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2화. 성도(聖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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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선배님 제발!”
짙은 눈썹 노인과 막 정신을 차린 병약한 청년이 동시에 소리쳤지만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노부인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숨이 끊기려는데 또 방밖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짱이 대단하십니다. 홀로 본 노조가 머무는 곳에 쳐들어와 살생을 저지르려 하시다니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에서 천둥소리가 울리고 보라색 거대 손이 겹겹이 쌓인 금제를 뚫고 떨어져 내렸다.
“농 노괴!”
거대 원숭이는 흉악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노부인을 던져 버리고 한 손으로 보라색 거대 손을 막고 다른 손으로는 기령자를 끌어왔다.
콰쾅!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금색과 보라색 빛덩이가 충돌해 사방으로 영기의 압력을 발산했다. 눈부신 빛 속에서 금빛 인영이 화살처럼 튀어나가 어느새 멀리 벗어나 있었다.
“어딜 가려느냐!”
보라색 거대 손의 주인이 차갑게 소리치고, 보라색 빛줄기가 금색 거대 탑 지붕을 빠져나왔다. 속도에서 금색 빛줄기를 조금 앞서는 듯했다.
엄청난 기운과 소음에 성 안의 수사들이 놀라 무수히 많은 둔광이 하늘로 떠올랐다. 하지만 금색 인영과 보라색 빛줄기가 앞 다투어 성벽을 빠져나간 후였다.
콰르르릉! 쿠쾅쾅! 콰쾅!
농 가 수사들이 안개 속으로 추격하려는데 멀리서 연달아 폭음이 들려왔다. 노호성이 오가고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강력한 기운 두 줄기가 안개 속에서 치솟아 변신을 하는데 희미하게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농 가 수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들은 안개 속에 농 가 노조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상대편 수행을 대강 파악했다.
‘합체 후기 성계 수사!’
합체기 수사들끼리의 싸움에 휘말렸다가는 화신기나 연허급 수사들이라도 파리처럼 죽어나갈 수 있었다. 이때 농 가 가주도 노기를 띤 얼굴로 안개 속을 주시하며 고민에 빠져 있었다.
“하하, 농 가주. 내가 나서서 두 분을 떼어 놓길 원하는가?”
듣기 좋은 여인의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흠칫 놀란 중년인이 고개를 돌리자 황포 소녀가 고고히 떠서 미소 짓고 있었다.
만보대회 경매에 나타났던 기령족 천추성녀였다.
“천추 선배님도 오셨습니까? 선배님께서 저자를 제압해 주신다면 감사할 것입니다.”
“제압? 그건 나와 농 수사가 힘을 합쳐도 불가능한 일일세. 게다가 내 아무리 농 가와 친분이 있어도 아무 이유 없이 합체기 수사와 척을 질수는 없지. 내가 말한 것은 싸움을 말려보겠다는 것이네.”
천추성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싸움을 말려주시는 것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부친께선 근간에 원기를 상한 일이 있으셔서 강적과 싸우실 상태가 아닙니다.”
“알겠네. 가주의 뜻이 그렀다면……. 이런, 내가 나설 필요가 없겠구만!”
중년인을 향해 미소 짓고 있던 천추성녀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려 안개 속을 응시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
농 가 가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땅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경천동지할 굉음과 짐승의 포효소리가 터져 나왔다.
영기의 파랑이 무서운 기세로 덮쳐와 농 가 수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수행이 높은 이들은 법보를 방출해 앞을 막았고 수행이 낮은 이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성벽 뒤로 몸을 숨겼다.
천추성녀는 파랑이 지나든 말든 미동도 없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자욱하던 하얀 안개가 걷히자 모두가 고공에 뜬 거대한 인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작은 산만한 금털 원숭이가 한 손에 인족 수사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금면(金面) 중년인이 떠있었다.
금년 중년인은 평소와 달리 머리에 금색 용 뿔이 솟아 있고 뺨에는 금색 비늘이 돋아나 맨손으로 거대 원숭이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그 밑의 지면은 움푹움푹 파여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역시 합체 후기를 대성한 존재는 다릅니다. 육신의 힘만으로 나와 겨루다니 진령제일세가의 명성이 헛되지 않아요. 그렇다고 나를 붙들어 둘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리시지요, 농 노괴!”
금털 원숭이가 쩌렁쩌렁 외쳤다.
“정체를 밝히시오. 요족 중에 최근 합체기에 이른 원류(猿類) 수사는 한 명뿐인데 당신은 누구시오?”
농 가 노조가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누군지는 잘 궁리해 보십시오. 이번에는 농 노괴가 직접 나섰기에 저들을 살려두지만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꼭 명심하십시오.”
거대 원숭이가 험악하게 포효하고 전신에서 괴이한 은색 화염을 일으키더니 농 가 노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은색 화염과 거대 원숭이의 몸이 허공에서 합쳐지며 별안간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결국 검은 구멍 속으로 거대 원숭이가 사라질 때까지 농 가 노조는 무슨 생각인지 꼼짝 않고 서있기만 했다.
“괜찮으십니까?”
잠시 후 보라색 장포 중년인이 황급히 장로들을 이끌고 날아와 공손히 물었다.
“내가 지기라도 했을까봐 그러는 것이냐!”
“절대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아버지께서 반룡(半龍)의 모습으로 변신까지 하셨기에 걱정되어 물은 것이지요.”
“가까이에 있었으니 너도 들었겠지. 농 가 가주로서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더냐?”
“여낭이에 관한 일로 아버지께 보고를 드리려 했으나 상대가 이렇게 빨리 행동에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강력한 요족 수사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여낭이? 이미 시집간 아이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것이야. 흠, 돌아가서 상세히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예!”
의아하다는 농 가 노조의 눈빛에 가주가 서둘러 답했다.
“진룡의 피를 깨워 반룡으로 변한 모습을 다 보게 되었네요. 맨몸으로 요족 수사와 힘을 겨루다니 대단하십니다.”
기령족 천추성녀가 천천히 날아와 미소 지었다.
“합체 후기 수사인 노부가 겨우 초기 수사도 잡아들이지 못했는데 좋아할 일입니까? 성녀께서 노부를 비웃는 것은 아니겠지요?”
농 가 노조는 칭찬에도 전혀 희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하, 요수는 본래 강력한 신체 능력으로 유명하고 그중에서도 원숭이류는 두말할 것도 없지요. 보물 없이 맨몸으로 상대하셔서 그렇지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셨다면 상대도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라면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계십니다.”
성녀의 말에 노조가 묘한 얼굴로 냉소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었습니까?”
“천추 수사와 따로 할 말이 있으니 너희는 모두 물러가 있거라.”
황포 소녀의 물음에 노조가 팔을 저어 농 가 수사들을 물리고 머리에 난 뿔과 비늘을 거둬들였다.
“이렇게 신중을 기하시는 것이 상대의 내력이 보통이 아닌가 봅니다.”
“노부는 성도(聖島)의 수사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인족과 요족의 공동의 성지, 성도 말입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낯선 합체기 요족 수사가 나타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천 년마다 자질이 뛰어난 양족 수사들을 데려다 제자를 충원해 왔으니 몇만 년이 흐른 지금 얼마나 많은 합체기 수사를 양성했을지 모를 일이지요. 개인적으로는 2, 30명은 될 거라고 봅니다. 양족의 존망이 걸린 큰일이 아니면 그곳의 합체기 수사는 성도를 떠나지 않지만요.”
“듣자니 영족의 성묘(聖廟)와 비슷한 곳이네요. 저도 영족 성묘 중에 얼마나 많은 성령급 존재들이 있는지 모르고 있으니까요.”
황포 소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상대가 성도 출신이라고 의심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항시 성도를 지키는 요족 병사 부대 중에 극히 희귀한 금강요원족(金罡妖猿族)이 있다고 들었는데 생김새가 이곳에 나타난 요족 수사와 유사했습니다.
평범한 합체 초기 요수가 아니라면 분명 숨겨둔 다른 신통이 있을 테고 노부가 전력을 다한다 해도 상대를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럴 바에야 괜히 성도와 분쟁을 만들고 싶지 않아 보내준 것입니다.”
농 가 노조가 생각을 정리하고 속마음을 드러냈다.
“직접 겨뤄보지 않아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을 떠나기 전 방출한 은색 화염은 보통이 아니더군요. 직접 허공을 녹이다니 위력이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금강요원족의 신통 중에 구영진화(九嬰眞火)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강력한 신통이지만 잘 내보이지 않아 어떤 진화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렇다면 수사께서는 상대가 금강요원족일 거라 믿으시는군요.”
“십중팔구 그럴 겁니다.”
“흠, 성도 수사라면 어디 호소할 곳도 없으니 이번 일은 참으셔야겠습니다.”
“흥, 노부도 상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성도의 체면을 살려준 것뿐입니다. 게다가 그 원숭이가 떠나기 전 하는 말을 들어보니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지도 않고요.”
“농 수사께서 결정을 내리셨으니 저는 참견하지 않겠습니다. 그보다 밤을 지새우며 상의했지만 아직 합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설마 이렇게 시간만 끄실 건가요?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농 가에만 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가봐야 할 곳이 더 있다는 뜻이지요.”
황포 소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농 가의 조건은 간단합니다. 전함 한 대마다 폐령(廢靈) 열 마리를 교환해 준다면 농 가에서 제련하는 경천전함의 3분의 1을 내줄 것입니다. 아주 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기령족에서 폐령을 동족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농 가 노조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답했다.
“열 마리는 절대 안 됩니다. 기령족에서 폐령을 동족 취급하지 않아도 이종족에게 넘기는 것은 금지하고 있어요. 이번 거래는 종족을 배신하는 벌을 무릅쓴 것이니, 전함 한 대당 다섯 마리까지 하시죠. 농 가가 이렇게 쩨쩨하게 나올 줄 알았으면 경천전주도를 삼황이나 칠요왕에게 넘기는 것이 나을 뻔했습니다.”
“천추 수사, 통하지도 않을 격장지계(激奬之計)는 그만두시지요. 무정도 공법을 익혀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실 텐데요. 성녀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노부가 한 걸음 물러서 전함 한 대당 8마리로 하고 농 가에서 제련하는 전함 중 4할을 기령족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노조가 차분히 여인을 바라보았다.
“4할은 좋습니다. 하지만 8마리는 안 되고 7마리까지는 고려해 보지요.”
“알겠습니다. 전함 한 대당 폐령 7마리, 총수량의 4할로 합의를 봅시다. 그럼 이제 마겁이 도래하기 전에 어떻게 협조를 하면 좋을지 이야기해 보시죠.”
“물론이지요. 거래만 무탈하게 진행되면 기령족은 농 가와 계속 협조를 해나갈 것입니다.”
노인이 조건을 수락하자 천추성녀가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성녀, 자세한 이야기는 탑으로 돌아가 마저 하시지요.”
농 가 노조는 정중한 태도로 성녀를 안내했다. 이미 금털 원숭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눈빛이었다.
겨우 합체 초기 수사가 와서 행패를 부린 것과 농 가의 존망이 걸린 마겁을 비교하자면 무엇이 중요한지는 명명백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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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금색 원숭이는 은색 화염으로 강제로 영선궁 외벽 금제를 뚫고 나와 병사들에게 발각이 되었지만 기이한 둔술로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병사들은 영선궁 9층으로 가서 사정을 물었고 달아난 이가 합체기 요족 수사라는 설명에 기함하고는 이 일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하지만 금색 거대 원숭이가 농 가의 거처에서 난동을 부리고 갔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 일로 적잖은 고계 수사들이 성도를 떠올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한립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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