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6화. 제천라(齊天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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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피부 거한은 정자에 앉은 수백 명의 시선을 받으면서 기합을 넣었다. 그러자 그의 몸이 부풀어 터질 듯 두꺼워져 두 팔로 보라색 망치를 쥐고 거대 징을 내리쳤다.
대앵!
거대 징을 중심으로 보라색 기운이 퍼져나갔다. 그러자 거한은 곧 공기 빠진 공처럼 쪼그라져 바짝 말라비틀어진 노인으로 변해갔다. 건장한 거한이 순식간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돼버린 것이다.
조금 전 일격으로 전신의 정혈과 대량의 수명을 허비한 듯했다. 대전에 모인 이들은 안색이 달라졌지만 흑역에서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장난을 칠 리 없었다.
한립도 긴장을 하고 기다렸으나 평범한 징소리가 울리고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게…….”
그런데 다음 순간 전신의 법력이 요동치고 온몸의 피가 한층 빠르게 돌아 몸에 열이 올랐다.
한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진원의 힘으로 체내의 이상을 억누르는데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기이하게도 징소리를 듣고 법력이 조금 증가한 것이다.
한립 뿐 아니라 다른 수사들도 법력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합체기 이상은 그 차이가 미미해서 몇 달 정도 수련하면 얻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연허기 수사들은 10년쯤 수련을 한 것처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모든 수사들의 시선이 무대 위 검은 거대 징으로 쏠렸고 다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빼앗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소리를 듣기만 해도 법력을 늘려주는 보물이라니 정말 기이했다.
비록 징을 친 자의 정혈과 수명은 거둬갔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천의 보물임은 틀림없었다.
‘설마 전설 속의 현천의 보물?’
인요족 존재들은 비슷비슷한 추측을 하고 있었다. 한립도 검은 징의 존재가 의심스러웠지만 흑역은 의식 금제가 걸려있어 자세히 살필 수 없었다.
이때 무대 위 백발노인이 조심스럽게 보라색 망치를 검은 탁자 위에 올려두고 사라졌다. 그 대신 은색 비단옷을 걸치고 금색 교룡 가면을 쓴 사내가 나타났다.
금면인(金面人)이 헛기침을 해 모두의 시선을 모으고 입을 열었다.
“허허, 모두 ‘제천라(齊天鑼)’의 효과를 직접 느끼고 계실 겁니다. 이 징소리는 흑역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제천라가 이번 교역대회에서 거래될 첫 번째 보물이기도 하고요.”
“뭐라고요? 정말 그걸 거래에 내놓는단 말입니까!”
“제가 만족할 만한 보물을 내놓는 분과 제천라를 거래하겠습니다.”
“그것참 이상합니다. 노부가 흑역대회에 참가한 것이 몇 번째인데 이렇게 귀한 보물을 처음부터 내놓는 경우는 처음입니다. 곧 발생할 재난을 대비해 무리하는 것은 아닙니까?”
노쇠한 목소리가 정자 가운데에서 들려왔다. 한립은 상대가 일컫는 재난이 마겁이라는 것을 알아들었다. 이곳에 모인 존재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수사의 말씀대로 인요족의 마겁을 미리 대비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허나 제천라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으시군요. 신기한 신통을 지니고는 있지만 수사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대단한 보물은 아니고 약간의 하자가 있는 물건입니다. 아마 앞으로 선보일 몇 가지 보물들이 훨씬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하자를 말씀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설명해주세요! 설마 현천의 보물이 아니라는 뜻입니까?”
또 다른 목소리가 실망을 담아 물어왔다.
“하하, 저희 흑역이 현천의 보물을 지니고 있을 리 있겠습니까. 삼황칠왕은 물론이고 양족의 두 대승기 존재들도 현천의 보물은 없을 텐데요. 현천의 보물이 어쩌다 양족의 수중에 떨어지는 날에는 멸족의 화를 부를 겁니다. 수백 년 전 천연성의 이종족 침공도 다 그 때문이 아니었던지요?”
금면인은 의미심장하게 관중을 훑어보고 말했다.
“허나 제천라를 내놓고 그 내력을 설명 드리지 않을 수야 없지요. 이 보물은 약간의 천지법칙을 함유하고 있어 불가사의한 위력을 냅니다. 만황의 멸족된 이종족 금지에서 찾았을 당시 이미 상당히 부서져 있었지만요.
그곳에 적힌 이종족 문자를 해석해 보니 원래는 다른 보물과 한 쌍으로 멸족된 이종족의 보물이었다고 합니다. 제천라 외에 징을 칠 수 있는 망치, 진천퇴(震天槌)까지 갖추어져야 진정한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이죠.
그곳을 샅샅이 뒤졌지만 안타깝게 진천퇴는 찾지 못해 나중에 어떤 연기대사가 갖은 고생 끝에 심해의 자금동모(紫金銅母)와 다른 진귀한 재료들을 가지고 모조품을 만들어냈으나 위력이 진품의 1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제천라 자체는 필요한 재료가 너무 특수해 아직까지 전혀 수리를 하지 못하고 있고요. 만일 제천라와 진짜 진천퇴가 같이 있었으면 현천의 보물에 못지않았을 겁니다.”
“그게 현천의 보물이 아니라도 상관없으니 구체적인 신통과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차분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연히 알려드려야지요. 징소리가 법력을 증진해 주는 것은 모두 보셨을 겁니다. 그러나 이런 효과는 화신기 이상의 수사에게만 나타납니다. 화신기 수사는 30년 수련을, 연허기 수사는 10년 수련을, 그리고 합체기 수사는 몇 달간의 수련 시간을 아낄 수 있지요. 또한 징소리는 동일 인물에게 단 세 번밖에 효과가 없고 동시에 징소리를 듣는 수사들의 수가 너무 많으면 법칙의 효과가 대폭 감소…….”
금면인은 제천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정자 속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사들 중 대다수가 고개를 저으며 눈빛이 이전과 달라졌다.
“게다가 징을 울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반드시 연체사를 선발해 특수한 이종족 공법을 수련하게 해야 합니다. 제천라가 불완전한 상태라 징소리로 다른 수사들의 법력을 증진시키는 대신 그 연체사는 법칙의 힘에 반서를 당해 정혈과 수명이 유실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지요. 시간을 들여 전문적으로 역사(力士)들을 양성하는 게 성가시기는 하지만 문하의 제자들이 많은 수사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금면인이 드디어 소개를 마쳤고, 한립은 슬쩍 눈썹을 끌어올리고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제천라 자체는 그에게 큰 쓸모가 없었지만 연체사가 익혀야 한다는 이종족 공법은 흥미로웠다.
“그래서 어떤 보물로 거래할 생각이십니까? 평범한 물건으로는 안 될 텐데요.”
조용하던 대청 안에서 누군가 소리를 내 물었다.
“제가 원하는 여러 물건들 중 한 가지라도 내놓으실 수 있다면 이 보물을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만일 아무도 그런 물건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극품영석이나 천년 이상 된 대량의 영약으로 거래를 해야 할 테지만요. 아마 영석과 영약으로 거래하게 되면 그 수량이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정말입니까?”
“제가 이곳에 서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요. 이게 교환을 원하는 목록이니 살펴보시면 됩니다.”
금면인이 하얀 옥간을 허공에 띠웠고 그 안에서 우윳빛 빛기둥이 흘러나와 무대 위에서 은색 고대문자로 변했다. 백가지가 넘는 다양한 물품들이었다.
“석 냥 이상의 지음정(地陰晶), 석 장 이상의 설령목(雪靈木), 십만 년 이상 된 벽혈과(碧血果)…….”
조용히 허공의 목록을 중얼거린 한립은 깜짝 놀랐다.
무대 위의 목록은 전부 영계에서 극히 구하기 힘든 재료들이었다. 한립은 목록을 보면서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3장이나 되는 설령목은 없어요. 하지만 그보다 작은 것은 있는데 영석으로 보충해 징을 거래할 수 있나요?”
아까부터 관심을 보이던 여 수사였다.
“그건 안 됩니다. 설령목의 크기가 아주 중요해서 원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쉽게 되었네요. 제천라를 꼭 갖고 싶었는데 포기해야겠어요.”
“목록에 없는 다른 재료로 거래는 아예 불가능한 겁니까?”
구석진 정자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물어왔다.
“원칙적으로 가능은 합니다만 저희는 필요로 하는 재료만 사들여서요. 게다가 거래하시려는 물품 이상의 가치를 지녀야 하니 웬만한 물건으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거래가 될지 확인해 주시지요!”
이번에는 정자 하나에서 새하얀 학이 검은 목함을 물고 날아올라 우아하게 무대의 보호막으로 다가갔다. 금면인이 무슨 수를 써두었는지 백학(白鶴)은 보호막을 통과해 목함을 떨구었다.
금면인이 검은 목함을 열어 확인하는 동안 백학은 무대 위를 떠돌며 떠나지 않았다. 금면인은 목함 속 물건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지만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백학 주인은 상대가 물건을 감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재촉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면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것으로도 안 된단 말입니까?”
“평소였으면 목록의 다른 재료들과 맞먹는 가치를 지녔을 물건입니다. 하지만 이걸 제대로 써먹으려면 만여 년은 걸릴 텐데 마겁이 천 년 내에 도래하지 않습니까. 지금 필요한 재료가 아니라면 차라리 영석이나 영약이 나을 것입니다.”
금면인은 완곡하게 거절하고는 목함을 닫아 백학에게 던져 주었다. 백학은 날카롭게 울며 그것을 물고 보호막을 벗어나 주인에게 돌아갔다.
“참으로 아쉽게 되었습니다!”
“재료를 지니신 분이 없다면 극품영석과 천년 이상 영약으로 거래하겠습니다.”
더는 아무도 나서지 않자 금면인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차피 큰 재난을 앞두고 있으니 대량의 극품영석과 영약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금면인이 장내를 둘러보고는 무어라 말하려는데 어디선가 굵은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게 거래할 물건이 있습니다. 목록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한 것으로요. 한번 보시겠습니까?”
한립 뒤에서 어깨를 주무르던 11호 시녀가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방금 말을 꺼낸 이가 바로 한립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검은 옥갑을 허공에 띠우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든지요! 아무리 귀한 보물이라도 절대 수사께서 손해 보지 않는 거래가 될 것입니다.”
금면인이 희색을 드러내며 답했다. 이에 한립이 미소를 짓고는 소매 속에서 하얀 뱀이 튀어나와 한입의 옥갑을 삼키고 무대로 향했다.
“엇!”
보호막 안으로 진입한 백사(白蛇)를 훑고 금면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눈앞의 뱀은 영수가 아니라 꼭두각시였다.
백사가 금면인을 향해 검은 옥갑을 뱉어냈다. 안 그래도 꼭두각시를 신기하게 보던 금면인은 옥갑 안의 재료가 더욱 기대가 되었다.
조심스럽게 옥갑을 열자 그 안에서 검은 빛구슬이 떠올랐고, 빛구슬은 은빛찬란한 영초를 품고 있었다.
“음봉초(陰鳳草)!”
금면인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그리고 바로 금면인의 귓가에 한립의 전음이 들려왔다.
“맞습니다. 거기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자랐을지 모르는 몇 십만 년 된 음봉초라 약성이 무척 강하겠지요. 귀하가 원하던 칠만 년 이상의 음봉초보다 훨씬 귀한 물건입니다.”
“몇 십만 년!”
그의 말에 금면인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서둘러 의식을 방출했다. 그 모습에 한립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 영초는 광한계 금제 유적 속 약재 밭에서 찾은 여러 영약 중 하나였다. 대부분을 뇌명대륙의 천운 합체기 존재들과 거래하고 종자로 쓰려고 단 한 그루밖에 남겨두지 않았다.
다행히 씨앗으로 재배하는 종이라 천연성으로 돌아가 특수한 비술로 종자를 채취해 두었다. 씨앗을 얻고 남은 음봉초는 아직까지 쓸 데가 없어서 갖고 있었는데 제천라를 거래할 수 있는 재료 목록에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금면인의 목록에 음봉초가 없었다면 그도 굳이 제천라를 고집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상대가 콕 집어 원한 영약이니 고가에 거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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