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7화. 주머니 속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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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감정은 시간이 더욱 오래 걸렸고 한참 만에 고개를 든 금면인은 입술을 달싹여 한립에게 전음을 보냈다.
“어디서 구한 것입니까? 정확히 판단을 내를 수는 없지만 적어도 20만 년 이상 된 것입니다. 수사께서는 얼마나 오래된 영약인지 아십니까?”
전음에 들뜬 기색이 그대로 전해졌다.
“저도 그럴만한 능력은 되지 못해서요! 단약을 제련해 보아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요. 하지만 20만 년은 훌쩍 넘어서리라 보장합니다. 거래하시겠습니까?”
“햇수가 오래된 영초인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가 잘려나갔군요. 이렇게 되면 가치가 조금 떨어질 텐데요.”
“따로 쓸 데가 있어 종자를 채취해서 그런 것입니다. 제가 길게 설명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음봉초 씨앗은 원래 약성과 관련이 없지요. 어찌 되었든 저도 이렇게 귀한 영초를 제천라 하나로 거래할 생각은 없습니다. 거래를 원하신다면 성의를 보이시지요! 다른 보물도 좋고 제가 필요로 하는 재료들로 보상을 해주셔도 됩니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냉랭히 답했다.
“중대한 사안이라 다른 분들과 상의하고 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시지요.”
한립이 허락하자 금면인은 허공을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모습에 대청 안의 수사들은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금면인이 다시 전음을 보내왔다.
“제천라 외에도 본 교역회에 내놓을 예정이었던 다른 최상급 보물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허나 두 번째 보물은 수사께서 선택할 수 없고,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저희 쪽에서 대량의 영석으로 보상할 것입니다.”
“물건을 직접 보고 선택할 수 없다면 차라리 다음 보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보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요.”
그 말에 한립이 얼굴을 찡그렸다.
“음봉초로 다른 보물을 거래하고 싶으시다면 그러셔도 됩니다. 그저 다음으로 보여드릴 보물들은 흑역의 여러 장로들이 내주신 것이라 원하는 물품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또한 아무리 수사의 영약이 귀해도 두 개의 보물을 챙겨 가실 기회는 이제 없을 테고요.”
“그 말은 이후 거래할 보물들이 제천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귀하다는 뜻입니까?”
“허허, 그야 사람에 따라 관점이 다르겠지요!”
금면인은 다른 보물에 대한 정보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웃으며 얼버무렸다.
‘상대는 내가 제천라가 꼭 필요한 줄 아는군!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제천라에 딸려오는 이족 연체공법이거늘.’
한립은 냉소하며 다시 물었다.
“제천라와 같이 줄 보물이 본래 거래 예정인 물품 중 최상급이라는 것을 어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거나 던져주면 내가 큰 손해를 보게 될 텐데요.”
“그 점에 관해서는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수사의 안목에 보물의 가치를 못 알아보실 리 있습니까? 보시고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거래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수사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두 번째 보물이 무엇인지 한 번 보기는 해야겠습니다. 제가 쓸 만한 것이라면 거래하지요.”
한립이 곰곰이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태도에 두 번째 보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좋습니다!”
금면인이 금색 주머니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빛이 번뜩이고 주위를 배회하던 백사가 번개처럼 그것을 삼켜 한립에게로 돌아왔다. 한립은 백사가 뱉은 금색 주머니를 끌어와 주머니를 풀어 보고는 안을 살폈다.
“이건……!”
그는 안색이 급변하며 적잖이 놀란 듯했다. 이때 주머니 안에서 푸른빛이 번지고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안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립은 재빨리 손바닥을 펼쳐 금빛을 방출해 주머니와 푸른빛을 감췄다. 그러자 빛은 물론 이상한 소리까지 전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이걸 주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물론 그것과 제천라를 가지고 수사의 음봉초를 교환하기 위해서지요.”
금면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련을 마친 물건이라면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겠으나 이제 막 제련을 시작한 것과 다름없는 상태인데 음봉초와 거래하겠다고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제련을 마쳤다면 누가 이것을 내놓겠습니까? 완성된 보물만으로도 이런 음봉초 일고여덟 그루는 바꿀 수 있을 텐데요.”
“완성만 한다면 누구나 애지 중하겠지요. 문제는 완성까지 갈 길이 멀다는 것 아닙니까. 대재앙이 코앞인데 귀한 영초를 아무 필요 없는 물건과 바꾼다는 것이…….”
한립이 한숨을 내쉬며 고민스러운 기색으로 답했다.
“허허허! 달리말해 수사의 운이 좋아 이번 겁(劫)을 무사히 넘기고 제련을 마칠 방법만 찾으면 장래에 무궁무진한 이득을 줄 보물입니다. 흑역의 장로 중 하나가 제련을 하다가 도저히 단시간 내에 완성할 길이 없어 부득이 내놓는 것이니 다른 곳에서 구할 수도 없는 물건입니다.”
금면인의 말에 한립이 턱을 괴고 침음했다. 금색 주머니 속 물건은 인요족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보물이었다.
수사의 수련을 보조하는 기이한 신통이 있어 인요족 전체를 뒤져도 갖고 있는 이가 손에 꼽힐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아 그렇지 마겁이 임박하지 않았으면 이것만으로 충분히 음봉초를 거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천지영물인 이 보물을 완성하려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그 효과를 떠올리자 한립도 마음이 동했다. 상대가 자신이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상대도 음봉초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뜻이겠고.’
주변 정자의 수사들은 한립과 금면인 사이에 전음이 오가는 것을 보고 이번 거래가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고 파악했다.
다들 한립이 내놓은 옥갑과 금면인의 주머니에 어떤 보물이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의식이 제한되지 않았다면 벌써 여럿이 염탐을 시도했을 것이다.
“거래하겠습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한립이 오래 고민하지 않고 거래를 수락하자 금면인은 눈에 띄게 좋아했다. 금면인의 소매 속에서 금빛이 튀어나가 검은 거대 징과 보라색 망치를 감쌌다.
파앗!
거대 징이 금빛 속에서 수축해 손바닥만 하게 줄어들어 작게 변한 보라색 망치와 함께 그의 손에 떨어졌다.
이후 금면인은 두 보물을 목함에 잘 담아 검은 까마귀를 불러내 물어가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음봉초가 든 옥함을 소중하게 챙겨 넣었다.
제천라와 금색 주머니를 받은 한립도 물건을 챙기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러자 뒤에 서있던 시녀가 다시 다가와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첫 번째 거래를 마쳤습니다! 다음으로는 연기연단 재료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주 희귀한 것들은 아니지만 쓸모가 많고 시장에서 구하기 어려워 필요로 하는 분들이 많을 테지요. 수량이 많아 세 묶음으로 나눠 거래할 텐데 거래가 가능한 품목이 바뀌었으니 자세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금면인이 낭랑하게 외쳤다.
동시에 허공에 또 다른 옥간 두 개가 떠올라 빛을 발산했다. 원래 있던 목록 중 몇 가지가 사라지고 새로운 목록이 추가되었고, 다른 쪽에는 흑역이 내놓은 세 묶음의 재료 목록이 적혀 있었다.
과연 놀랄 만큼 많은 수량이었다.
대회에 참석한 수사들은 대량의 재료들을 크게 반겼고 금면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이 가진 물건을 외치며 거래가 가능한지 확인했다. 이에 순식간에 대청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재료 묶음이 아주 빨리 거래된 후, 금면인이 내놓은 물품은 하나같이 그의 견문을 넓혀 주었다.
절색의 인족 여인 7명은 전부 축기기 이상의 수행을 지녔고 합체쌍수를 하기 위해 적합한 특수 체질을 타고났다. 나이도 많지 않아 원하는 수행이 될 때까지 지원해 주면 시첩이나 노정으로 삼기에 최적의 여인들이었다.
결국 치열한 경쟁 끝에 보라색 장포의 수사가 거래 목록 중 현광철(玄光鐵)을 내놓고 그녀들을 데려갔다.
그다음으로 흑역은 특이한 양식의 노란 고대 깃발을 내놓았다.
인족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수사가 남긴 유품으로 불가사의한 신통을 지녀 초대형 진법의 진안(陣眼)으로 쓰였고 단독으로 적을 상대함에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아쉽게도 고대 깃발은 거래 가능한 물품이 딱 세 개 뿐이라 많은 이들이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잠시 후 놀랍게도 수사들 중 누군가가 그 세 가지 보물 중 하나를 내놓았다.
핏빛 기운으로 모습을 감춘 그는 금면인과 흥정을 해 거액의 영석까지 얻어낸 다음 만족스럽게 거래를 마쳤다.
그밖에도 목족과 영족 특산품들은 특수한 용도가 있어 많은 수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렇듯 흑역에서 간간이 내놓는 보물들은 명성이 자자하고 신통도 제일 처음 등장했던 제천라와 노란 깃발에 뒤지지 않았다.
방어에 뛰어나거나 공격력이 높아 실용성이 높은 것들을 위주로 해서 대청 안의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특히 마지막 한 점은 혼돈만령방 중간쯤에 이름을 올린 ‘이해선(移海扇)’이었는데 이름 그대로 바다를 옮길 정도로 위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스무 명이 넘는 수사들이 각종 재료를 산처럼 쌓으며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고 금면인은 가장 많은 재료를 내놓은 수사를 골라 그에게 몇 가지 보물을 더 뜯어내고서야 이해선과 거래했다.
한립도 부채가 마음에 들었지만 거래 가능한 재료가 영약이 아닌 진귀한 수정들이라 끼어들 틈도 없었다.
흑역이 이번 교역회를 위해 충분히 준비를 했고 수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잘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약소하지만 저희가 준비한 물품들은 전부 거래하였습니다! 남은 시간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무대에 올라 거래하시면 됩니다. 만일 저희가 필요로 하는 물건이 있을시 우선적으로 거래해주시면 감사하겠고요. 규칙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한 번에 세 명까지 무대에 올라 거래하실 수 있고 그 외의 조건은 없습니다. 이제 자유 거래를 시작합니다!”
금면인은 앞선 거래들이 성공적이라 표정이 좋아 보였고, 마무리 인사를 마치고 무대에서 물러났다.
“허허, 그럼 어디 저부터 시작해볼까요!”
금면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음산한 목소리가 들리고 검은 빛이 무대로 떨어져 내렸다. 괴이한 검은 빛에 휩싸인 회색 장포인이었다.
“성격 참 급한 분이십니다.”
“저도 껴도 되겠습니까?”
거의 동시에 여러 정자에서 빛줄기들이 날아올랐지만 무대 위 보호막을 통과한 것은 둘뿐이었다. 오색빛에 휩싸인 여인과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무대에 오른 사내였다.
‘저런……!’
그 모습에 한립이 입 꼬리를 꿈틀했다. 세 번째 수사의 모습이 너무 괴이해서였다. 종으로 보나 횡으로 보나 한 장 길이의 거대한 살덩이는 동그란 형태를 띠었고, 그 위에 평범한 사내의 머리통이 붙어 있었다.
게다가 사내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보호막으로 접근한 나머지 수사들은 퍼펑! 하는 소리를 내고 튕겨나가 보호막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나머지 수사 분들은 일단 돌아가 순서를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금면인이 그들을 향해 포권을 하고 정중히 양해를 구했다. 달갑지 않더라도 자신이 늦은 탓이니 튕겨나간 수사들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때 무대에 가장 먼저 오른 회포인(灰袍人)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유거래에서는 먼저 거래를 할수록 유리했다.
솔직히 자신이 원하는 물건이 앞 순서에서 거래되어버리면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금면인이 무대에 오른 수사를 보고 미소 지었다.
“이번에도 축 형께서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십니다! 지난번에 보물을 놓친 일이 많이 아쉬웠나 봅니다. 이리 서둘러 나서시게요.”
“지난번에 똑같은 백절주(百節珠)를 지니고도 몸이 굼떠 원하던 보물을 놓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제일 성가신 일은 사실 그것이 아닙니다. 이 몸뚱이는 어떻게 가려도 티가 나서 어떤 교역회에 참석해도 모두 저를 알아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아예 가리지도 않고 이렇게 다닙니다.”
축 수사가 푸념을 하며 더욱 울상을 지었다.
“허허, 축 형께서는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현묘한 공법을 익히시지 않았습니까. 공법의 위력을 부러워하는 수사가 많은데 그에 따르는 약간의 불편이야 감수해야겠지요.”
“제 기분을 달래주려 하시는 말씀인데도 듣기가 좋습니다. 어쨌든 이번에는 원하던 재료를 얻어 가고 싶은데 말이에요.”
축 수사는 여전히 풀이 죽어 있었고, 금면인은 슬쩍 미소를 머금고 몇 걸음 더 물러나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 축 형께서 오셨으니 먼저 거래하시지요.”
회포인도 상대가 신경이 쓰이는지 눈을 굴리다 차례를 양보했다. 한쪽의 오색빛 여수사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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