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4화. 견인사자
*
“자네는…….”
거처로 돌아온 한립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녀를 보고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흑봉왕 곁에 있던 ‘대아’라는 요족 여인이었다.
아직 화신 초기였지만 뛰어난 자색과 재능으로 흑봉왕의 아낌을 받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립이 궁금한 점은 상대가 예전에 만났던 대아라는 소녀와 동일인인가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나를 찾아온 것은 소 수사의 명을 받아서인가?”
“아닙니다. 제가 한 선배님을 뵙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나를?”
“예, 선배님. 괜찮으시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자삼 소녀는 옆에 선 해대소를 힐끔 쳐다보았다.
“너는 물러가 있거라. 부르기 전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고.”
소녀의 몸짓에 한립은 해대소에게 명을 내려 그를 내보냈다. 그의 또 다른 기명제자 기령자는 농 가와의 일 때문에 다른 수사 앞에는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이제 한립과 둘만 남은 자삼 소녀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하얀 손수건을 꺼내 바쳤다. 그것을 본 한립의 표정이 달라지며 탄식했다.
“대아, 네 녀석이 맞았구나!”
저계 영기인 손수건은 그가 대아에게 주었던 물건이었다. 먼지가 쌓이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별 다른 신통도 없는 물건이었는데 아이가 한참을 좋아하며 웃었던 기억이 났다.
자삼 소녀는 한립의 말에 복잡한 얼굴을 하며 돌연 머리를 올리고 있던 검은 봉잠(鳳簪)을 뽑았다. 봉황이 새겨진 검은 비녀가 검은 색 깃털로 돌아간 순간, 자색 소녀의 얼굴에서도 하얀 빛이 반짝였다.
너무 강렬한 빛에 영목신통을 지닌 한립조차 순간 눈을 감았다 떴다.
‘이럴 수가…….’
남색빛을 일렁이며 소녀의 얼굴을 바라본 그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전설 속 월궁에 산다는 선자처럼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절색의 얼굴이 남궁완을 상당히 닮았다는 것이었다.
난초처럼 우아한 분위기에 맑은 기운을 지닌 여인은 남궁완과 친자매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대아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한립은 여러 차이점들을 찾아냈다.
남궁완은 온화하고 살가운 인상이라면 자색 소녀는 이목구비가 더 오밀조밀하고 차가운 느낌이 있었다.
그는 명청령안을 극성으로 발휘해 이게 소녀의 진짜 얼굴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남궁완을 닮은 얼굴에 신기하게도 어릴 때 ‘대아’의 모습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익숙하면서도 너무 낯선 얼굴에 한립은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아저씨, 제 모습이 남궁 아주머니와 많이 닮았나요?”
“이게 어찌된 일이더냐. 설마 완이를 만난 적이 있더냐?”
“이름은 아저씨께 들은 것이고, 직접 만날 기회는 당연히 없었지요.”
“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기억났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이건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한립은 가볍게 미소 짓는 소녀를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오래 전 저를 데리고 돌 더미 아래 숨어 지내는 동안 아저씨께서 제게 신기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셨지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사실 아저씨와 남궁 아주머니인 것을 지금은 압니다. 마지막 날 제가 어머니가 보고 싶다며 너무 울자 달래주기 위해 아주머니의 초상화를 새긴 옥패를 쥐어주셨고요.”
옛 기억을 회상하며 자색 소녀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때는 네가 한참 어렸었지. 굉장히 귀여웠고.”
그 말에 한립도 어린 여자 아이와 돌더미 밑에서 숨어 지낸 나날을 떠올리고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기억은 아직도 선명합니다. 하지만 화형기(化形期)에 이르러 흑봉의 피를 깨우며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는데, 어째서 남궁 아주머니를 닮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당시 옥패에 새겨진 모습이 너무 예뻐서 인상이 깊었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화형 후의 모습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자색 소녀가 입술을 깨물고 미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랬구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한립은 드디어 상황을 이해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너무 이상했다. 낮에는 진소인이 심환대법으로 남궁완의 모습을 꾸며내 가슴을 철렁하게 하더니 이제는 비슷한 외모의 소녀가 나타나다니.
‘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수도의 길을 걷는 자로서 운명이나 징조 같은 것을 어느 정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아의 말이 이어졌다.
“아저씨께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지만, 인족과 요족이 유별하니 괜히 아는 척을 하면 아저씨께 성가신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었어요. 그래서 처음 뵌 날은 모른 척 했던 것입니다. 당시 흑봉궁에 가던 날, 사실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소녀는 그를 모른척 했던 이유를 설명하며 그동안 흑봉족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털어놓았다.
소녀는 사소한 일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잘 풀어갔고 한립은 남궁완을 닮은 소녀를 바라보며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몇 시진을 쉼 없이 떠들어댄 대아는 갑자기 무엇이 생각났는지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대소를 불러 소녀를 영선궁 밖까지 배웅하게 한 한립은 대청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해대소가 소녀를 배웅하고 오자 한립이 표정을 가다듬고 담담히 분부를 내렸다.
“사제를 불러 내 방으로 오거라.”
말을 마친 그는 침실로 걸어갔고 해대소는 신이 난 모습으로 기령자를 찾아 뛰어갔다.
* * *
이튿날 아침, 거처를 떠난 한립은 영선궁에서 머지않은 작은 산에 도착했다. 깨끗한 바위를 찾아 자리를 잡은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한식경 후, 파공음이 들리고 누군가 작은 산으로 날아들었다.
“한 수사, 먼저 와계셨습니다! 이번 흑역교역회에 기대가 큰 모양이십니다.”
먼저 알은체를 한 노도사는 만골진인이었다.
“하하, 조금 기대를 하고 있기는 합니다. 처음 참가하는 것인데 늦을 수야 없지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출발 전에 따로 당부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 수사께서 괜히 그곳에서 불편한 일을 당하지 않게 말입니다.”
“귀담아 들을 테니 말씀해 주시지요.”
“다른 것들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헌데 흑역교역회는 다른 일반적인 교환회와는 달라서요.”
만골진인은 한립의 겸손한 모습에 흡족해하며 입을 열었다.
노도사는 흑역교역회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에 대해 알려주었고, 일다경이 지나자 어슴푸레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빙긋 웃었다.
“시간이 되었으니 함께 입구로 가시지요! 흑역교역회로 가는 입구가 많아 우리가 가는 곳도 기껏해야 네다섯 명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가기 전에 얼굴을 가리는 것이 좋은데 흑역교역회에서는 의식 금제가 걸려 있어 간단한 방법으로도 다른 이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습니다.”
“조언 고맙습니다, 만골 수사.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립은 미소를 지으며 원자신광을 일으켜 온몸을 가렸고, 만골진인 역시 수결을 맺어 검은 기운으로 몸을 가렸다. 그리고 그들은 구선산 밖 어딘가로 날아갔다.
* * *
같은 시각 구선산 곳곳에서 합체기 노괴들과 몇몇 수사들이 조용히 이동해 여러 방향으로 날아갔다.
몇 시진 후 날이 밝아왔고 한립과 만골진인은 구선산을 벗어나 황량한 산골짜기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곳에는 이미 두 명의 수사가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화려한 금빛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푸른 연기로 변해 정체를 알 수 없었는데 서로 멀찍이 떨어져 한립과 만골진인이 온 것을 보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한립은 그들을 의식으로 훑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 노도사가 의식으로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려 들면 다툼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명청령안으로 살피면 저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만일 상대가 특수한 비술을 익히고 있다면 금방 들통 날 것이다.
그와 만골진인도 적당한 곳을 찾아 따로 떨어져 휴식을 취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전부 정체를 숨기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기에 황량한 바람 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립이 눈을 가늘게 뜨고 시간을 가늠하려는데 멀리서 파공음이 들려오더니 초록빛이 별동별처럼 떨어져 내려 지면을 코앞에 두고 멈추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자리를 잡았다. 이에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만골진인은 초록빛 속 인영을 보고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미간을 좁혔다.
우웅-
반 시진이 흘렀을 때 한립의 소매 속에서 기이한 파동이 느껴졌다. 손바닥 크기의 새까만 삼각 영패가 하얀 기운을 방출하며 무언가와 감응하는 듯했다. 한립이 고개를 들으니 다른 수사들도 똑같이 생긴 영패를 꺼내들고 있었다.
쿠릉!
이때 산골짜기 위에서 강렬한 공간 파동이 생겨났다. 이에 아래의 다섯 수사들이 고개를 들자 맑던 하늘에 갑자기 검은 구름들이 몰려들어 은색 뇌전을 번득였다.
콰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려치고 그 안에서 은색 거대 문이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문 주위로 은색 주술문자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놀라운 광경이었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지켜보았다.
은색 거대 문 주위의 주술문자들이 흔들리더니 천천히 문이 열렸고, 그 틈으로 검은 실 같은 것이 빠져나와 검은 장포로 온몸을 가린 수사로 변했다.
괴이한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그 자는 냉랭히 아래쪽 수사들을 지켜볼 뿐 말이 없었다. 흑포인을 살펴보던 한립은 내심 가슴이 서늘해졌다.
흑포인이 내뿜는 기운이 어느 순간에는 굉장히 강했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아주 미약해져 제대로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특수한 공법을 익힌 것인가.’
한립이 이런 추측을 하고 있을 때 금빛 수사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당신이 흑역교역회의 견인 사자입니까?”
“이곳에 모였다면 모두 견인령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겁니다. 견인령을 지니고 있는 자는 내 직접 견인문(牽引門)을 열어 흑역교역회로 안내할 것이고, 없는 자는 죽일 것입니다.”
흑포인은 금빛 수사의 말을 무시하고 살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는 정체는커녕 성별조차 분별할 수 없었다.
금빛 수사가 흑포인의 태도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대놓고 토를 달지는 않았다. 수사들이 아무 말 없자 흑포인은 은색 북채 모양의 법기를 꺼내 거대 문을 내리쳤다.
댕-!
맑은 소리가 울리고 거대 문이 활짝 열렸다. 그 안은 흑역(黑域)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두컴컴하고 빛이라고는 없는 암흑세계였다.
돌연 견인령이 뜨겁게 변해 펑, 하고 터졌고 검은 기운으로 그를 감쌌다. 동시에 그는 강력한 힘에 의해 은색 거대 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처음에는 흠칫 놀랐으나 주위를 둘러보니 나머지 네 명도 검은 기운에 휩싸여 떠오르고 있어 안심했다.
흑포인은 그들이 거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북채 법기로 거대 문을 두 번 두드리고 자신도 안으로 뛰어들었다.
쿠릉!
은색 거대 문이 서서히 닫히자 천둥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 * *
한립은 어둠 속에서 호기심 어린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은색 거대 문안에 들어가고 검은 기운에 휩싸인 다섯 수사는 일렬로 허공에 떠 있었다.
주변을 흐르는 검은 안개는 평범해 보였지만 간혹 그 안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해 소용돌이를 형성하는 것이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립은 의식으로 검은 안개 속에 있는 기괴한 요수의 기운을 감지했다. 그 수는 많지 않아도 기운이 남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