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5화. 흑사(黑紗) 시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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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빛이 반짝이고 흑포인이 괴이하게 다섯 수사 앞에 나타나 조용히 전방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몸을 감싼 검은 기운이 빛을 발하며 무형의 힘에 의해 흑포인에게 끌려갔다.
나머지 네 명의 수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립은 소리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견인 사자라는 이름 그대로 그는 그들을 끌고 가고 있었다.
검은 기운이 현묘한 작용을 하는지 주변의 검은 기류도 그들을 피해 흩어졌다. 한립은 이동하던 도중에 전방의 검은 안개를 보며 눈동자에서 푸른빛을 일렁였다.
이전에 느낀 요수들과 비슷한 기운을 지닌 방대한 물체가 안개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합체기 수사들도 위압감을 느낄 만큼 강력한 존재였다.
검은 기운 때문에 영목신통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희미하게 커다란 짐승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거대 구렁이 같았다.
다른 네 명의 수사들도 전방의 괴물을 감지하고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보냈는데 견인사자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아래로 하강했다. 거대 괴물이 있는 쪽으로는 더 가까이 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립의 표정이 더욱 묘해졌다. 견인 사자에게 이끌려 한참을 떨어지고 있는데도 바닥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마치 끝이 없는 심연처럼 검은 기류로 이루어진 허공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만여 장을 더 내려가자 드디어 검은 기류가 흩어지고 새까만 운해를 빠져나왔다. 아래쪽은 남색빛으로 휩싸인 괴이한 세계였다.
수많은 건물들과 거대한 바위 같은 검은 나무들이 남색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남색빛 속에는 열댓 개의 거대 구슬이 떠서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빛을 발산했다.
퐁! 퐁! 퐁!
한립과 수사들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터지고 그들을 이끌던 괴이한 힘도 사라졌다.
“난 다른 수사들을 데려와야 하니 흑역대전(黑域大殿)으로 가서 안내를 받으면 됩니다.”
흑포인은 말을 마치고 곧장 고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한립은 어이가 없었지만 만골진인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래로 내려갔다.
금빛 수사마저 웃음을 흘리고 둔광을 일으켜 날아가자 허공에 남은 한립과 나머지 수사들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래의 건물들은 외부세계와 큰 차이가 있었다. 거대한 검은 돌을 거칠게 파내 만든 것으로 기이하게 컸고 상고시대의 야만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다섯 수사가 흑역대전 앞 광장에 내려서자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기다리고 서있었다.
그들은 검은 천으로 얼굴 대부분을 가렸지만 매혹적인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지녔고 대부분이 결단기 이상의 수사들이었다. 원음지기(元陰之氣)가 물씬 느껴지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쌍수를 위한 최상의 노정이었다.
가장 앞쪽에 선 다섯 명의 여인들이 고운 자태로 서둘러 다가왔다.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이제 저희가 선배님들을 모실 것이니 궁금한 점이나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아직 교역대회까지 시간이 남았는데 일단 휴식을 취하실 수 있게 방으로 모실까요?”
“흑역에서 별 사특한 짓을 다하는구나! 이런 접대는 필요 없으니 곧바로 대전으로 안내하거라.”
기분이 상한 듯 쏘아붙인 푸른 연기 속 목소리는 여인의 것이었다.
“필요치 않으시다면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9호, 네가 선배님을 대전으로 안내해 드리면 된다.”
늘씬한 흑사(黑紗)시녀가 가볍게 웃고는 뒤를 돌아 분부했다.
“선배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9호 흑사 시녀가 공손히 예를 올리고 대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푸른 연기의 수사는 대답 없이 냉랭한 눈빛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허허, 노부도 휴식은 필요 없으니 저 선자분과 마찬가지로 대전 안으로 안내해주게.”
초록빛 인영도 웃으며 말했는데 노쇠한 목소리가 상당히 나이가 많은 것 같았다. 이제 광장에는 한립을 포함한 세 명 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허허, 이 좋은 일을 다들 마다하다니! 저는 무슨 성인군자가 아니라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만골진인이 크게 웃고는 변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늘씬한 흑사시녀가 명을 내릴 것도 없이 가장 풍만한 흑사시녀를 골라 성큼성큼 사라졌다.
“흐흐, 누군지 모르지만 나와 마음이 맞는 분이 또 계셨구만! 네가 이들을 이끄는 것으로 보아 미색도 가장 뛰어나겠지. 네가 나를 모시면 된다.”
금빛 수사가 남은 흑사시녀를 훑고는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저를 그리 봐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11호, 네가 남은 선배님을 모시거라.”
늘씬한 흑사시녀는 전혀 놀라지 않고 금빛 수사를 안내해 자리를 떠났다. 한립이 멀리서 대기 중인 흑사시녀들을 보다가 눈앞의 여인을 보고 턱을 긁적였다.
“네가 11호라고? 아직 도착한 수사분들이 몇 되지 않는 것이더냐?”
그의 목소리도 굵고 탁해 전혀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오해십니다, 선배님. 먼저 오신 선배님들을 모시는 동료 중에는 20호대나 30호대도 많습니다. 번호순으로 선배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서요.”
11호 흑사시녀는 체구가 아담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아주 듣기 좋았다. 가련한 눈빛으로 한립을 올려다보는 것이 누가 보면 애원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구나. 휴식은 필요 없으니 나를 따라 대전으로 가자. 네게 물을 것이 있다.”
“예, 선배님!”
한립은 거침없이 여인의 허리에 손을 얹고 흑역대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네 명의 수사들이 정체를 숨기고 나타나 흑사시녀들의 환대를 받았다.
* * *
일다경 후, 한립은 널따란 의자에 반쯤 앉아 품에 11호 시녀를 안고 있었다. 그는 지금 푸른 안개로 온몸을 가리고 있어 만골진인이라고 해도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있는 검은 정자에는 향기로운 차와 희귀한 과실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이런 정자가 허공에 대략 5, 6백 개는 떠 있었다.
대부분이 아직 비어있었지만 수십 개는 이미 한립처럼 흑사 시녀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다른 정자가 아니라 대전 한가운데의 우윳빛 거대 보호막을 살펴보고 있었다.
보호막으로 둘러싸인 네모난 무대는 옥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가운데에 황금색 진법이 펼쳐져 있었다. 진법 안에는 검은색과 하얀색의 탁자가 나란히 놓여 있을 뿐이라 딱히 살필 것도 없었다.
“네 말대로라면 교역대회가 시작할 때 흑역에서 먼저 진귀한 물품을 내놓는다고?”
한립은 시선을 돌려 품 안의 여인을 보았다.
“물론입니다. 저희 흑역이 인요족 중 제일 부유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삼황칠왕에 뒤지지 않습니다. 전문적으로 만황세계 이종족에게서 구입해오는 것도 있으니 절대 선배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흑사시녀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검은 천을 치워버린 시녀는 사내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매혹적인 얼굴로 행동 하나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미혼술과 관련한 특수 공법을 수련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립은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기기는커녕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너희 같은 시녀들을 대량으로 양성하는 것만 보아도 재력은 넘쳐 보이는구나. 헌데 이렇게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들이 외부에서 활동을 했다면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선배님의 예측대로 저희 자매들은 어릴 때부터 흑역 안에서만 생활해왔습니다. 외부에는 나가볼 일이 없지요. 괜찮으시다면 저를 선배님의 시첩으로 삼아주시면 어떻습니까? 그래야 저도 이곳을 나가볼 수 있을 텐데요.”
11호 여인이 아주 가련한 눈빛을 보내왔다. 평범한 수사였다면 동요했을지 모르나 강대한 의식을 지닌 한립은 ‘누가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로 가볍게 거절해 버렸다.
그 뒤로 11호 여인은 분별 있게 다시는 시첩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대신 한립의 가슴에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한립은 거부하지 않고 여인의 허리를 살짝 끌어당긴 다음 흑역교역회에 관한 다른 세부적인 사항을 물었다.
그가 여인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있는 동안 주변의 빈 정자에도 점점 정체 모를 수사들이 늘어났다.
쿵!
뜬금없이 들려온 굉음에 한립이 눈에서 남색빛을 번득였다. 그리고 곧 대전 입구에서 화염에 둘러싸인 거인(巨人) 곁에 있던 흑사시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화염 속 거인은 무척 화가 났는지 거대한 손으로 흑사시녀를 쳐 죽이려 들었다. 그 순간, 인근 허공에 파문이 일고 금색 검기가 거인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챙!
거인은 어쩔 수 없이 흑사시녀를 내버려 두고 금색 검기를 쳐내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거인의 머리 위에서 물결처럼 파문이 일고 회색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니 회색 장포를 입고 악귀 가면을 쓴 누군가가 화염 거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요족 수사분께서 무슨 일로 화를 내십니까? 37호, 귀빈에게 무례를 범하다니 당장 사과드리지 못할까!”
모두의 예상과 달리 회영인(灰影人)은 거인이 아니라 흑사시녀를 질책했다.
“제가 선배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요, 선배님.”
막 죽다 살아난 37호 여인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이번 한번뿐이다. 다시 본 족이 금기시하는 행동을 한다면 널 산채로 삼켜버릴 것이야.”
화염 거인도 회영인의 일검을 맞고 정신이 들었는지 노기를 가라앉히고 싸늘하게 경고했다.
다음 순간 주변의 화염이 밀려들어 거인은 평범한 체구를 지닌 붉은 장포 사내로 변했다. 그는 붉은 기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머리에는 새빨간 뿔이 솟아 있었다.
회영인은 37호 흑사시녀와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는 미안하다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37호가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식견이 얕고 수사의 내력을 몰라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더 영민한 아이를 불러 수사를 시중들게 하겠습니다.”
“알아서 하시고 교역회나 빨리 시작하시지요. 흑역에서 오래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붉은 장포 요족 수사가 거대한 불덩이로 변해 비어있는 정자 중 하나로 날아올랐다. 회영인이 그것을 보고 바닥에 엎드려 있는 시녀를 물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립은 붉은 장포 요족 수사가 분노한 원인이 궁금했지만 일이 해결되었으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때 품속의 여인이 얌전히 일어나 그의 어깨를 주물렀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한립의 강대한 육체의 피로가 풀릴 리는 없겠지만 여인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와 부드러운 손길이 나쁘지 않았다.
장장 3시진이 흘러 허공 정자 대부분에 수사들로 들어찼다. 4, 5백 명의 수사들 중 합체기 노괴는 백 명도 되지 않으니 나머지는 귀한 보물을 지닌 연허기 수사라는 소리였다.
이렇게 많은 수사들이 모였지만 다들 냉담한 표정으로 홀로 앉아 있거나 차를 즐길 뿐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없어 대전 안은 괴이하게 고요했다.
파앗.
또 반 시진이 흘렀을 때 돌연 백옥 무대에 금빛이 번득이고 금색 진법 한쪽에 검은색 거대 징과 녹색 인영이 나타났다.
사람 키만 한 거대 징은 표면에 화려하게 문양이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는 눈이 하나뿐인 검은 교룡이 그려져 있었다.
같이 나타난 녹색 인영은 웃통을 벗은 채 보라색 망치를 들고 있었는데 전신이 녹색으로 빛나 평범한 인족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요족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녹색 피부에 은은하게 금색 광택이 흘러 특수한 연체 공법을 익힌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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