는 빙속성 공법을 익힌 수사나 영수를 부리는데 능한 수사들이 거래를 시도했지만 축 수사에게는 말을 거는 이가 없었다.
아무리 금조진화가 마음에 끌려도 그가 거래를 원하는 재료들이 너무 희귀해서였다. 회포인과 오색빛 여인이 만족스럽게 거래를 마치자 축 수사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시종일관 나서는 자가 없자 축 수사는 한숨을 쉬고 불 까마귀들을 거둬 정자로 돌아갔다. 거래할 기회를 포기한 것이다. 이후 곧바로 다른 세 수사가 앞 다투어 무대에 올라 물건을 내놓았다.
한립은 정자에 앉아 무대에 오른 요족과 인족 수사들이 진귀하거나 신기한 물건을 거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거래에 성공한 이들은 싱글벙글했지만 실패한 이들은 실망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또한 이전에 참가했던 경매나 교환회에 비해 귀한 보물과 재료가 빈번하게 출현했다. 마겁을 대비해 당장 쓸모가 없는 보물들을 급히 처분해 꼭 필요한 것들로 바꾸려는 것이다. 아무리 진귀해도 재료나 미완성의 보물은 마겁에 무용지물이었다.
반나절이 지나 대청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준비한 물건을 선보이고 거래를 완료했다. 한립도 그중 많은 보물에 눈길이 갔지만 다들 영약이나 재료보다는 완성된 보물을 원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물론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광한계에서 구한 영약을 이용해 위력적인 진법 법기 몇벌을 바꾸었고, 홍라선주 두 병을 술을 좋아하는 요족 수사와 거래해 열댓 개의 영약 종자를 얻었다.
또한 만년 영약을 내주고 아직 구하지 못했던 요수 재료 몇 가지를 거래해 두 번째 극산 재료들을 모두 구하기도 했다. 만보대회가 끝나는 대로 두 번째 극산을 제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갑자기 새까만 기운으로 온몸을 가린 수사가 유유히 무대에 올라와 소매 속에서 새까만 사발을 꺼냈다.
“천만 요수의 혼백을 응결한 ‘얼운(孼雲)’입니다. 특별히 사나운 요수들의 혼백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얼운으로 혼돈만령방에 이름이 오른 공격형 통천령보를 거래하고자 합니다.”
그가 입을 열자 한립을 포함한 장내의 많은 수사들이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천만 요수의 혼백!’
심지어 일찍이 무대 구석으로 물러나 앉아 있던 금면인도 검은 기운 속 수사를 쏘아보았다. 칼날 같은 수사들의 눈빛을 받으면서도 검은 기운 속 수사는 태연하게 사발의 뚜껑을 열었다.
휘이잉!
순식간에 귀곡성이 울리고 새까만 구름이 소용돌이치며 사발을 빠져나와 무대 위에 자욱하게 깔렸다. 한립은 남색빛을 강하게 발산해 먹구름의 진짜 모습을 확인했다.
수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얽혀 먹구름으로 보인 것이었는데 그중에는 표범이나 호랑이처럼 익숙한 요수 그림자는 물론 괴상한 형태를 띤 그림자들도 많았다.
시시각각 모습이 변하는 요수 그림자들은 서로를 잔인하게 뜯어먹으며 흩어졌다 응결하기를 반복했다.
특수한 술법을 사용해 수십 수백의 요수 혼백을 응결한 얼운은 흔했지만 만 마리가 넘어가면 얼운의 가치는 크게 높아졌다.
응결하는 혼백의 수가 많을수록 위력이 천지차이였고 쓸모도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천만 혼백을 모은 얼운은 양족 역사상 몇 번 등장하지도 않았다.
얼운을 제련하는 법은 실전된 지 오래였고, 천만 마리 혼백을 모으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합체기 수사라도 수만 생명을 해치면 그로인한 살기(煞氣)의 반서를 이겨낼 수 없었다.
상고시대에는 천만 혼백의 얼운을 제작하는 일이 하늘의 뜻을 거스른다하여 양족의 금기 사항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이라면 눈앞의 천만혼백 얼운을 놓고 안색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곳이 흑역이 아니었다면 누군가 참지 못하고 강탈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천만 요수의 혼백이 확실합니까?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누군가 나른한 목소리로 의심을 드러냈다.
“지금은 백분의 1밖에 방출하지 않은 거니까요. 이 작은 대청 안에 전부 풀어 놓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거래할 생각이 있으시면 직접 음혼발(陰魂鉢) 속을 확인할 기회를 드릴 것입니다.”
검은 기운 수사가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혼돈만령방에 오른 공격형 통천령보는 과한 요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두 개! 아니, 세 개의 최상급 영보로 얼운을 거래할 수는 없겠습니까?”
“만령방에 오른 공격형 통천령보를 제외한 다른 물건은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누군가 다급히 물었으나 검은 기운 수사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리 딱 잘라 말하실 것은 없지요! 제가 준비한 물건을 보시면 마음이 바뀌실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리고 정자 중 하나에서 핏빛이 날아들었다. 핏빛으로 정체를 감춘 키 크고 마른 수사는 무대 위 허공에서 옥병을 던졌다.
검은 기운 속 사내는 마지못해 옥병을 받아들고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어떻습니까? 그 단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아실 테지요? 제게 얼운이 꼭 필요하지만 않았더라면 절대 내놓지 않았을 겁니다.”
“안 됩니다. 저도 통천령보가 꼭 필요해 이 자리에 나선 것입니다.”
“아니, 물건을 제대로 확인한 것이 맞습니까? 병 안에 든 것은 합체기 고비를 넘길 확률을 올려주는 ‘정명단(淨明丹)’입니다!”
옥병을 다시 돌려주는 검은 기운 속 사내를 보고 마른 수사가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쳤다.
“정명단!”
“저런 영단이 실재했다니!”
“수사 제가 다른 보물로 정명단을 거래하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 제 보물은 어떻습니까!”
정명단이란 소리에 장내가 들끓었다. 다른 수사들은 몰라도 인요족 합체기 노괴들은 너나할 것 없이 관심을 보였다. 몇몇은 규정과 상관없이 어떻게든 따로 거래하려 소리를 높였다.
이는 얼운 때보다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얼운이 아무리 신기해도 마수(魔修), 귀수(鬼修)에게나 더없을 보물이라면 정명단은 오랜 세월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는 합체기 노괴라면 누구라도 눈이 벌게질만한 성약이었다.
“누구든 정명단을 원하면 저 수사와 얼운을 거래해 들고 오시지요!”
마른 수사는 눈앞의 얼운을 반드시 얻어야할 이유가 있는지 검은 기운 수사를 노려보며 이렇게 선언했다. 그 말에 대청 안이 조용해졌다.
이곳에 모인 수사들 중에 영보를 지닌 이들은 많았지만 혼돈만령방에 오른 통천령보는 양족을 다 뒤져도 열 개가 나올까 말까였다. 그중 공격형 통천령보는 두세 개 정도일 터.
바로 그 두세 개의 공격형 통천령보를 지닌 수사가 흑역교역회에 참석해 거래를 원할 확률은 무척 낮았다. 혼돈만령방에 이름을 올린 통천령보라면 그 가치가 정명단에 못지않았다.
이때 한립도 마른 수사가 들고 있는 약병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검은 기운 속 수사는 오랜 시간 장내에 정적이 흐르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먹구름을 회수했다.
아무래도 거래를 포기하고 무대를 떠날 모양이었다.
“수사! 잠깐만 기다려주시지요!”
마른 수사가 다급한 나머지 허공을 박차고 검은 기운 수사의 앞을 막아섰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강제로라도 거래를 하겠다는 것입니까?”
검은 기운 사내가 버럭 화를 내며 사납게 소리쳤다.
핏빛 수사의 행동에 무대 한쪽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금면인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소란이 벌어진다면 대회를 주관한 흑역이 방관할 수 없었다.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십시오. 저도 얼마나 얼운이 필요하면 이러겠습니까! 제가 수사가 필요한 통천령보를 구할 방법을 생각해 볼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핏빛 수사가 서둘러 손을 저으며 해명했다.
“알겠습니다! 수사가 정말 얼운이 간절한 것 같으니 딱 일다경만 기다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원하는 물건을 구하지 못하면 더는 기다리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아까운 시간을 축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아닙니까.”
핏빛 수사가 얼운이 필요한 만큼 검은 기운 사내도 공격형 통천령보가 중요했던 것이다. 핏빛 수사는 한숨을 쉬며 저물탁에서 금빛 찬란한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예전에 어떤 상고 유적에 들어갔다 겨우 살아나온 일이 있습니다! 그때 정체모를 두루마리를 갖고 나왔는데 워낙 현묘한 봉인이 걸려 있어 아직까지 펼쳐보지를 못했지요. 금전문으로 봉인된 이 두루마리에 대단한 비밀이 숨어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이것과 정명단 한 알로 만령방에 오른 공격형 통천령보를 거래하고자 합니다!”
“금전문?”
“진선계에서 온 물건이라는 소리인데…….”
핏빛 수사의 제안에 다시금 장내가 들끓었다. 아쉬운 일은 가슴을 뛰게 하는 조건임에도 대부분이 거래할 공격형 통천령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금과문이라.’
한립도 금색 두루마리를 보며 흥미롭다는 얼굴로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자 핏빛 수사는 속이 타들어 갔다.
얼운은 이번 흑역교역회가 아니면 다시 구할 기회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필 다음번 대천겁과 천만급 얼운이 밀접한 관련이 있어 핏빛 수사는 이 거래를 놓치면 십중팔구 대천겁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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